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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21 : 1~16🍑탐욕에 눈먼 마음, 불의를 행하는 권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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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1: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본절은 나봇 사건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암시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아람과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아합(20장)은 당시 이스라엘에 별궁을 지어 두고 사치와 방탕 생활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로 그 즈음에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신의 유흥지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탐욕에 사로 잡혔던 것이다.
이스라엘 -
므깃도와 벧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제린(Zerin)으로 추정되는 성읍이다. 구약 시대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는데 아합은 특별히 이곳에 별궁을 건설, 종종 거처하였던 듯하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8:46 주석을 참조하라.
나봇 -
'나봇'(*, 나보트)은 아마도 '싹트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Ward). 나봇의 조상들은 이스라엘에서 대대로 포도 재배를 해왔을 터이니 그러한 직업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졌음직도 하다.
포도원 -
팔레스틴의 가장 특징적 식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와 이를 재배하는 포도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정의 원천이 되었다(Ross). 신20:6은 포도원을 만들고서도 그 첫 수확을 보지 못한 자에게는 병역 의무를 면제하여 귀가 조치케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팔레스틴에서 포도원이 갖는 경제적 비중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다. 신7:13주석 참조.
2.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나물 밭 -
여기서 '나물'(*, 야라크)이란 녹색의 풀 종류 일반을 말한다. 그리고 '밭'(*, 간)은 오히려 '뜰' 또는 '정원'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므로 '나물 밭'이란 '푸른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다(공동 번역). 보통 이러한 정원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는 장소로 고안되곤 했다. 그리고 또한 종종 우상 숭배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사1:29;65:3;66:17).
만일 합의하면 -
이에 해당하는 원문(*, 토브 베에이네이크)은 문자적으로 '눈에 좋거든'이란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상대방의 의사를 한껏 존중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비록 왕이라도 남의 토지를 무작정 몰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데서 비록 초기의 이상(理想)은 많이 빛바랜 것이 되었지만,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한 땅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권력자라도 그 소유관계를 함부로 변경할 수는 없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구속력을 보게 된다(레25:23).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제한일 뿐 왕정 시대가 개막된 이래 왕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토지 소유를 확장하려 들었다. 사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모두 대지주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조차 이를 흉내냈다는 현실적 사실은, 조건은 어떠하든지간에.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던 삶의 형태는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아합이 시도하는 토지 소유의 확대는 일찍이 사무엘이 경고했던 바에 부합한다(삼상8:12,14). 즉 백성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왕의 토지를 경작해야 하며, 거기서 거둬 들인 농산물은 더이상 생산자인 백성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왕은 자꾸 백성들의 포도원과 감람원을 빼앗아 자기 신복(臣僕)들의 손에 넘겨 준다. 이러한 경고는 신정 왕국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봉사자여야 하나 실제로는 모든 백성이 도리어 왕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타락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합이 나붓의 포도원을 소유하려는 표면적 구실은 무엇이든 그 실제적 동기는 왕권의 극대화를 위한 토지 소유의 확대 도모로 보아야 한다.
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 하니
열조의...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
나봇(Naboth)의 이 같은 대답은 그가 여호와 신앙가이며 율법에 충실하려는 인물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물론 아합이 후한 보상을 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봇이 이를 거부한 것은 그 포도원이 선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유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자손들에게 대를 이어 전해야 할 분깃인 선조의 유업을 매각하는 것이 불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1)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을 때 근족이 무를 것, (궁핍하여 무를 날짜를 연기할 때는 연기된 기한을 계속하여 무를 것, (2)무를 힘이 없을 때 그 토지를 산 자가 희년(禧年)에 돌려 줄 것 등을 율법으로 명시하셨다(레25:23-28). 그러나 나봇처럼 전통의 신앙과 이상에 충실하려는 인믈이 아합 시대와 같은 변질된 시대에 얼마나 더 있었는지는 자못 의문스럽다.
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
근심하고 답답하여 -
이에 앞장에서도 언급된 구절로서 내적 격동으로 인해 속이 타거나 기분이 언짢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20:43 주석 참조. 그런데 아합의 심리상태에 대해 거듭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에서 우리는 그의 완악함과 패역(悖逆)함을 엿볼 수 있다.
침상(寢狀)에누워...식사를 아니하니 -
본절에서 아합은 마치 투정하는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나타난다. 즉 그는 갖고 싶은 것을 못갖게 하자 심통난 아이처럼 식사를 거절하고 누워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혀 성인다운 면모롤 보이지 않는 아합에게서 독자(讀者)들은 그가 왕으로서 너무 졸렬한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실 이스라엘에 외국의 우상 숭배가 도입되고 번창되게 된 원인(16:29-33)에는 아합의 이처럼 줏대없고 성숙치 못한 사람됨이 한몫을 차지하였다. 한편 아합의 소유욕이 빚어낸 이 우스갯거리는 결국 나봇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악으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5-16절). 여기서도 우리는 죄가 죄를 유발한다는 죄의 속성(약1:15)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5.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나아와 가로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이세벨이 저에게 나아와 가로되 -
아합의 무기력하고 유치한 면은 도리어 이세벨의 강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을 부각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본절에서도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마치 후견인 같은 자세로 등장한다. 즉 그저 드러 누워 끙끙 앓는 아합에 비해, 질문을 통해 사태를 파악하려는 이세벨은 훨씬 적극적이다. 그래서 아합과 이세벨의 관계에 있어 늘상 끌려 다니는 쪽은 아합이었던 것이다. 19:1 주석 참조.
6. 왕이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저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않겠노라 함을 인함이로라
아합이 일의 자초 지종(自招至終)을 이세벨에게 고하고 있는 본장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1)대체로 이스라엘에 비해 훨씬 전제 군주적(專制君主的)성격이 강한 두로 출신의 이세벨(더구나 이 여자는 잔혹한 폭군 아버지 밑에서 자랐음을 기억해야 한다)에게 아합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게 들렸을까 하는 문화적 차이점이다(16:31). (2)아합은 마치 어머니에게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시시콜콜히 이르는 어린 아이처럼 처신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부 관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일찍이 자신이 신봉하던 우상 종교 도입을 요청하는 이세벨에게 아합이 여호와 신앙의 바람막이가 되기에는 분명히 역부족이었을것이다(16:31-33). 아합이 펼친 종교 정책에는 언제나 이세벨의 입김이 작용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7.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이르되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
본절은 의문문이 아니다. 히브리 원문상 이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왜 그 모양입니까'라는 힐난조의 말이다. ModernLanguage Bible은 이를 '당신은 이스라엘에 대해 왕권을 행사하지 않을 겁니까? '(Donot exercise the kingship over Israel?)로 좀더 풀어 번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세벨이 가긴 왕권 개념은 이스라엘인들의 전통적 개념과는 다른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세벨은 고대 근동의 전제 군주가 일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염두에 두면서 본절과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의 왕권은 보다 제한적이다. 2절 주석 참조. 즉 왕이라 하더라도 그는 다른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율법 준수의 의무를 져야 했다(신17:14-20). 이 점은 고대 근동의 거의 무제한적 왕권에 비해 훨씬 행동의 제약을 받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아합은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부모의 유업 외에 타인의 유업을 함부로 탈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세벨의 눈에는 그같은 아합의 행동이 어리석기 짝이 없고 왕답지 못한 처사로 비쳤을 것이다.
내가...드리리이다 -
나봇의 말 중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3절)을 '내가' 주겠다고 말하는 이세벨의 언동에서, 그녀가 정녕 이스라엘을 해치는 대적임이 극명(克明)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이세벨은 아합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격려하여,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을 왜곡하도록 부추긴 암적(癌的) 존재였다.
8.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쳐서 그 성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보내니
아합의 이름으로...그 인(印)을 쳐서 -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인장(印章)의 용도 역시 다양했다. 즉 인장은 의식서 날인, 재산 증서의 신빙성 보장, 공문서의 권위보증 등 여러 효능을 띠었다. 본절에서 이세벨이 거짓 편지를 쓴 후 아합의 도장으로 인친 것도 그 내용이 의심할 바 없는 것임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즉 이세벨은 백성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 넘기기 위해 왕의 인장을 도용(盜用)하는 짓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한편 당시의 도장은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외에도 굴려서 인을 찍는 원통형 인장, 그리고 인장 반지도 있었다. 창41:42 주석 참조.
쳐서 -
이에 해당하는 '하탐'(*)은 그 자체로 '인을 찍다', '봉인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떤 문서를 '하탐'하는 것은 남이 그 내용을 알 수 없게끔 비밀에 붙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친서는 비밀리에 이스르엘의 장로와 귀인(貴人)들에게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귀인 -
이에 해당하는 '호르'(*)는 성경에 '귀족'으로도 번역되어 있다(전10:17;렘27:20). 그러나 이들의 지위나 직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카일(Keil)은 이들을 행정관들(the members of the magistracy)로 보고 있다.(Keil&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270)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금식을 선포하고 -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공적인 금식 선포는 공동체 내의 악행 및 죄에 대해 집단적 참회를 촉구하는 것이다(삼상7:6;14:24). 즉 한 개인의 죄는 그사람만을 단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회개와 관계 개선이 요구된다는 사고 방식이 담긴 행위이다. 에스더 4:1-3 강해, '금식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본절의 금식 선포는 도리어 악행을 짓고자 하는 음모에서 발단된 그릇된 성격의 것이다. 즉 이세벨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성읍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블러 일으키려고 이스라엘 성읍에 금식을 선포한 것이다. 여기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이란 물론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날조된 죄를 의미한다(10,13절).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앉힌 후에 -
즉 나봇을 피고인(被告人)의 신분으로 재판정에 앉히운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도 모르는 체 이처럼 재판정에 끌려나온 나봇은 필시 어리둥절하였을 것이다. 13절 주석 참조.
10. 비류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고 저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 하였더라
비류(匪類) -
이에 해당하는 '베네벧리야알'(*)은 문자적으로는 '무가치함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타인에게 잘못없는 존재가 아니라보다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삿19:22주석과 삼상10:27 주석을 참조하라.
두 사람을 -
사람을 사형에 처하려면 두세 사람의 증언이 요구된다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다(신 17:6). 이 규정을 최소한도로 만족시키기 위해 이세벨은 두 명의 비류를 포섭해 두도록 지시한 것이다.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저주함은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움을 입은 지도자들조차 저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20:7;22:28). 우리는 이러한 규례를 어긴 탓에 한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사형에 처해진 사례를 레24:10-1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하였다(레 24:15). 그런데 이세벨은 바로 이 규정을 이용하여 나봇을 사형에 처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돌로 쳐 죽이라 -
율법상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우상 숭배자(신13:10), 신접하거나 박수가 된 자(레 20:2,27),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한 자(레24:14), 간음한 여인(신22:21)등에게 가해졌다. 이러한 형 집행 절차는, 먼저 사형수의 옷을 벗기고 손을 묶어서 밖으로 끌고 나가 처형대 위에 올려 두면, 한 증인이 그를 밀어 뜨리고 이어 두번째 증인이 큰 돌로 먼저 쳤다. 그 후 둘러 선 무리가 함께 돌을 들어 쳤는데 이때 죽은 자를 위한 애곡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개적, 공동적 돌 처형법은 무엇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경각심과 연대(連帶) 의식을 심어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신13:10,11 주석 참조.
11. 그 성 사람 곧 그 성에 사는 장로와 귀인들이 이세벨의 분부 곧 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대로 하여
장로(長老)와 귀인(貴人)들이...쓴대로 하여 -
이스라엘의 장로와 귀인들이란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권익 수호와 율법 준수를 위해 모범적으로 행동해야 할 위치에 있는 계층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세벨이 율법을 악용하는 범죄에 별 저항없이 동조하였다. 이는 곧 법관이 법을 악용(惡用)하는 것과 같은 형국인바 아합 시대 수뇌부들의 타락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사례이다.
이세벨의 분부 -
본절은 장로와 귀인들이 받은 밀서(密書)가 비록 아합의 명의와 낙인으로 되어 있지만(8절), 그 모의 주체는 이세벨임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이런 사실은 편지를 받은 장로와 귀인들도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세벨의 잔혹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장로와 귀인들은 왕비 이세벨에 영합하여 기왕에 누리던 사회적 지위와 이익을 보존하려던 자들일지도 모른다. 즉 이런 부류들은 세태의 흐름에 영합하여 이세벨에 협조하면서 이스라엘에 변화(사실은 변질이라 해야 할)를 가져오는 진보주의자를 자처했을 것이다.
12.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시대를 막론하고 금식은 개인적로나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신앙 훈련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도덕성, 윤리성이 결여된 종교적 의무로서의 재반 의식(儀式)은 본래의 취지와 순수성이 왜곡당하기 쉽다. 즉 알맹이가 빠진 형식이란 불의와 거짓을 가리워주는 잘못된 도구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금식의 오용(誤用) 역시 자주 예언자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던 주제 중 하나이다(사 58:4-6). 본절 역시 금식의 순수성을 해쳤던 역사적 사건 중 일례(一例)이다. 9절 주석 참조.
13. 때에 비류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거를 지어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저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고
본절에 나오는 재판은 무엇인가 졸속(拙速) 진행의 냄새가 난다. 정상적인 재판 절차에서는 피고의 유죄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뿐만 아니라 피고의 혐의를 벗겨 줄 증인도 동석하는 게 보통이다(시 109:31;잠14:25). 그러므로 나봇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무뢰배들의 무고(無告)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 줄 증인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통상있게 마련인 원고(고발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수상하다. 따라서 나봇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와 순전히 형식적인 재판 끝에 희생된 것임이 분명하다. 한편 참고로 당시 이스라엘의 재판 절차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소송 사건은 고발자(원고)로 등장한 어느 개인에 의해 시작되었으며(신25:7), 고발은 대부분의 경우 구두로 하였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서류상으로도 가능하였다(사 65:6;단7:10). 그리고 법정에는 재판관과 원고외에도 피고와 중인들이 동석하였다. 한편 재판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원고와 피고는 각각 사실 증명을 위한 증거품들을 제시했으며(출22:13;신 22:13-17), 재판관은 그것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기타 고발 사항 및 변호 사항들을 모두 심리(審理)한 후 최종적으로 중인들을 세웠다. 이때 형(刑)의 확정, 선고를 위해서는 최소한 2명의 증인이 요구되었으며, 거짓 증인으로 판명된 자는 도리어 피고에게 뒤집어 쐬우려고 했던 만큼의 형벌을 대신 받아야 했다(신19:15-21).
14.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비록 아합의 명의로 편지는 왔지만 나봇 살해 음모는 이세벨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장로와 귀인들은 알고 있었다. 11절 주석 참조. 그래서 그 결과는 이처럼 이세벨에게 통보된 것이다.
나봇이...죽었나이다 -
왕하 9:26에는 본 사건과 관련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가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나봇의 처형 당시 아들들도 함께 몰살당했음이 틀림없다. 사실 이때 나봇만 죽였다면 그 아들들이 조상의 유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민16:27; 수 7:24,25).
15.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포도원을 취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그 이스르엘 사람...포도원을 취하소서 -
혹자는 이 말에서 이세벨의 득의 만만하고 표독(慓毒)한 감정을 읽어낸다(Hammond). 즉 '그 멍청이가 돈을 준대도 거절하더니 고스란히 뺏기게 되었다'는 이세벨의 고소해 하는 표정을 연상해 내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이 말에는 '당신이 돈을 제안하고도 갖지 못한 것을 나는 거저 뺏을 수 있었다'는 악한 자랑도 들어 있는 것이다. 한편 '취하소서'는 '이어받다', '상속하다'는 뜻의 '야라쉬'(*)에서 온 말이다. 당시 우상 숭배자의 성읍이나 뒤로부터의 탈취들은 모두 여호와께 바쳐졌듯이(신 13:16) 피정복자나 범죄자의 소유는 모두 왕의 재산으로 귀속되었다(Lange, Keil & Delitzsch). 그러므로 아합은 이제 외견상 합법적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상속(?)하게 된 것이다.
16. 아합이 나봇의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곧 일어나 -
70인역(LXX)은 이 같은 행동에 앞서 아합이 옷을 찢고 베를 두르는 동작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세벨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합법적으로 탈취할 수 있도록 보다 교묘히 일을 꾸몄음을 알수 있다. 즉 나봇의 죽음은 외견상 일국의 통치자에게 안타까움을 주는 한 백성의 비극으로 꾸며질 필요가 있었다. 이에따라 이세벨은 아합이 공식석상에서는 그같은 제스처를 취하는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은 항상 이율 배반적인 양면성을 노출하게 마련이다. 즉 옷을 찢으면서 애통해 하는 척하던 인물이 서둘러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 일어서는 행위는 아무래도 조화되지 않는다. 여하튼 이제 아합은 원하던 것을 갖게 된 어린아이처럼 얼씨구나 하고 일어나 이스라엘로 내려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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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속성:
소유, 권력, 율법, 통치자,
규정, 명령,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무 다하기, 경고한
말씀 잘 지키기, 여호와
신앙, 성숙, 준수, 회개,
경각심,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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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욕 버리기.
죄와 악에 끌려 다니지
않기를..!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을
벗어나지 않기.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한 행위이다. 모든
만물을 소유하신 하나님께
나의 소유도 온전히
드려져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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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재산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하나님의 소유임을 기억하며 탐욕의 마음이 있는지 점검하고 마음도 제게 가진 것,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온전한 순종을 실천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htratptFLw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생각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 전서 5:17)
우리는 옳든 틀리든 다들 자기 나름대로 기도에 대한 개념에 따라 기도합니다. 만일 기도를 폐의 호흡 또는 심장의 피처럼 생각한다면 옳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피는 끊임없이 흐르며 호흡도 쉬지 않고 진행됩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의식하지 않지만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계속 하나님과 완전하게 연결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면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도는 어떤 운동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도를 막지 마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당신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께 있는 가운데 어린아이와 같이 저절로 나오는 기도의 습관을 유지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기도란 언제나 응답된다는 무한한 확신을 하고 계셨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확신을 당신도 성령을 통하여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는 때도 있다고 생각합니까?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마 7:8) 그러나 우리는 말합니다. – “그렇지만… 글쎄요..” 하나님께서는 가끔이 아니라 매번 최선의 방법으로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 응답이 당장 나타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기대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우리 상식에 맞추려고 그 내용을 희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말씀이 다만 상식을 위한 것이라면 주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들은 초자연적인 계시들입니다.
5월26일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Thinking of Prayer as Jesus Taught By Oswald Cha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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