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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8 : 16~29🍑머뭇거리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으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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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8 : 16~29🍑머뭇거리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으로

credo15229850 2024. 5. 18. 08:17

https://tripol.tistory.com/457

 

히브리어 열왕기상 18장 전체 원어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와예히 야밈 랍빔 우데바르 아도나이 하야 엘 엘리야후 밧솨나 핫쉴리쉬트 레모르 레크 헤라에 엘 아흐압 웨에테나 마탈 알 페네이 하아다마 개역개정,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

tripol.tistory.com

열왕기상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

여기서 '만나다'에 해당하는 '카라'(*)는 의도적인 만남을 말한다. 이는 곧 7절의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과 같이 분명한 목적을 지닌 만남을 의미한다.

 

 고하매 아합이...만나려 하여 -

아합이 만만찮은 중대사인 '꼴 구하는 일'(5절)을 간단히 포기하고 이처럼 즉각 엘리야를 만나려 한것을 보면, 엘리야의 비중이 대단했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그 비중이란 실상 아합이 엘리야를 어떤 식으로든 가뭄의 원인으로 결부시켜 생각한 데서 비롯된다. 10절 주석 참조. 그런 점은 다음 절에서 아합이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troubler of Israel)로 부른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 출현 소식을 접한 아합은 이제야 가뭄의 원인을 해소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Hammond). 그렇다면 그보다 더 서두를 일이 어디 있겠는가 !



 

 

 

 

 

 

17.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 -

'괴롭게 하다'에 해당하는 '아카르'(*)는 대개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아합은 지금 엘리야를 나라 전체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국적(國賊)으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동은 오로지 아합 편에서의 논리만을 반영한 것이다. 우상 숭배 장려 정책을 펴 나가는 아합 왕조(16:29-33)에 대한 엘리야의 평소 행동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훼방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은 가뭄은 그의 저주(아합이 보기엔) 이후에 시작되었다(17:1).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엘리야는 아합에게 불길하고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식할 수있었다면,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자기 바깥의 척도(즉 하나님)로 비쳐 볼 수 있었다면, 문책의 대상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난받을 자는 엘리야가 아닌 바로 아합 자신인 것이다(18절).



 

 

 

 

 

18.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

엘리야는 가뭄의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아합의 비난에 대하여 이처럼 똑같이 '아카르' 동사를 사용하여 아합을 힐난한다. 17절 주석 참조. 즉 가뭄이라는 국가적 재난에 책임이 있는 편은 자신이 아닌 바로 아합과 그의 왕조라는 반박이다. 여기서 '당신의 아비의 짐'은 곧 오므리(아합의 아버지) 왕조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 가문은 아합의 부친 오므리(Omri, B.C. 885-874)가 왕조를 연 이래 더욱 가증한 우상 숭배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다(16:25, 26, 30-33). 따라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민족사의 정도(正道)를 가르치는 오므리 왕조에 대하여 호평(好評)할리 만무하다. 본절에서 엘리야가 단지 아합개인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아비의 집'까지 함께 공박하고 있음도 그 같은 연유에서이다(Matthew Henry).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

물론 오므리 왕조 이전의 왕 중에도 금송아지 숭배등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한 여로보암(Jeroboam, B.C. 930-910) 같은 악왕(惡王)이었다(12:25-33). 그러나 아합의 가증한 죄악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바알(Baal) 숭배를 도입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16:31, 32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9.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그런즉 -

원문은 '왜 잇타'(*, and now)이다. 그 뉘앙스는 이렇다. 지금 서로를 재난의 원인으로 비난하니(17, 18절) '이제 기필코'(*, 앗타, now) 시비를 가리도록 하자! 그런즉 이는 대단한 박력의 도전이 행간(行間)에 넘쳐 흐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

'상에서 먹는다'는 말은 본문의 문맥상 '공급과 지원을 받는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Pulip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왕비의 식탁에서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함께 식사했다는 것은 있음직 하지 못하기 때문다. 사실 '상'(*, 슐한)은 그 식탁에 둘러 앉은 자들 사이의 '교제'를 은유하는, 보다 중요한 용법을 갖고있다(시 69:22; 128:3: 단 11:27). 한편 본절로 미루어 이세벨은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교사처럼 이스라엘에 바알 및 아세라 숭배 이식을 위해 인력을 양성했음을 알 수 있다.

 

 갈멜산 -

갈멜산의 위치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한편 '갈멜'(, 카르멜)은 '정원' 또는 '과수원'을 의미한다. 이 산은 지중해 쪽에 위치한 갈멜 산맥(Mountains Carmel)의 일부로서 각종 식물이 무성하고 또한 석회 동굴이 많은 곳이다. 4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 갈멜 산이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의 대결 장소로 선택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갈멜 산은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에서 보듯 여호와 신앙인들에게도 특별한 장소였지만(왕하 2:25; 4:25), 동시에 바알에게 바쳐진 성소이기도한 때문이다. (2) 갈멜 산은 이스라엘과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두로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때문이다.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모으니라 -

여기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 콜-베네이 이스라엘)이란 이전의 세겜 총회(12:1)에 상응하는 말이다(Montgomery). 즉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집단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12:1 주석 참조. 그런데 21절 이하의 내용으로 보아 갈멜 산에는 이 대표자 집단들이 집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본절은 당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전국 각지에 퍼져 활동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아합이 이들을 집합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기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무렵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전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할을 모두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

원문에서 '두 사이에서'는 '알 쉐테이 하세입핌'(*), 즉 '두 의견(opinion)으로(혹은 사이에서)'이다.그리고 '머뭇머믓 하려느냐'는 '파사흐'(*), 즉 '절뚝거리다'이다. 그러므로 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어느때까지 두 의견으로 나뉘어 절뚝거리려느냐'는 뜻이 된다. 이는 곧 단순히 당시 백성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지적하기 보다는 분열상을 지적, 그 해소를 촉구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숭배를 혼합하려는 세력과 순수 여호와 신앙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것이다(B hr, Keil). 그런데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 그 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백성들은 왕실의 강압적 우상 숭배정책에 눌린 나머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내팽개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를 격발(激發)시켰던 셈이다(마 6:24; 계 3:16). 한편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을 향해 과감한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계시니 우리는 스스로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중용(中庸)이라는 말로 미화시켜서는 아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참된 중용의 도(道)란 애매한 중간치기 내지는 비굴한 기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고 더 경건한 제 3의 길을 따름인 것이다.

 

 백성이 한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

이 장면을 수 24:16 이하와 비교해 보면 아합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즉 여호수아 당시 '하나님과 다른 신 중 과연 누구를 섬길 것인지 결정하라'는 요구에 그 시대의 백성들은 즉각 '다른 신을 섬기다니 말이되는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아합 시대의 백성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아직껏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려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마 6:24).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항상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가 아닌가?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나만 홀로 남았으나 -

나만 홀로 남았으나! 이 말은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가 정말 단 한 명만이 남았음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다만 지금 여호와 선지자로서 활동하는 자는 엘리야 자신 홀로이며, 이제 그 홀홀 단신으로 다수의 바알 선지자와 맞서게 되었다는 극적인 대조에 강조점이 있을 뿐이다(Hammond, Montgomery).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여야만 앞서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4절)가 그 동안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리라는 불필요한 추측(Thenius)을 삼갈 수 있게 된다.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과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탓이다. 즉 19절에는 이교(異敎) 선지자들의 총수가 850인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본절에는 오직 450인만 언급되어 있는 탓에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더군다나 25절과 40절에서도 오직 '바알의 선지자'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 정리될 수 있다. (1)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갈멜 산의 대결에 참예하지 않았다(25절). 따라서 그들은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40절). (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들은 모두 '바알의 선지자'로 통칭(通稱)될 수 있다. (3) 그렇다면 아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이 일부(아세라의 제사장?)를 보내지 않은 탓에 갈멜 산 대결에는 450인의 바알 선지자만이 참석하였을 것이다(B hr, Keil 등).



 

 

 

 

 

 

 

 

 

23.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엘리야는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 신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희생 번제(犧牲燔祭)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백성들과 바알 선지자들 모두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희생 번제는 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막론하고 고대 팔레스틴에있어서 예배의 기본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다(Lange).

 

 각(脚)을 떠서 -

이에 해당하는 동사 '나타흐'(*)는 '잘라서 조각 조각으로 나누다'(cut in pieces)는 뜻이다. 이는 곧 희생(犧牲) 제사에 쓰일 제물을 취급하는 방식을 말한다(출 29:17; 레 1:6, 12; 삿 20:6).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이름을 부르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한 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그 인격의 본질과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다.이름과 존재는 불가 분리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창 25:19-26 강해, '이름짓기' 참조. 그러므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그 존재의 응답을 기대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때 그 이름의 존재가 실존(實存)한다면 필연코 응답이 있을 것이다. 본절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알이 허구 존재가 아니라면, 그 이름을 부르는 요청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밝히리라는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불로 응답(應答)하는 신 -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의 희생 제의는 제물을 불로 사르는데 초점이 있다. 즉 신이 불태워진 제물을 흠향할 때 비로소 인간의 성의가 가납(嘉納)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곧 신이 있어서 차려진 제물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불로 응답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그런데 바알은 자연력을 지배하는 신이자 태양과 불의 신이었다.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 참조. 그러므로 불로 응답하는 일은, 바알이 참신이라면, 그의 전문 분야와도 같다. 그런데도 바알은 끝내 침묵하고 말았으니(25-29절) 그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이다. 한편 이처럼 그 신의 가장 핵심 요소를 공략하여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찍이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써 애굽의 거짓 신들을 무색하게 한것과 비견된다(출7:4-12:34).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너희는 많으니 먼저...부르라 -

본절은 결과적으로 엘리야의 승리(30-40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즉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해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는 확고한 자신감을 드러내어 보였다. 다시말해 우선권을 잡은 바알 선지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던 반면(26-29절) 엘리야의 승리를 더욱 값지고 위대한 것으로 부각시켜주는 역할을 하여 준 셈이다.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아침부터 낮까지 -

여기서 '아침'(*, 보케르)은 '이른 아침', 즉 동이 트고난 직 후를 의미한다. 그런데 바알 선지자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회합을 갖은 이유는 무더운 팔레스틴의 기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 총론, '성경의 무대 팔레스틴' 참조. 다음으로 '낮'(*, 초하르)은 다음 절에서 '오정'으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그러므로 바알 선지자들은 이미 5-6시간 정도를 바알의 이름을 르며 뛰논 셈이다.

 

 응답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아나'(*)는 본래 '보다', '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들을 외면치 말고 사랑과 관심을 갖고서 '쳐다 봐 달라'는 간절한 염원(念願)의 말임을 알 수 있다.

 

 뛰놀더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사흐'(*)는 본래 '절뚝거리다'는 뜻으로 이미 21절에 나온 단어이다. 2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이 의견이 나뉘어 있다. (1)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광란(狂亂)의 춤(28절)을 비꼬아 표현한 것이다(PulitCommentary). (2)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춤의 형태가 실제로 절뚝거리는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Davis). 이상의 두 견해 중 어느 쪽을 취하여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엘리야가 계속적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한 것으로 보아(27절) 첫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상 춤은 자주 예배 의식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나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의 처녀들이 포도밭에서 춤춘 것, 법궤앞에서 춤을 춘 다윗 등 많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출15:20; 삿 21:16-24; 삼상 18:6; 삼하 6:14). 그러나 이러한 춤도 참된 찬양의 대상자에 대한 진솔한 경외의 표현이 아니라면 본절에서 보듯 이는 한갓 광란의 몸짓에 불과하고 마는 법이다. 출 15:20 주석 참조.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저는 신인즉 -

이처럼 '바알은 신이니까'로 서두를 연 본절은 그러나 신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즉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오정에 이르기까지 간절히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엘리야는 바알 우상의 허구성을 유한한 인간에 빗대어 조롱조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묵상하고 있는지 -

바알 선지자들이 그토록 발버둥치고 있는 마당에(26, 28절) 바알은 멀찌 감치 물러 앉아 묵상에 잠겨 있다고만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런 장면은 없을 것이다.

 

 잠간 나갔는지 -

'나가다'에 해당하는 '수그'(*)는 '옮기다', '이동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잠간 자리를 옮겼는지'의 뜻이다. 그런데 이는 '좀 쉬려고 물러갔는지' 정도의 뉘앙스를 지닌 말이라 한다(Rashi). 하지만 신이 쉬어야 한다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실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시며 곤비치 않으시지 않는가(사 40:28)!

 

 길을 행하는지 -

여기서 '길'(*, 데레크)은 '여행'(대개 수일이 걸리는)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이 여행을 떠나서 자신의 경배자들의 청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 유한성(有限性)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시 139:7-12)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무더위로 인해 한낮에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성경 총론, '성경의 고대 팔레스틴' 참조. 엘리야의 조롱은 바로 그러한 습관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 121:3, 4).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그 규례를 따라...상하게 하더라 -

(신 14:1; 렘 16:6; 41:5; 47:5). 그런데 본절에서 처럼 피가 흐르기까지 자해하는 습성은 피가 신비한 효능으로 신을 감동시킨다는 이교적 관념 때문이다(Plutarch). 즉 당시 이교도들은 자해와 고행이 신에 이르는 길을 여는 일종의 공로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한편 본절은 바알 선지자들의 한낮, 팔레스틴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의 광란을 묘사함으로써 마지막 안간 힘을 써서 바알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해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지나친 금욕주의적 태도 또한 자의적(恣意的) 숭배의 소산으로 간주하여 참된 경건에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골 2:20-23).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진언을 하여 -

이에 해당하는 '네부아'(*)의 문자적 뜻은 '미친듯이 예언하다'이다. 따라서 이 예언이 참된 예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실 이러한 예언은 광란에 찬 자해 행위자들이 한숨과 신음을 토로하는 현상에 다름아니다Movers). 그리고 이러한 예언이란 대개 비인격적인 외적 조작, 즉 주문(呪文)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려는 주술적 성격이 짙게 마련이다. 따라서 본절의 진언은 일종의 주문, 신비한 웅얼거림인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저녁 소제(素祭) 드릴 때까지 -

요세푸스의 기록(Josephus, Antiq., XIV, 65))에 따르면 이스라엘 인들이 저녁 소제를 드리던 시간은 오늘날의 오후 3시 쯤(유대력의 9시)에 해당한다고 한다(A. Edersheim, Pulit Commentary). 이때 신약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시간과도 일치한다(행 3:1). 한편 '소제'(*, 민하)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비교적 간단한 제사이다. 이 제사에는 희생 제물이 아닌, 떡과 과자가 바쳐졌다(출 29:28-41; 민 28:3-8). 이 소제의 의미는 백성들이 자신의 일상적이고 전체적인 삶을 하나님께 위탁한다는 뜻이다. 레 2:1-3 강해, '소제에 대하여' 참조.

 

 아무 소리도...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

이 부분에는 '전혀 없다'는 뜻인'아인'(*)이 세 번이나 거듭된다. 이 단어는 26절에도 두 번이나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점층법적 강조의 효과를 준다.

 

 

 

🟠🔴
🟢

 

🟣
하나님의 성품/속성:
분명한 목적을.., 명령,
진노하시는,  진리, 참 신,
실존하시는, 응답의, 승리,
무소부재하신,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전, 순수 여호와 신앙,
과감한 결단, 경건, 섬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
희생, 예배,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는 확고한
자신감, 삶의 일상/전체를 
하나님께 위탁하는,
🔵
나의 행위와 생각들을
올바른 척도인 하나님으로
비쳐 보아 문제의 원인을
찾아 회개 또는 기도를
선택하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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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근했던 신앙이 엘리야의 용기있는 신앙의 도전과 순종의 모습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참 신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심을 인정하고 따르는 열정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5Z9UT5pC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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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비합리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마태복음 6:26, 28)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냥 자랍니다. 바다와 하늘과 별들과 달을 생각하십시오. 그것들은 다 그냥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자신들의 존재 역할을 잘 감당하는지요! 종종 체계적이며 유용한 사람이 되려는 우리의 자아 의식적 노력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통하여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오직 한 길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한 길은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위의 구절을 다르게 표현하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될까 염려하지 말고 단지 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즉 근원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생수의 강이 당신으로부터 흐를 것입니다.(요 7:38) 상식과 이성으로는 생명의 샘에 닿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성장은 신경을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마음을 집중함으로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십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십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 집중하고 있으면 우리는 들의 백합처럼 영적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은 우리를 붙들고 많은 말을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늘의 별들처럼, 들의 백합처럼 단순하고 꾸밈없이 그들의 삶을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만일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당신이 모르는 가운데 당신이 사는 매 순간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https://m.cafe.daum.net/mercyreformedchurch/ULF8/1396?listURI=%2Fmercyreformedchurch%2FULF8

 

5월 18일 주님은 나의 최고봉

신중한 비합리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마태복음 6:26, 28)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냥 자랍니다.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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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멋짐 학대~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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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장사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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