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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20 : 13~25🍑방심을 유도한 작전, 하나님 지혜의 승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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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20 : 13~25🍑방심을 유도한 작전, 하나님 지혜의 승리

credo15229850 2024. 5. 23. 10:40

https://tripol.tistory.com/459

 

히브리어 열왕기상 20장 전체 원어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우벤 하다드 메렠 아람 카바츠 엩 콜 헤로 우쉐로쉼 우쉬나임 메렠 잍토 웨수스 와라켑 와야알 와야찰 알 쇼메론 와일라헴 바흐 개역개정,1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tripol.tistory.com

열왕기상 20:13.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나아가서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한 선지자가 -

이 선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Micaiah)라는 주장도 있으나 22:8에 의해 부인된다. 왜냐하면 본절의 선지자는 아합에게 기쁜 예언을 전하나 미가야는 한번도 아합에게 좋은 예언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Hammond). 또한 메시지의 성격으로 보아서 이 선지자는 엘리야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합에 대한 엘리야의 메시지는 대체적으로 경고와 심판의 내용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18:18;21:20-26). 따라서 이 자는 당시의 무명(無名)의 선지자 생도중 한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5절 주석 참조.

 

 너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

본장에는 아합이 벤하닷에게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가 나온다(16-21, 26-34절). 엘리야의 투쟁과 아합의 범죄를 그려 나가던 본서 기자가 이처럼 본장에서 느닷없이 아합의 승리를 수록한 것에 대해 독자들은 석연치 않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절은 아합이 심판받아 마땅한 왕임에도 불구하고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일에 대한 신학적 답변을 제시해 준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권능을 나타내심으서써 오직 당신만이 환난날의 구원자시요(시 9:9) 모든 축복의 근원이되심을 아합은 물론 온 백성들에게 거듭 거듭 알려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요컨대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영원하신 언약을 상기시키려는 집요한 노력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8:9;삿 2:1;대상 11:3;대하 23:16등).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향후(向後)의 태도에서 입증되듯이 아합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감격하여 회개하기는 커녕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한갖 위기극복을 위한 수단 정도로 간주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아합의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色慾)거리로 바꾼 것이나 진배없다 하겠다(유 1:4). 아합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도 실상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22:29-40).



 

 

 

 

 

 

 

 

14. 아합이 가로되 누구로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가로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각 도(道)의 방벡(方伯)의 소년들 -

'각 도의 방백'이란 아합의 행정 구역을 관할하는 지방 장관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비록 본문은 상세한 기록을 삼가하고 있지만 계속 이어지는 기록으로 볼 때(15-20절) 벤하닷의 침공이 개시되자 이들 지방 장관들은자기 휘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수도 사마리아에 집결, 농성(籠城)을 계획했던 듯하다. 한편 본절에서 '소년'(*, 나아르)은 어린 소년을 의미하기보다는 '젊은 청년'을 의미한다. 특히 군사적 맥락에서 사용될 때 이 단어는 대개 '병사들'을 가리킨다(수 6:23;삿 9:54;삼상 9:2;25:5;삼하 2:14). 그러므로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이란 지방 장관들이 끌고 온 군대를 의미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출중한 무용(武勇)으로 인해 특별히 뽑힌 정예병들로 보인다.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

'시작하리이까'는 '공격을 개시하다'는 뜻인 '아사르'(*)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누가 맨처음 공격을 개시하리이까'라는 뜻이다. 그런데 공동 번역은 이를 "진두에는 누가 설 것입니까?"로 옮겼다. 이는 원어에 함축된 뜻이 개역 성경에 비해 더 잘 전달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15. 아합이 이에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을 계수하니 이백 삼십 이인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인이더라

 

이스라엘군의 병력을 소개하는 본절은 그 왜소한 규모를 알림으로써 더욱더 전쟁의 승리가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즉 최소한 10만 이상의 적과 대치한 이스라엘군은 불과 7,232명인 것이다(29절). 그런데 이처럼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격파한 전공(戰功)이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라는 모티프(motif)는 구약에 자주 등장한다(창 14:14-16;삿 7:16-22).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16. 저희가 오정에 나가니 벤하닷은 장막에서 돕는 왕 삼십 이인으로 더불어 마시고 취한 중이라

 

 탐지군(探知軍)을 보내었더니 -

원문에는 '탐지군'에 해당할 만한 용어가 따로 보이지 않는다. 단지 '벤하닷이 보낸 그들이 말하기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척후 활동에 있음이 분명하므로 '탐지군'이라 호칭한 것이다. 그런데 18절로 미루어 볼 때 탐지군들의 보고는 좀 명확치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보고를 받은 벤하닷이 진출한 이스라엘군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탐지군들 역시 맨처음 진출한 '각도 방백의 소년들'이 너무나 소수였기 때문에 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17.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이 먼저 나갔더라 벤하닷이 탐지군을 보내었더니 저희가 회보하여 가로되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나오더이다 하매

18. 저가 이르되 화친하러 나올찌라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올찌라도 사로잡으라 하니라

 

본절 역시 당시 벤하닷의 자만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 준다. (1) 즉 이스라엘군이 화친하러 나오든 싸우러 나오든 무조건 그들을 사로 잡으라는 명령에서 우리는 그가 앞서 아합의 답변(11절)에 몹시 기분 상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Hammond). (2)다음으로 사로잡으라는 명령에서 우리는 당시 벤하닷이 이스라엘군을 숫제 맞붙어 싸울만한 상대로 여기고 있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벤하닷은 설령 이스라엘군이 싸우러 나왔을 경우에도 어른이 어린아이 다루듯 쉽사리 그들을 제압하여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정녕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만심(慢心)에 빠져 있는 벤하닷과 같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 않는가!(잠 16:5;벧전 5:5)

 

 

 

 

 

 

 

19.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과 저희를 좇는 군대들이 성에서 나가서

 

 저희를 좇는 -

원문은 '아하레이헴'(*), 즉 '그들의 뒤에'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각 도 방백의 소년들'과 7,000명의 수도 방위 병력(15절)간의 관계 및 임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본절에 의거할때 당시 각 도 방백의 소년들은 특별한 용맹과 무예로 선봉대의 임무를 맡음과 동시에, 수도 방위 병력의 단위부대를 이끄는 하급 지휘관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20. 각각 적군을 쳐 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으로 더불어 도망하여 면하니라

 

 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

원문은 '각자 자기가 맡은 적을 치매'(*, 와야쿠 이쉬 이쇼)라는 뜻이다(KJV, they slew everyone his man).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스라옐 정예병들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각기 습격해야 할 요소(要所)들을 정하는 등 철저하고 조직적인 사진 계획에 따라 일사 불란하게 적진을 난타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승전의 원리는 성도들의 영적전투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엡 6:10-20).



 

 

 

 

 

 

21.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도륙하였더라

 

 크게 도륙(屠戮)하였더라 -

원문은 '들이쳐서 큰 학살을 하다'(*, 웨하카 마카 게도르)는 뜻이다. '도륙'(屠戮)이라는 역어(譯語) 역시 '무참하게 마구 죽이다'는 뜻이니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러한 표현에서 당시 아람군은 대군임에도 불구하고 겁에 질려 변변히 대항도 못한채 죽임당했음을 알수 있다.

 

 

 

 

 

 

 

 

 

22.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가로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의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돌아오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

 

 왕은 가서...알고 준비하소서 -

아합에게 내린 선지자의 예언처럼 싸움을 준비하고 훈련된 자만이 다가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일회적 승리는 있을지언정 계속된 승리의 보장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무장할 때(엡6:10-13;벧전5:9) 연승이 약속될 것이다. 따라서 아합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여호와의 능력에 힘입어 싸움을 예비해야만 했었다.

 

해가 돌아오면 -

이에 해당하는 '테슈바트하솨나'(*)는 '해의 되돌아감'(the return of the year)이란 뜻으로 '명년 봄'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테쿠파트하솨나'(*)가 있는데 이는 '해의 회전'(the turning of the yeardl)란 뜻으로 '명년 가을'을 의미한다. 한편 근동 지방의 겨울은 우기(雨期)에 해당하므로 전쟁을 하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성경 총론, '성경의무대 팔레스틴' 참조. 그러므로 당시의 침공은 대개 건가(乾期)인 여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얕잡아 보던 상대에게 의외의 패배를 당하는 수치에 절치 부심(切齒腐心)한 벤하닷은 해가 바뀌자 마자 재차 이스라엘을 침공하려 들었을 것이다.

 

 

 

 

 

 

 

23. 아람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찌라

 

 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

고대의 다신론적 관념에 따르면 한 신은 보통 한 지역 또는 한 기능을 맡는 신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아람인들 눈에 산신(山神)으로 비치었다. 한편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처럼 산의 신이라 믿은 데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은 아직 왕정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던 시절. 가나안 주민들과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을 겪고 있었다. 그때 철병거와 마병을 소유한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인들이 잡은 거점은 팔레스틴의 여러 산악 지대이다. 즉 그러한 장소에서는 가나안의 우수한 병기들이 크게 효력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삿 4:1-16). 더군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악지대에서 물을 찾아내고 거기서 거주하는 적응력을 갖고있었다. 이러한 모든 점이 곧 주변 부족 및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겨 놓은 것이다.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강할지라 -

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첫번째 전투에서 호되게 패한바 있는 아람 왕의 신복들은, 가장 큰 패인(敗因)을 어떤 이적적 신통력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23절). 또한 그러한 미신적 배경외에 객관적 전략 면에 있어서도 그들은 평지에서 싸우는 것이 우세하리라는 판단을 내렸을것이다. 왜냐하면 평지에서는 기습 공격이 쉽사리 먹혀들지 않으며 더구나 아람군은 기병들과 전차 병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히다(1, 25절).

 

 

 

 

 

 

 

 

 

24. 왕은 이 일을 행하실찌니 곧 왕들을 제하여 각각 그곳에서 떠나게 하고 저희 대신에 장관들을 두시고

 

 제하여...떠나게 하고 -

'제하여 떠나게 하고'에 해당하는 '하세르'(*)는'돌이키다', '떠나다'는 뜻인 '수르'(*)에서 온말이다. 여기서는 32왕들(1절)이아람 연합군 내에서 맡았던 임무를 해제하도록 권고하는 말로 쓰였다. 즉 벤하닷의 신복들은 나름대로 이전의 패인(敗因)을 분석한 것이다. 그리하여 왕들의 지휘 체계에 구멍이 났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왕들은 엇갈린 이해 관계 때문에 성의 있게 전투에 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초반 접전에서 이스라엘군에게 밀리자 책임을 다하지 않고, 그대로 퇴각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러므로 벤하닷의 신복들은 이번에는 그런 결함을 제거하고 전쟁에 임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저희 대신에 장관들을 두시고 -

비록 아람 소국(小國)의 32왕들이 명색상 군 통솔자들이었기는 하지만 그들이 실제 전투 지휘 능력에 있어서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벤하닷의 신븍들은 벤하닷에게 그들 대신 실제 작전에 능한 군대 장관들로 병력을 통솔하도록 주청(奏請)한 것이다.

 

 

 

 

 

 

 

 

25. 또 왕의 잃어버린 군대와 같은 군대를 왕을 위하여 충수하고 말도 말대로, 병거도 병거대로 충수하고 우리가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하리이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그리하니라

 

 군대를...충수(充數)하고 -

흑자는 앞서 벤하닷의 신복들이 32왕들을 연합군에서 배제하자 한 것(24절)은 곧 지원군들의 철수를 주장한 것이라고 풀이한다(B hr). 그러나 본절은 군대를 이전 규모로 복원할 것을 건의하는 말이다. 특히 여기서 '충수하고'(*, 티메네)는 '수를 세다'는 뜻인 '마나'(*)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정확히 이전에 유지했던 군대의 숫자 만큼 보충하자는 뜻이다. 그런데 각 왕들의 휘하 부대를 제외하고 단지 벤하닷의 다메섹군만으로 그만치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24절에서 볜하닷 신복들의 건의는 다만 각 단위부대의 지휘관인 32왕들만 실제적으로 유눙한 장관들로 교체하자는 뜻이었음이 분명해진다.

 

 그 말을 듣고 그리하니라 -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당혹감, 의지할 곳 없는 자의 외로옴....이러한 자들이 선택하여야 할 길은 겉만 번지르르한 사망의 길이다(잠2:18;시 1:6). 인간의 생각에 일견 번쩍이는 섬광같은 지혜도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따를 순 없다.

 

 

 

 

 

10끝으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지십시오.

11마귀의 계략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하십시오.

12우리는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이 어두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인 마귀들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13그러므로 악한 날에 원수를 대항하여 싸워 이기고 모든 일을 완성한 후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하십시오.

엡 6:10-13

 

그러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마귀를 대항하십시오.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도 이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벧전 5:9

 

 

 

 

🟠🔴
🟢

 

🟣
하나님의 성품/속성:
구원자, 축복의 근원, 
영원하신 언약, 은총/은혜,
승리, (여호와/그리스도의) 
능력, 약속, 예비, 지혜,
경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 순종, 책임 다하기,
믿음, 의지, 
🔵
왠지 모를 두려움이

려오는 것 같지
문제보다 크시고
승리와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겠다.🩸✝️
🌱🌿🌳
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맡기는 하루하루를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CHFM4cNN3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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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심내는 불신앙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 6:2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있는 상식적인 조바심을 불신앙이라고 결론 내리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시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 ‘자, 이 관계 속에서는, 이 휴가 계획에는, 이 새로운 책들에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성령님은 우리가 주님을 첫째로 고려할 때까지 이 점을 항상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먼저 고려할 때마다 혼돈이 있게 됩니다.

 

“염려하지 말라.” 장래에 대하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는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그 이유는 염려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실제적인 부분을 돌보지 않으시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불신 외에는 우리를 염려하도록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넣으신 말씀을 무엇이 질식시키는지에 대한 주님의 경고를 주목한 적이 있습니까? 마귀입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염려입니다.(마 13:22) 작은 염려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심어진 말씀을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어!” 이것이 바로 불신앙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불신앙에 대한 유일한 치료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위대하신 말씀은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https://reformedkjy.tistory.com/9570

 

5월 23일 주님은 나의 최고봉 "조심스러운 불신앙(Our Careful Unbelief)" by 오스왈드 챔버스

조바심내는 불신앙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 6:2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있는 상식적인 조바심을 불신앙이라고 결론

reformedkj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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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딨뎅 눈빠지겄옹🧸💖안과에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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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갔농 안보이넹🧸👼💖마음에 비가 내렸나요?? 아픈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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