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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8 : 30~46🍑불로 응답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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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8: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
엘리야가 이처럼 백성들을 가까이 오라고 부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1) 이제까지 바알 제단 근처에 모여 있던 백성들을 여호와의 제단 주위로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2) 이제부터 시도하려는 자신의 모든 행위(32-39절)에 어떠한 협잡도 없음을 명백히 증거키 위함이다(Hammond).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
'수축하다'에 해당하는 '예라체'(*)는 '고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서졌던 것을 고쳐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갈멜 산상에는 일찍이 여호와의 제단이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서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제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음을 증거해 준다(4절; 19:10). 따라서 갈멜 산의 여호와 제단도 이때 헐렸다고 봄이 옳음직하다.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열 두 돌을 취하니 -
여기서 엘리야의 행동은 약속의 땅 입성시의 여호수아의 행동과 비슷하게 보인다(수 4:9). 그런톄 북왕국의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엘리야가 이처럼 '열 두돌'을 취하여 돌단을 쌓은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지만(12:24)) 그들 모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음을 엘리야는 바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왕국분열 이래로 멸망에 이르기까지 두 왕국은 한번도 재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더욱이 앗시라아에 포로로 잡혀간 북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부분은 영원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이스라엘 집안의 '잊혀진 열 지파'로 사라져갔다. 하지만 '열 두 지파 온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열 두 사도'의 터전 위에 건축된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던 것이다(창 35:9-12; 삼하 7:16; 계 7:4-8).
이 야곱은...하신 자더라 -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을 각성케 하는 여러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야곱, 이스라엘, 여호와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야곱'(Jacob)에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한 조상에서 비롯된 헐통적 단일성을 가진 존재들임이 부각된다(창 35:22-26). 그리고 그 야곱이 '이스라앨'(곧 민족의 이름이 된)로 불리은 것(창32:24-28)에서는 이스라엘(Israel)민족이 여호와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백성임이 강조된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소명의 주체이신 '여호와'를 섬길 때에만 민족적 정기를 흐리지 않는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출 19:5, 6).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
원문 '브쉠 여호와'(*)는 단순히 '여호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hovah)라는 뜻이다. 즉 '의지하여'는 해석상 추가된 말이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굳이 '여호와의 이름'과 관련 엘리야의 단 쌓는 행위를 설명하는 이유는, 그 단이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여호와께만 드려지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름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들과 구별케 해주는 기능을 한다. 24절 주석 참조.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쌓은 단은 다른 어떤 것과도 동일시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된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본절은 '여호와께만 봉헌하기 위해', 혹은 '여호와만을 기념하기 위한'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겠다.
곡식 종자 두 세아 -
'세아'(Seah, 창 18:6에는 '스아'로 번역되어 있음)는 구약시대 당시 고체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다. 1세아는 1/3에바(Hphah)로서 약 7.6리터이다. 그러므로 '두세아'는 약 15리터 정도의 양임을 알 수 있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용납할 만한 -
이 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결정하기 어렵다. 즉 두 세아정도의 곡식을 부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두 세아의 곡식 종자를 심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자(前者), 즉 용량을 의미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B hr, Hammond 등).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
레 1:3-9에는 소(혹은 송아지)를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경우에 관해 수록되어 있다. 즉 그때에는 제단에 장작을 펴 놓고 그 위에 각을 뜬 제물을 벌여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엘리야는 그 같은 율법의 규정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다.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부으라 -
여기서 말하는 '통'(*, 카드)이 얼마 만한 용량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괄레스틴 여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물 항아리(17:12, 14, 16; 창 24:43, 45; 삿 7:16, 19, 20)를 가리키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다음절까지 살펴 보면, 번제물과 나무 위에는 무려 열 두통의 물이 부어진 셈이 된다. 그런데 율법 규정에 있지도 않은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명확하다. 즉 엘리야는 이로써 인위적인 협잡의 여지가 없음을 명백히 백성들에게 인상지우려 한 것이다. 30절 주석 참조. 또한 이처럼 온통 물로 적셔진 제물에 점화시키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써만 가능함을 주지시키려 한 것이다(38절).한편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대의 이교 제사장들 중에는 제단밑에 빈 공간을 판 뒤 그 속에서 불을 붙이고서 이를 이적이라고 속이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Pulit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249).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세 번 그리하라 -
한글 개역은 자칫 두 번 물을 부은 뒤 다시 세 번, 즉 도합 다섯번의 물붓기가 행해진 걸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원문은 '솰로쉬'(*, three), 그러므로 '쉈리쉬'(*, third)이다. 그러므로 물붓기는 도합 3회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동일한 행동이 반복되는 것은 최종적이고 결론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면 레아는 3명의 아들을 낳자 비로소 야곱의 완전한 아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창 29:34). 또한 전장(前章)에서 엘리야가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펴서 엎드린 것도 3회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의혹을 없애기 위한 물 붓기는 3회로 그 의미롤 충분히 달성한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 혹자는 4통씩 3회의 물 붓기로 도합 열 두 통의 물을 사용한 것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기 위한 의도적인 작업이라고 말한다(B hr). 3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하튼 극심한 가뭄 중에(17:1, 7) 이러한 열 두 통의 물은 과연 어디서 길어 온걸까? 혹자는 이를 지중해에서 길어 온 바닷물로 추추하지만(Mattew Henry), 그보다는 갈멜산 옆을 통과하는 기손 시내(Kishon Brook)에서 길어 왔으리라는 추측이 더 유력하다. 19절 지도 참조. 왜냐하면 수많은 지류에서 물을 공급받는 기손은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물줄기이기 때문이다(Beek).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단으로 두루 흐르고 -
원문에는 '단 으로'란 말에 '주위', '주변'을 의미하는 '사비브'(*)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단 주위에(물이) 두루 흐르다'는 뜻이다. 즉 많은 물을 들이부은 결과(33,34절) 돌로 쌓은 제단(31, 32절)이 온통 물이 줄줄 흐르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형편에서는 이교 제사장들이 제단 밑에 한 사람을 숨겨 불붙이는 것과 같은 속임수는 참으로 불가능하다(Stanley).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저녁 소제 드릴 때에 -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말이다. 29절 주석 참조. 그런데 29절에서의 시점이 본절에 중복되는 탓에 독자들은 약간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30절 이하 지금까지의 엘리야의 모든 행동이 바알 선지자들의 광란이 계속되는 중에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별 무리가 없다.
아브라함과...이스라엘의 하나님 -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라 할 조상들이다. 그런데 그 조상들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를 각별히 호칭하는 이유가 의미 심장하다. 즉 여호와는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으로 자신을 선포하셨다(출3:6). 그 결과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계약 관계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라고 믿는 한 파기(破棄)될 수 없다. 즉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닌 무엇이 되지 않는 한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 뿐이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야는 본절에서 야곱의 이름조차 훗날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된 '이스라엘'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31절 주석 참조.
주께서...알게 하옵소서 -
엘리야의 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1)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2) 엘리야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라는 고백, (3) 엘리야 자신의 모든 행위는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특징을 띤다. 사실 엄청난 이적이란 이적 자체와 그것을 행하는 자가 크게 부각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애초에 이적도, 이적을 행하는 자신도 단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겸손과 공손함은 그가 본절에서 사용한 '종'(*, 에베드)이라는 단어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원래 '에베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겸손히 옆으로 비켜 선 엘리야의 참된 선지자적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Mattew Hanry).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여호와여...내게 응답하옵소서 -
'응답하옵소서'는 26절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사용한 것과 같은 '아나'(*)이다. 그런데 본절은 '아나'가 두 번 반복되어 기도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사실 바알 신지자들의 광란의 기도(26-29절)에 비하면 엘리야의 기도는 서운할 정도로 짧다. 그러나 그 간명(簡明)한 기도 속에는 진실되고 순전한 정열과 굵직한 뚝심이 들어 있다. 아무튼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분은 아니시다(마 6:7). 마치 사랑하는 자식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진 어버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단한 한 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는 진심이 깃들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본절의 엘리야의 기도는 중인 부언하지 않고 하나님께 꼭 아뢸 것만 진실하게 구한 기도였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삼상 1:9-18강해, '기도와 기도의 응답'을 보다 참조하라.
돌이키게 -
이에 해당하는 '사바브'(*)는 마음이나 자세의 변화를 뜻하는 단어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된 변화의 상태를 지시하는데 자주 쓰인다(대하 29:6). 본절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은총의 회복, 즉 백성들의 회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알게 -
이에 해당하는 '야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 외에도 보다 폭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참신이든 우상이든 신과 관련될 때는 '관계'에 역점이 주어지는 말이다(신 13:3; 삼상 2:12; 렘 4:22). 따라서 본절에서 이 말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회복시켜 달라는 청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의 '여호와의 불'이란 '번개'와는 다른 초자연적인 불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Lange, Keil & Delitzsch, H. Austel). 한편 구약시대 당시 하나님께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불을 내리셨다. (1) 당신의 언약을 보증하실 때(창 15:17), (2) 하나님께서 친히 현현하실 때(출 3:2),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증거하실 때(출 9:24) (4) 인간의 제사를 열납하실 때(레 9:24)등이다.
번제물과...흙을 태우고 -
여호와의 불에 의해 살라진 것은 번제물 뿐 아니라 이처럼 나무, 돌, 흙까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해 준다. (1) 여호와의 불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를 묘사하기 위함이다. (2) 동시에 거기애는 어떠한 협잡의 여지도 없었음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이다. 사실 제단 밑에 사람을 숨겨 불을 붙이는 협잡으로서는 도저히 이만한 화력(火力)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33주석 참조.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
여기서 '핥은지라'(*, 라하크)는 불길이 혀처럼 널름거리며 도랑물을 증발시키는 장면을 잘 표현해준다.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본절에는 '여호와의 불'의 이적을 접한 당시 백성들의 경악과 두려움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요소가 두가지 있는데 (1) 즉각 엎드린 점. (2)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명쾌한 시인을 거듭 반복한 점이다. 이러한 백성의 모습을 21절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선명히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졸음이 쏟아지는 한낮에 느닷없이 떨어진 폭탄의 광음을 듣는 충격과도 같다.
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바알(Baal)이 거짓 신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자 백성들은 엘리야의 명령에 따라 바알 선지자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기손 시냇가에서 죽여 버렸다. 이러한 행위는 일견 지나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호와의 공의(公義)를 나타내는 일이었기에 필요 불가결하였다. 즉 이 일은 하나님의 계명(신 13:6-9; 17:2-7)에 대한 순종 행위였던 것이다.
저희에게 이르되...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
엘리야의 승리는 너무도 완벽혀여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로서도 항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엘리야로부터 달아나려 했을 터인데 이들을 막기 위해서 이제 엘리야는 백성의 무리를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기손 시내 -
여기서 '시내'(*, 나할)는 '강'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한편 기손 강(Kishon Brook)은 므깃도 근처의 여러 샘들로부터 발원하여 갈멜 산맥과 나란히 걸쳐진 에스드렐론 광야를 흐른다. 이 강은 갈멜 산 근처에서 제법 넓은 폭을 유지하기도 하는데 대개 건기(乾期)에는 폭 100m 이하의 작은 강이 된다(Beek). 따라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당시는 극심한 가뭄 중이었던 점(5절 ; 17:1-7)을 고려하면 '시내'란 적절한 표현이다. 한편 기손 강은 과거 사사 시대 당시 바락이 시스라를 무찔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곳으로도 유명하다(삿 5:19-21).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올라가서 -
이 말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기손 시내에서 갈멜 산 어디 쯤엔가 설치되어 있을 왕의 장막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아합은 갈멜산상의 대결 현장과 기손 시내의 바알 선지자 처형 현장에 내내 동참했던 모양이다.
먹고 마시소서 -
아합은 대결의 긴장감 때문에 온종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야가 음식을 권하는 이 말에는 '이제 더 이상 근심하지 마십시오'하는 어감(語感)이 들어 있다(Pulpit Commentary). 원래 사람이 음식을 끊는 것은 슬픔, 근심 등을 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아합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은 그러한 근심의 원인이 제거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그 동안 아합에게 직접적인 근심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가뭄일 것이다(5절). 그러나 엘리야가 보기에 그 가뭄이란 우상 숭배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징계일 뿐이다(17:1). 따라서 우상 숭배자들을 처단한 현시점에 있어서는 곧 가뭄이 끝나리라고 엘리야는 확신한 것이다.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
여기서 '소리'(*, 콜)란 말은 원래 '음성' 혹은 '목소리'라고 해야 더 적절한 단어이다. 즉 이는 '누구의 음성에 귀기울이다'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는 말이다(창 4:23; 21:12; 삼하 22:7). 아무튼 본절은 엘리야가 믿음의 귀로써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하는 비의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보여 준다(43-45절).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땅에 꿇어 엎드려 -
야고보는 본절과 관련, '엘리야는...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약 5:17, 18)라고 언급하였다. 사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절)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의 실현을 위하여 다시금 기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기다리는 행동(롬 4:19, 20)과 기도함으로써 그 실현을 응답받은 행동의 두 가지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
엘리야는 이처럼 땅에 무릎을 꿇는 정도에서 지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는 깊숙한 자세로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두가지로 풀이한다. (1) 복종을 표현하는 무릎 꿇음과 겸손을 표현하는 깊숙한 머리숙임이 결합된 자세로서 그 기도의 간절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2) 외부에 대한 시각(視覺)을 차단함로써 보다 깊숙한 내면의 기도의 경지에로 몰입해 가기 위한 행동이다(B hr).
43.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바다 편 -
갈멜 산 정상에서는 서쪽으로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Gate). 여기서 '바다 편'이란 바로 그 지중해 쪽을 의미한다.
일곱 번 -
히브리인들의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서 '7'은 하나님의 수이자 완전한 승리의 수로 쓰인다. 따라서 엘리야가 사환에게 일곱 번 확인해 보라 지시한 것은 곧 기도의 씨름에서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결의의 표시이자 하나님께서 끝내는 응답하시리라는 완전한 신뢰의 표시이기도 하다.
44.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사람의 손만한 -
'손'(KJV, RSV, NIV,Living Bible; hand)으로 번역된 '카프'(*)는 오히려 '손바닥'(palm)으로 번역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손'을 가리키는 단어는 '야드'(*)이다. 공동 번역은 이 부분을 '손바닥 만한'으로 적절히 번역하고 있다.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
'막히다'에 해당하는 '아차르'(*)는 '꼭 닫다', '기다리게 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많은 비로 인해 보행을 방해받는 광경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손바닥 만한 구름에서 엄청난 양의 비를 예상하는 것은 그만치 확고한 엘리야의 확신을 보여준다. 한편 기손 강은 갈멜 산 바로 아래로 흐르며 여러 갈래의 시내가 합류되어 있다. 40절 주석 참조. 따라서 큰 비가 내릴 때에는 기손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그 주변 일대는 통행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엘리야는 아합을 염려하여 길이 막히기 전에 갈멜 산에서 떠나도록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엘리야는 이스라엘과 그 왕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그들을 위하는 자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17절). 따라서 아합은 이제 지난 날의 과오를 깨끗이 청산하고 여호와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로서의 본분으로 돌아와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아합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집요하게도 고집하였으며 끝내는 참혹한 말로 맞기에 이르렀다(22:3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함으로써 심판의 날에 임할 진노를 스스로 쌓아가는' 패역한 자의 전형을 발견케된다(롬 2:4, 5).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조금 후에 -
이에 해당하는 '아드 코 웨아드 코'(*)는 '손이 앞뒤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안'이라는 뜻이다(Ewald). 이는 곧 큰비가 올 것에 대비해'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다 저편의 손바닥만한 구름(44절)이 얼마나 급속도로 폭우로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이스르엘 -
과거 솔로몬의 다섯번째 행정 구역에 속하였던 성읍으로서 아합, 아하시야, 요람 당시 왕의 궁궐로 사용되었던 곳이다(왕하 9:15). 이곳은 갈멜 산 동남방 20여k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곧 길보아 산 부근이다. 그런데 당시 이 성읍은 이스르엘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다(Beek). 한편 훗날 아합은 이곳 이스르엘(Jezreel)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음으로 더욱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다(21장). 4:12 주석 참조.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
원문을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여호와의 손이 엘리야에게 있었다'는 뜻이다. 즉 원문에는 '여호와의 능력'이란 말이 '여호와의 손'(*, 야드 예호와)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를 '주님의 손'(the hand of the Lord)으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ModernLanguage). 그러나 Living Bible은 의미를 충분히 살려 본절을 '주께서 엘리야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다'(the Lord gave special strength to Elijah)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여호와의 손'이란 다름아닌 엘리야를 아합의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리게 한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허리를 동이고 -
달리는 데 지장이 없도록 긴 옷의 아래부분을 묶었다는 말이다(출12:11). 한편 비유적인 의미로 '허리를 동이다' 말은 어떤 행동을 위해 자신을 긴장시킴으로써 준비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렘 1:1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출 12:11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
엘리야는 이스르엘 성읍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그 어귀에 머물렀다. 이는 아합의 반응을 면밀히 주시하기 위해서였던 동시에 이세벨의 격노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아합이 홀로 도회하기에 급급한데서 우상 숭배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그의 의도가 이미 여실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아합이 엘리야를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 존경하였다면, 그는 에디오피아의 내시처럼 엘리야를 마차에 동승시켰을 것이다(행 8:31).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
갈멜 산에서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질러 이스르엘 성읍 어귀까지 이르는 길의 거리는 대략 22.4km이다. 이 거리를 엘리야는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린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이나 마차 앞에서 달리는 것은 시종(侍從)이나 심부름꾼의 위치를 자처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본절은 엘리야 역시 아합의 종으로 처신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이제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이 증명되었음을 시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때 아합은 그 인물 자체의 도덕적 평가롤 떠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상징적 의미로서만 가능하다. 즉 갈멜 산 대결 현장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전령의 위치에 앞세웠다면 그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신인가를 결정하는 싸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이심이 판결났다는 뜻이 아닌가? 바로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아합의 앞에서 달리면서 나름의 축하 행진을 한 것이다.
성경 말씀:
어느 날 라멕은 아다와 씰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아내들이여, 나에게 귀를 기울여 보시오.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시오. 한 젊은이가 나를 쳐서 상처를 입히기에 내가 그를 죽이고 말았소.
창 4:23
하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나 네 여종에 대하여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하여라. 이삭을 통해서 난 사람이라야 네 후손으로 인정될 것이다.
창 21:12
내가 고통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성소에서 내 음성을 들으시고 내가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네.
삼하 22:7
19아브라함은 자기 나이가 백 세가 다 되어 몸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나이가 많아 도저히 출산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그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더욱 굳게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1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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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성품/속성:
고치시는, 징계의, 언약,
영적인, 규정, 초자연적
능력의, 유일한 한 분
하나님, 영광, 응답의,
은총, 회복, 강렬한,
공의, 계명, 약속, 완전한
승리, 통치, 인자, 용납,
길이 참으심, 심판,
진노하시는, 권능, 준비,
참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명, 섬김, 각성, 의지,
여호와께만, 봉헌, 기념,
따르는,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주의 종, 겸손,
공손, 간절한(깊은) 기도,
순전한 정열과 굵직한
뚝심, 회개, 주님과의
관계 회복, 경외, 순종,
믿음(으로 기다리는),
존경,
🔵
주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기를..! 간명한
기도를 드릴 때도
진심이 깃들이는
순전함으로.🩸✝️
🌱🌿🌳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큰 이적을 목격하고도 변하지 않은 아합의 마음처럼 주님 앞에 내려놓지 못한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고 심판과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끊지 못한 죄를 온전한 회개를 통해 순전한 믿음과 신앙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dUEMlm37cI
파선에서 다시 일어나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로마서 8:35)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고난에서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주님은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희와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시 91:15) 현실 속에서 그 어떠한 극한상황의 고난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어떠한 고난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깁니다.”(롬 8:37) 바울은 상상이 아닌 실제로 절박한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이 모든 환난 가운데서 초자연적인 승리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재능이나 용기로 인한 승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고난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초자연적인 승리자입니다.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우리가 처한 그 상황이 가장 정확하게 우리가 있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못마땅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환난이나…?” 환난은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곤핍, 조롱, 피곤함 등의 환난이 있으면 그냥 두십시오. 그러한 환난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세상 염려에 빠지거나 환난을 보면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마 13:22)
“곤고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말이요 공의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할 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까?
“기근이나…?” 굶어 죽는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뿐 아니라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사기꾼이거나 또는 바울이 현혹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성품에 전혀 맞지 않는 일들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붙들고 믿는 자들에게는 어떤 예외적인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이러한 사람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로만 설명이 되는데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는 그 사랑으로 인하여 고난 가운데서 매번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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