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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9 : 1~10🍑 깊은 절망에서 만나는 위로자 하나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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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9:1.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고하니 -
이에 해당하는 '나가드'(*)는 '알게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말에는 '넌지시 알리다'는 뜻의 어감(語感)이 들어 있다. 때문에 보통 이 동사로 설명되는 관계란 마치 공범자(共犯者)들끼리 갖는 동료의식처럼 친밀한 관계이다. 따라서 아합이 어느 정도로 이세벨과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여기서 알 수 있다. 한편 본절은 아합이 앞장에서 목도한 이적과 바알 선지자 모두를 칼로 죽인 엘리야의 위업(18:30-467)에 질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국(一國)의 통치자인 아합은 줏대없이 그 모든 사실을 왕후 이세벨(Jezebel)에게 고하고 만다. 이러한 아합의 유약한 면은 본서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이세벨의 과단성(果斷性)과 극명하게 대조된다(21:7).
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내일 이맘때에는 -
본절은 우리들에게 의문점을 갖게 해준다. 즉 진노한 이세벨은 왜 오늘 당장 엘리야를 처단하려 들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위협하여 멀리 쫓아내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으로 설명한다(B hr, Keil& Delitzschk, Matthew Henry, Wordsworth). 왜냐하면 갈멜 산상의 승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환호에 싸인 엘리야(18:30-40)를 직접적으로 처단하기는 어렵다고 이세벨이 판단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이세벨의 잔인하고 과감한 성격을 감안할때 그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적어 보인다. 도리어 이세벨은 엘리야를 공개 처형할 의사를 전했다고 봐야 한다. 즉 이세벨은 다음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를 처형함으로써 전날 백성들이 받은 충격을 무효화하려 한 것이다. 아무튼 본장은 적어도 이세벨의 위협이 실제적인 생명의 위협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3, 10, 14절).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
여기서 '저 사람들'이란 앞서 엘리야가 처단한 450인의 바알 선지자들을 가리킨다(18:22, 40). 따라서 이 말에는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이세밸의 극심한 증오와 비장한 각오가 들어 있다. 그녀가 아합으로부터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처럼 더욱 강퍅해진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신들이...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
이세벨의 맹세 속에 담긴 이 말은 의미 심장하다. 특히 엘리야가 한 분 하나님를 두고 맹세한 것과 비교하면 그 부정적이고 잡다한 인상은 두드러진다(18:15). 그런데 참신이신 한 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이처럼 주위의 모든 것, 특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들을 신격화하게 마련이다. 어쨌든 인간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 따라서 한 분 하나님께 굳건히 헌신하든가 아니면 다른 모든 것에 굴복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 할 것이다.
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이 형편(形便)을 보고 -
본절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는 단순히 '바라보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문맥상 본절과 같이 번역했을 따름이다. 한편 어떤 영역본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엘리야가 띠었을 정서적 반응에 주목하여 이를 '두려워했다'(he was afraid)로 번역하였다(Modern Language, RSV). 한글 공동 번역도 같은 경우로써 이와 비슷하게 '두려워 떨며'로 번역하고 있다.
그 생명을 위하여...브엘세바에 이르러 -
이세벨의 단호한 경고에 부딪친 엘리야는 할 수 없이도 도피길에 오른다. 이적과 능력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온 백성들에게 떨쳐보였던 엘리야(18:30-46)가 불과 하루 만에 이처럼 황망히 도피길에 오르는 모습은 실로 아이로니칼(ironical)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성정(性情)을 지닌 엘리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엘리야가 행한 이적적 권능이란 오직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한편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네rpq(Negeb) 지방의 한 성읍이다. 이곳은 팔레스틴 최남단 지역으로서 곧 헤브론 서남쪽 55km 지점이다. 삼상 3:20 주석 참조. 따라서 엘리야는 이세벨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남왕국 유다의 남쪽 국경 지대로 피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환을...머물게 하고 -
엘리야가 행한 이 조치에서 당시 그가 얼마나 큰 좌절감과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가장 큰 승리 뒤에 찾아온 위협은 극도의 무력감과 허탈감을 낳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야기되기 쉬운 극도의 고립감을 엘리야는 자신의 사환조차 동행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Lange). 한편 이와 관련하여 엘리야의 피신 경로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
이스라엘 역사상 '광야'는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소이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이교도의 우상 숭배 영향을 받아야했던 가나안 정착 시기와 달리,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시절(민 33가1-49)은 그들 역사에 있어 가장 순수한 신앙을 보존했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에게는 흔히 도시 문화에 대한 협오와 함께 광야에 대한 동경이 발견된다고 한다(Talmon). 더구나 엘리야가 들어간 광야는 '하나님의 산 호롑'으로 나아가는 첫 문턱이다. 즉 처음부터 엘리야는 호렙 산을 목적으로 하고 여정을 출발하였던 것이다(Hammond).
하룻길 -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거리를 나타내던 관용적 표현이다. 정확한 수치로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하룻길'(Day's Joumey)은 약 32-40km이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로뎀나무 -
로뎀나무(broom tree,NIV, RSV)는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나 하상(河床)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이다. 콩과의 식물로서 흰 꽃이나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대개 1-2㎞의 높이이다. 오늘날 아랍인들은 이 나무를 '금작화'(genista Retem 또는genista Monoserma)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 주기 때문에 대상(隊商)들에게 매우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사막에 거주하는 족속들은 이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Lange, Robinson,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p. 254).
여호와여...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
불과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18:30-46)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상 선지자 요나도 이와 비슷한 탄원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지 않은가(욘 4:8)!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큰 기적과 역사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항상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하며 늘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넉넉하오니 -
이에 해당하는 '라브'(*)는 '충분하다'(enough)는 뜻이다. 그러나 본절은 문자대로의 뜻과는 달리 희망을 상실한 사람의 체념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은 그러한 뜻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제 다 끝났습니다"로 표현하고 있다.
내 열조(列祖)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
'낫다'에 해당하는 '토브'(*)는 보통 '선하다', '좋다"는 뜻이다. 그리고 질이나 가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우수한 경우를 가리켜 쓰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가 자신이 선조들에 비해 나을 바가 없다고 한 말은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가? 우선 본절은 엘리야가 자신을 '못난 놈'으로 자조하는 비애 섞인 말임을 명확히 하자. 그 다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하는 일을 필생의 사명으로 삼았던 사람임을 기억하자. 그런데 그 사명이 성공한듯 보이는 순간에 닥친 위기(1, 2절)는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좌절과 허탈감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탄속에서 이제 엘리야는 지금까지 선조들이 겪은 이스라엘 역사의 성공과 실패에서 자신 역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는 실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천사가...먹으라 하는지라 -
70인역(LXX)에는 '천사'가 '어떤 이'로 나와 있다. 그러나 7절에서 다시 언급된 바와 같이 여기 언급된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 곧 구약시대 당시 이 땅에 현현(顯現)하신 그리스도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창 16:7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앞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4절)라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땅 위에서 더 살도록 격려하며 기적적으로 음식물을 공급해 주셨다(6절).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긍휼과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어루만지며 -
이에 해당하는 '나가'(*)는 특별히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단 8:18;10:16).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만지심은 상황을 변하게 하며 새 힘을 주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하나님의 만지심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속한 존재라는 의미를 주기도 한다(7절).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숯불에 구운 떡 -
이에 해당하는 '우가트 레차핌'(*)은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과는 달리 '뜨거운 돌 위에 놓인 떡'이란 뜻이다. 당시 초장(草場)을찾아 이리저리 유랑 생활을 하던 사막의 유목민들은 돌을 달구어 그 위에서 떡을 구워내었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떡이 엘리야에게 제공된 것이다.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
원문상으로는 '네가 가야할 길이 너무도 크다'는 말이다. 이는 곧 엘리야가 여행해야 할 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에서 엘리야의 광야행은 처음부터 행선지가 정해진 것이었음이 다시금 암시된다. 4절 주석 참조. 아마도 엘리야는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의 전개에 실망한 나머지 하나님께 매달리는 심정으로 길을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호렙 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과 비탄에 지친 엘리야는 여행을 지속할 여력도 의욕도 없었다. 천사의 도움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엘리야가 침체를 이겨내도록 음식과 휴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5절 주석 참조.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사십 주(晝) 사십 야(夜) -
브엘세바에서 호렙 산까지는 대략 350km으로서 정상적으로 꾸준히 걸을 경우 십여일 정도면 당도할 가능한 거리이다. 따라서 엘리야의 광야 40일은 행진만을 위한 기간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엘리야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때로는 금식도 하며 때로는 기도에 침익(沈溺)하기도 하면서 호렙 산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간이 40일이었다는 것은 곧장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를 연상시켜 준다(신 9:9;마4:2). 특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40일 동안 바로 호렙 산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여호와 앞에 엎드려 있었다(신9:18). 그러므로 엘리야의 광야 40일도 모세의 경우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즉 이때 40은 인내의 한계를 채우는 수로서 그 이후엔 상황의 변화를 초래케 하는 수이다. 사실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 받아야 마땅할 백성들이 계속 보존케 된 것은 모세의 40일간 중보 기도 덕분이다(신 9:18, 19).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더이상 손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스라엘의 배교(왜냐하면 갈멜 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변화가 없었으므로)에 대해 엘리야가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짐을 지고 하나님을 찾은 기간이 바로 본절의 사십 주야인 것이다.
하나님의 산 호렙 -
호렙산(Mount Horeb)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밑에서 장막을 쳤으며 모세가 여호와와 대화를 나누었던 신성한 산 시내(Mount Sinai)와 동일시된다(출 19장).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으며 단지 오늘날의 예벨 무사(Jebel Musa)가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3:1주석을 참조하라. 여하튼 이제 엘리야는 일찍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던 바로 그 장소로 실의에 빠진 채 오르고 있는 것이다.
9.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
굴에 해당하는 원어 '메아라'(*)앞에는 정관사 '하'(*)가 붙어 있으므로 '그 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엘리야가 들어가 유(留)한 굴은 호렙산에서 흔히 발견되어지는 일반적인 굴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이 지날때에 모세가 피해 있었던 반석 틈(출 33:22)일 가능성도 있다(Matthew Henry'sCommentary, Vol. , p.682).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이 말(*, 마 렉카 포)은 '무엇이 너를 여기 있게 하느냐'는 뜻이다. 공동 번역은 이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도 그러하다(What are you doing here?NIV, RSV, Living Bible). 그런데 이 질문은 새로운 사실을 묻는 물음이 아니고 도리어 질문받는 자를 일깨우는 물음이다. 즉 하나님은 엘리야의 실망과 체념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 물으신 것이다. 바로 이 질문은 엘리야 자신을 냉정히 성찰케 하는 도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종의 전환과 갱신의 계기를 마련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또한 자신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18:15 주석참조.
열심(熱心)이 특심(特甚)하오니 -
이 말(*, 칸느 키느티)은 '질투하다'는 뜻의 '카나'(*)가 두번 반복된 말이다. 즉 이는 '질투하고 질투하더니'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작태에 엘리야가 심히 분노한 것을 가리킨다. 이때 그의 질투는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데서 나온 열정이다(출 20:5).
오직 나만 남았거늘 -
원문은 '나, 나만 남았다'는 식의 표현이다. 이는 곧 엘리야의 탄식과 하소연이 그 호흡까지 느껴질 정도의 표현이다. 더군다나 '나만'에 해당하는 원어인 '바드'(*,alone)는 '분리되어 고립되다'는 개념이 강조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에서 우리는 당시 엘리야가 얼마만한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수 있다. 그러나 실상 이는 엘리야의 잘못된 생각이다. 그 당시 이세벨의 박해 가운데서도 오바댜가 숨겨 놓은 100명의 선지자(18:4))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7천 명의 순결한 자가 남아 있었다(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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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속성:
통치자, 생명, 권능,
기적, 역사, 희망, 선하신,
성공의, 사랑, 긍휼, 은혜,
새 힘을 주시는, 천사를
보내셔서 도우시는,
인도, 진노하시는, 보존,
계시, 승리, 만군의, 영광,
일깨우시는, 경륜,
질투하시는, 뜻, 보호,
순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수한 신앙, 탄원, 겸손,
(중보)기도(대화), 인내,
도전,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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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벨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해 들었으나
마음이 더욱 강퍅해졌다..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에
있으면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들을 신격화
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엘리야도 우리와 동일
하게 연약한 성정을
지닌 사람으로서 이적적
권능은 오직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것이다. 아마도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과거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이적처럼
자신에게도 주신 사명에
따라 현재 눈에 보이는
큰 이적이나 열매를 기대하고
소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큰 낙심과 좌절에
빠진 것 같은데,..하나님께
헌신하고 수고한 일들에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고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그 부르신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을 믿고
인내함으로 하나님께서
마침내 구원을 베푸실 것을
믿고 의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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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과 좌절이 반복되는 어려움 상황 속에서도 변화를 일으키는 전심전력의 기도와 인내를 가지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여 끝내 도우심과 구속하시는 크신 은총을 받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uYID1xvbMk
실제의 영역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누가복음 21:19)
사람이 거듭나면 과거와는 달리 한동안 생각과 논리에 확고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형성하기 위해 새 생명을 표현해야 합니다. (역자 주 - 여기서 체임버스가 말하는 “마음”은 영혼의 지.정.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 대신 활동할 때 그리스도의 생각, 감정, 의지를 닮게 된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내함으로 네 영혼을 얻으라.” (역자 주 - 여기서 “영혼”도 체임버스의 입장에서는 지.정.의의 영역을 말합니다. 인내함으로 그리스도의 지.정.의의 마음을 채득하라는 뜻입니다.), (빌 2:5)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두신 새 생명에 따라 영혼(“마음”)을 세워나가는 대신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턱에 머물기를 더 선호합니다.(눅 21: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를 몰라서 실패합니다. 우리는 훈련되지 못한 자신의 본성을 탓하는 대신에 마귀를 탓합니다. 만일 자신에 대하여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분입니다. 기분이란 기도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발로 차 버려야(ㅋㅎㅋㅎ) 떠납니다. 기분은 언제나 물리적인 조건과 깊은 관계가 있지, 도덕적인(영적인, 내면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기분에 말려들지 않도록 계속된 노력을 하십시오. 결코 한순간이라도 기분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기분을 떨쳐 버리면, 안될 것 같았는데, 됩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대부분의 불행은 “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 때문에 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영적인 결단과 담력이 삶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5월 20일 영적 용기 Taking Possession of Our Own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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