✝️
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8 : 1~15🍑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 본문
https://tripol.tistory.com/457
글씨체가 안바뀌네요~
열왕기상 18:1.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 년에 -
'많은날'(*, 야밈 라빔)이란 표현은 어감상(語感上) '세월이 제법 많이 흘렀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언제로부터 계산해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말인가? 아마도 이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체류하기 시작한 때(17:8-16)로부터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본절에서 '제 삼 년에'라는 설명이 곧 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즉 히브리적 시간 계산 방법에 의거할 때 '제 삼 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실지로 만 3년이 못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신약성경에 의하면, 엘리야 시대의 가뭄은 3년 반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4:25; 약 5:17). 따라서 본절의 '제 삼 년에'는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을 선포한 때(17:1)를 기점으로 잡고 계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Prlpit Commentary, Lange, Keil & Delitzsch).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
'보이라'(*, 라아)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물론 '가서 만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보다 폭넓고 깊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단어가 '제시하다', '증명해 보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동사에 의해 표현되는 행동은 앞서 선행된 어떤 예시, 예견에 대한 결정적 증거 제시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본장에서 엘리야의 행적은 이러한 의미에 부합된다. 즉 엘리야는 일찍이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한 바 있다(17:1).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가뭄 종식의 예언을 위해 다시 아합과 만나도록 명령받는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그 같은 선포를 하여야만 가뭄과 같은 자연력의 고삐를 쥐고 계신 분은 바알(Baal)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17:1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제 아합에게 '보이러'가는 엘리야의 행동은 여호와의 하나님되심을 '증명해 보이러'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
사마리아(Samaria)는 아합에 의해 소위 자연의 풍요로움과 생산의 풍부를 보장한다는 바알 신을 섬기는 중심지가 된 곳이다(16:29-33).그런데 바로 그곳이 기근(饑饉)으로 허덕였다는 점은 본서 기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다름아니라 바로 바알 숭배의 허구성을 폭로해 주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심하였더라'(*, 하자크)는 말은 '아주 맹렬하였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곧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가뭄이 사마리아를 덮쳤다는 말이다.
3. 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궁내 대신 오바댜 -
'오바댜'(*, 오바드야후)는 '여호와를 섬기다'는 뜻이다. 특히 이 이름 속에 담긴 동사 '아바드'(*)는 '노예처럼, 종처럼 섬기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이름 그대로 오바댜(Obadiah)는 지극한 열심으로 여호와를 섬긴 사람이다. 즉 당시 바알 숭배의 심장부라 할 아합 궁중의 고위직에 있었던 자였음에도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 일백 인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4절)은 가히 그 신앙의 열성과 순수함을 짐작케 해준다. 한편 '오바댜'는 구약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대상3:21; 7:3; 8:38; 9:16; 대하 17:7; 34:12; 스 8:9). 따라서 동명이인(同名異人)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할 것이다.
크게 -
'크게'(*, 메오드)는 '대단히', '지극히' 등의 뜻을 갖는 부사이다.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태도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구약에서 약 300회) 사용되었다(신 6:5; 왕하 23:25). 한편 신약에서 이 단어는 '마음과 힘(mind and strength)을 다하여'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말이 갖는 심도를 잘 드러내 준다(막 12:30; 눅 10:27).
여호와를 경외하는 -
'경외하다'에 해당하는 '야레'(*)에는 '두려워하다'.'놀라워 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접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체험적 신앙을 은연중 강조해 준다.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인을 가져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
이때가 언제인지 정확치 않으나 학자들은 대개 엘리야의 가뭄 선포(17:1) 이후로 본다(Hammond). 그것은 두어 가지 가능한 추측 때문인데 곧 다음과 같다. (1) 엘리야의 정면 도전(가뭄 선포)에 대한 보복 조처였으리라는 추정(Hess, Menken)이다. 한편 이세벨(Jezebel)에게 박해를 당한 '선지자들'이란 아마도 선지자 학교의 생도들일 것이다(B hr, Hammond, Keil, K. Austel). 이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삼상 10:1-16 강해, '선지자 학교'를 참조하라.
선지자 일백 인을...굴(窟)에 숨기고 -
사마리아 서북방 약 60km 지점에 위치한 갈멜산(Mount Carmel) 주변에는 당시 약 2,000개의 석회굴이 있었다고 한다(Montgomery). 따라서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숨긴 곳도 이 지역 어느 곳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갈멜산 일대는 피난자들의 은신처였는바 신약 시대에는 일명 '은자(隱者)의 고장'이라 불리울 정도였다.
가져 -
원래 '가져'에 해당하는 '라카흐'(*)는 '취하다', '움켜 쥐다', '채어가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대단히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있다. 즉 이는 이세벨의 마수가 시시각각 닥쳐오는 절박한 시점에서 재빠르게 선지자들을 빼돌리는 오바댜의 스릴있는 움직임을 연상시켜 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 성경처럼 '가져'라고 번역하기보다 '빼돌려'라고 번역함이 보다 바람직하다.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물 근원(根源) -
이 말은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좀 어색한 표현이다. 그런데 '근원'에 해당하는 '메에'(*)는 본래 '창자', '생식기' 등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인가를 산출해 내는 내부의 근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의 '물 근원'은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곳'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는 '수원지'(水原地)라는 보다 널리 쓰이는 말로 표헌하는 것이 더 낫다.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
극심한 가뭄과 기근 중에 아합의 관심이 이처럼 말과 노새 보호에 쏠려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혹자는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우리 속의 짐승을 위한 불가피한 처사로 변호하지만(Hammond), 아합의 일차적 관심이 백성에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아합의 권력 기반이 말과 노새가 상징하듯 군사력과 상업력에 있었지, 여호와로부터 위탁받은 백성들로부터의 신망(信望)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아합은 홀로 길로 가고 -
아합이 왕의 신분으로써 호위 군사나 수행원도 없이 홀로 탐색에 나섰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홀로'(*, 레바드)란 말은 '따로', '별개로'의 뜻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한편 사막 지대의 군주나 족장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당시 극심한 가뭄 상황하에서 아합왕이 직접 수원지 탐색에 나선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한다(Pulpit Commentary).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저를 만난지라 저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저가 알아보고 -
오바댜와 옐리야가 이전부터 교분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로의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오바댜 편에서 볼 때 엘리야를 식별하기란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항간에는 엘리야의 명성과 함께 그의 옷차림과 특이한 용모가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8).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아여. -
오바댜가 취한 이러한 태도와 언사(言辭)에서 그가 엘리야를 향해 품고 있는 존경심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오바댜는 당대의 고관이고(3절) 엘리야는 일개 야인(野人)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가인 오바댜가 고군 분투하는 신앙의 전사(戰士) 엘리야에게 존경심을 품지 않았을리 만무하다. 더욱이 엘리야가 행하는 권능은 놀라운 것이며(17:13-24) 오바댜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12절). 따라서 오바댜는 지금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아돈'(*, '주인', '소유자'라는 뜻)의 강조형으로서 오직 인간과 만물의 소유주이자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런데도 오바댜가 엘리야를'내 주'라고 칭한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에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엘리야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8.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
원문에는 '엘리야가 여기 있다'는 말이 단지 '힌네 엘리 야후'(*)로 되어 있다. 이때 '힌네'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감탄사로서 '보라 !'(behold !)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본절은 '보라, 엘리야다 !'란 단순하면서도 생생한 표현이 된다. 한편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엘리야에게는 전국적인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던 듯하다. 그런 시점임을 감안할 때 본절은 대단한 박력의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 엘리야가 이 같은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아합을 만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1절,약 5:17).
9. 가로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붙여 -
여기서 '붙여'로 번역된 '나탄'(*)은 '주다'(give)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약 2,000회 정도 사용되는 이 동사는 의미 또한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즉 이는 '만들다', '지불하다', '놓아 두다' 등 번역상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띨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본절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라는 문구가 이미 의미 파악의 열쇠로 주어져 있다. 즉 여기서 '붙여'는 죄의 대가로 인한 응징, 형벌의 개념으로 사용된것이다(8:32 등). 한편 오바댜가 아합 왕에게 엘리야 발견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곧 죽음과 동일시된 까닭은 10절이하, 특히 12절에서 발견된다. 즉 오바댜는 자신이 엘리야를 찾았다고 아합에게 알린 때에 만약 엘리야가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저희가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는 앞서 사르밧 과부의 맹세와 동일한 표현이다(17:12). 그러나 이는 당시 아직 여호와 신앙에로 개종하지 아니하였던 사르밧 과부의 말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오바댜는 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물이고 여호와 역시 오바댜의 하나님이시지만 여기서는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리야의 하나님'으로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왕하 2:14).
당신을...나라가 없었는데 -
이 말은 일종의 과장법적 표현이다. 비록 아합 통치하의 이스라엘이 강력했다지만, 당대 근동의 패권을 온통 거머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모든 나라와 족속을 속속들이 뒤졌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노릇이다. 16:29 주석참조. 여하튼 본절은 당시 아합이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아합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한껏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합이 당시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의 저주(17:1) 탓으로 생각했기 때문인듯하다(Hammond, 17절). 그러므로 그 저주를 해소하려는 주술적 조처와 적개심 때문에 아합은 그토록 열심히 엘리야를 수배했을 것이다.
11.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네 주 -
여기서 '주'라는 말은 '아돈'(*)으로 일반적인 군주(君主)나 주인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7절 주석 참조. 본절에서는 오바댜가 섬기던 당시의 이스라엘왕 아합(Ahab. B.C. 874-853)을 지칭한다.
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여호와의 신이...이끌어 가시니라 -
오바댜가 '여호와의 신', 즉 하나님께서 돌연하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엘리야를 그 어느 곳으로 이동시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바댜의 염려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믿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靈)이 이와 같은 돌연하고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빌립(Philip)을 옮긴 사실을 볼 수 있다(행 8:39).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
여기서 '어리다'는 말의 기본형인 명사 '나아르'(*)는 이유기(離乳期)에서 사춘기를 지난 청소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폭넓은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에서 이제 겨우 젖뗀 유아 모세와 다 자란 압살롬을 똑같이 '나아르'로 부르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출 2:6; 삼하 12:16; 14:21; 18:5). 그러므로 '나아르'는 한 인간의 개체적인 틀이 거의 완성, 고정되는 중요한 시기를 지칭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바댜는 바로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훈련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신앙이 가진 안정성, 확고성을 가히 짐작해볼 수 있다.
13.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인을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
오바댜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려고 이와 같은 말을 하는게 아니다. 더군다나 오바댜가 선지자들에게 피신처와 음식을 공급한 것은 극비리에 진행된 일이었지 않은가(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엘리야와 한 편에 속하는 사람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엘리야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여실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오바댜는 엘리야가 여호와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러한 비밀스러은 일조차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14.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저가 나를 죽이리이다
이제 당신의 말씀이...나를 죽이리이다 -
이러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오바댜의 당혹감과 불안감을 엿볼 수 있다. 즉 당시 오바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아합과 맞닥뜨리는 죽음의 위협에서 분명히 빼돌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2).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바댜의 그 같은 염려는 아직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빚어진 기우(杞憂)임(15절)이 이내 드러나고 만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673).
15.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
모시는 -
이에 해당하는 '아마드'(*)는 문자적으로 '...앞에 서다'(standbefore) 뜻이다. 그런데 본절에서처럼 '여호와앞에 서다'와 같이 쓰이는 경우. 신학적으로 (1) 중보 기도를 위해 선다는 의미와 (2) 헌신과 충성의 표시로 선다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이 중 (2)의 의미를 채택하여 '모시다'로 번역한 것이다. 기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삶이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意識)에 기초하기 마련이다.
만군(萬軍)의 여호와 - 여기서 '만군'(*, 체바오트)이란 곧 '군대들'(armies)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호칭하는 경우는 구약에서 261회나 된다. 본래 이 명칭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삼상 17:45)을 뜻하였으나 후에는 점차 천군 천사를 다스리는 하나님(22:19)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 말은 강한 군사적 의미와 함께 온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삼상 1:3 주석 참조. 한편 '만군의 여호와'란 호칭은 열왕기에서는 처음으로 본절에 등장하였다. 이 호칭은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서에 많이 등장한다(사1:9; 2:12; 8:13; 렘 6:6; 20:12; 32:14).
오늘날 -
학자들 간에는 여기서의 '오늘날'(*, 하욤)이 꼭 문자대로의 오늘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다(bahr). 물론 '하욤'을 문맥과 함께 '지금' 혹은 '이번에는'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합을 꼭 만날 것이라는 엘리야의 결의에 찬 표현으로서의 본절은 그대로 '오늘'의 의미로 두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영역본들도 이를 '오늘'(today)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Living Bible 등).
보이리라 -
1절 주석 참조.
성경 말씀: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십시오.
신 6:5
이처럼 요시야왕과 같이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고 모세의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왕은 요시야왕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왕하 23:2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막 12:30
그는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눅 10:27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게 간절히 기도하자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약 5:17
🟠🔴
🟢
🟣
하나님의 성품/속성:
예언, 보호, 생명의 근원,
권능, 7절; 주(아도나이);
인간과 만물의 소유주/
지배자, 운명, 말씀, 군주,
주인, 초자연적인 능력의,
신비, 영이신, 계시,
피난처, 계획과 목적을
세우신, 만군의 여호와,
지휘하시는, 다스리심/통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외, 섬김, 지극한 열심으로,
순수함, 존경, 경의, 용기/
정면 도전, 훈련, 안정되고
확고한 신앙, 신뢰, 헌신,
충성,
🔵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해 보이러 가는 믿음의
발걸음이다.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자.
체험적 신앙. 고군분투하는
신앙의 전사 엘리야처럼..!🩸✝️
🌱🌿🌳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가진 하나님께 충성스로운 삶을 드린 엘리야 선지자를 본받아야 겠다.
죽음이 문 앞에 서 있는 상황에서 엘리야 선지자처럼 하나님을 위해 용기있게 행동하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아 믿음의 도전으로 주님의 성공을 이뤄냈던 성경인물들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닮는 순종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eJ5JpKB8u8
주님의 승천과 우리의 연합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누가복음 24:51)
변화산 이후에 주님께 발생한 사건들은 우리에게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때로부터 진행되는 우리 주님의 삶은 전부 우리를 대신하여 겪으신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 오르실 때까지의 주님은 삶은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완전한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변화산에서부터는 겟세마네와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시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생소한 것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입구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누구에게나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셨습니다. 승천하여 하늘에 오르신 우리 주님은 인류를 위하여 하늘 문을 여셨습니다.
주님의 변모는 승천하시면서 완성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변화산 상에서 하늘로 승천하셨다면 혼자만 하늘에 가시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영웅에 불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영화에 등을 돌리시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으며 타락한 인류와 자신을 일치시켰습니다.
승천은 변모의 완성입니다. 주님은 처음에 가지셨던 영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인자로서 영광을 얻으시는 가운데 하나님께 돌아가시게 되셨습니다. 인자가 승천함으로 인하여 지금은 누구든지 주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보좌에 곧바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가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인자)이 되셔서 스스로 자신 안에 있는 전지전능하신 능력과 무소 부재를 제한하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신성한 모든 능력이 다시 완전하게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로서도 하나님의 보좌에서 모든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승천한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왕 중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십니다.
https://m.cafe.daum.net/mercyreformedchurch/ULF8/1394?listURI=%2Fmercyreformedchurch%2FULF8
https://i.pinimg.com/736x/20/14/0d/20140d2195a2213e4f7f197f32fbe9d0.jpg
https://i.pinimg.com/564x/41/86/1a/41861a73a404dd51ae61181a52011957.jpg
https://i.pinimg.com/564x/89/73/57/897357d7d7faa38e8fac27f6b83746f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