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

생명의 삶 QT👼열왕기상 21 : 17~29🍑겸비한 자에게 베푸시는 긍휼과 은혜 본문

카테고리 없음

생명의 삶 QT👼열왕기상 21 : 17~29🍑겸비한 자에게 베푸시는 긍휼과 은혜

credo15229850 2024. 5. 27. 04:33

 내일은 더 이쁜 포스팅으로 업로드해볼게요~

https://tripol.tistory.com/460

히브리어 열왕기상 21장 전체 원어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와예히 아하르 하데바림 하엘레 케렘 하야 레나보트 하이즈르엘리 아쉘 베이즈르엘 에첼 헤칼 아흐압 멜렠 쇼메론 개역개정,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

tripol.tistory.com

열왕기상 21:17.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18.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사마리아에 거하는...아합 -
이 말은 독자들에게 좀 홀란스러음을 안겨 준다. 왜냐하면 아합은 현재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이스르엘로 내려갔다고 해놓고(16절) 다시금 '사마리아에 거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인간이 한 장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시에 다론 장소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흑자는 이 말을 그저 '사마리아에 보좌가 있는...아합' 식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Hammond). 그러나 본절과 관련 우리는 우선 현재 엘리야가 있는 장소가 사마리아 아닌 다른 곳임을 기억하자. 또한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은 불과 30여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임을 기억하자. 18:45 주석 참조. 이렇게 볼 때 먼 데 떨어진 엘리야에게 '사마리아에 사는 아합에게 가봐라. 그가 지금 나봇의 포도원에 가 있다'는 말은 모순이 아니다. 그리고 또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사마리아에 거하는'이라는 말이 삽입되므로써 19절의 예언의 정확성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19절은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는곳'(즉 이스라엘)에서 아합의 피도 핥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22:38에 의하면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는 곳은 '사마리아 못'이다. 이러한 차이는 외견상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절의 기록으로 미루건대, 아합의 왕궁이 위치한 곳과 나봇의 포도원이 위치한 곳을 통틀어 '사마리아'라 불러도 무방한 형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9절의 예언의 신빙성은 손상되지 않는 것이다.
 
 
 
 
 

19.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
이 말속에는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비분(悲憤)과 탄식의 어감이 어려 있다. 즉 이는 아합의 범죄에 통탄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본 번역은 자칫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즉 살인과 탈취를 거듭해 온 아합의 계속적인 악행을 비난하는 말같이 들릴 수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네가 살인을 하였고 거기다 탈취까지 하였다'는 뜻이다. Living Bible은 이를 '나봇을 죽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악하지 않은가? 그런데 강도짓까지 해야 했는가?'(Isn't killing Naboth bad enough? Must you rob him, too?)로 옮기고 있다. 한편 참고로 나봇 살해 사건 외에도 아합이 저지른 죄상들을 나열해보면 우상 숭배(16:32), 음란한 이방 여인과의 혼인(16:31), 여호와 선지자들 핍박(19:1-3),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벤하닷을 놓아줌(20:42) 등을 들 수 있다. 응당 여호와 신앙의 수호자였어야 할 이스라엘 왕 아합이 도리어 이같이 참람한 죄악들만을 저질렀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더욱더 컸음은 지극히 당연하다(20-26절).



 
 
 
 

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나의 대적(對敵)이여 -
'대적'이란 '적의가 있다'는 뜻인 '아야브'(*)에서 온 말이다. 즉 이는 서로 중오와 적의를 품는 관계에 사용되는 말이다. 이러한 단어를 아합이 구사하고 있는 데서 그가 평소에 얼마나 엘리야를 눈의 가시처럼 여겼는지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아합의 눈에 엘리야는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반대하는 것으로 업(業)을 삼는 최악의 인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대적 태도가 갈멜산 사건 이후로도 계속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하다(18:17).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은 셈이니 그러한 태도가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향하여 표출되기 마련이다.
 
 네가 나를 찾았느냐 -
한글 개역 성경의 본 번역은 엘리야가 마치 점잖게 아합에게 알현을 요청한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찾았느냐'에 해당하는 '마차'(*)는 '발견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갑자기 나타난 대적에게 들켰다는 어감(語感)이 서린 말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이 말은 '아이구 이 원수가 또 나타났구나' 또는 '하필이 작자에게 걸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괴롭게 되었구나'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 하겠다.
 
 네가 스스로 팔려 -
'스스로 팔려'(*, 히트마케르카)란 '스스로 자신을...의 노예 상태가 되게하다'는 뜻이다. 즉 아합은 죄를 범하는 일에 완전혀 몰두하여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사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하면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탐욕의 노예가 되었다. 물론 그 일은 이세벨의 층동질과 계교를 통해 저질러졌으나 아합의 욕심 때문에 추진된 일임을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합은 탐욕에 이끌려 자신을 죄의 노예가 되게 하였고 그 결과 살인과 탈취를 거리낌없이 저질렀다고 말할수 있다(롬 7:14).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매인 자나 놓인 자 -
종이든 자유인이든을 막론하고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4:10 주석을 참조하라.



 
 
 
 
 
 

22.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네 집으로...되게 하리니 -
여로보암(Jeroboam)과 바아사(Baasha)는 각각 자신의 왕조를 열었으나 불과 2대째에 가서 부하의 모반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인물들이다(15:25-31; 16:8-14). 그런데 이들이 동일한 운명을 걸어야 했던 이유는 한 국가와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우상 숭배에로 이끄는 동일한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이방의 우상을 도입한 아합이(16:31-33) 같은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편 훗날 실제로 아합의 아들 여호람(혹은 요람)은 부하 예후의 모반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고, 아합의 가문은 모두 무참한 참살(慘殺)을 당하고 만다(왕하 99:21-26; 10:1-17; 대하 22:8).
 
 나의 노(怒)를 격동(激動)하고 -
'격동하다'에 해당하는 '카아스'(*)는 점차로 격분에 이르도록 자극한다는 뜻이 있다. 즉 참으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거듭 자극을 가함으로써 마침내 분노케 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실 인간들의 계속적인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마침내 절정의 분노를 발하게 하는 죄이다(츨20:3-6). 그러나 실상 이러한 분노는 당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설적 표현과 다름없다. 출 20:5 주석 참조.



 
 
 
 
 
 

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찌라
 

 개들이...먹을지라 -
임종을 평안히 맞이하여 조상들의 무덤에 같이 묻힌다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죽음의 방식이다. 반면 객사(客死)를 당해 시체가 짐승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저주받은 죽음으로 여겨졌다. 14:11 주석 참조. 그런데 이세벨에게 예고된 죽음의 방식은 이보다 처참하다. 즉 생전에 부귀, 영화와 권세를 누누리던 이세벨에게 이스라엘 성 곁에서 개들의 먹이가 되는 죽음이 예고된 것이다. 그것은 곧 이세벨의 전 삶을 송두리째 저주 아래 둔다는 부정적 상징성이 강하게 암시된 죽음이다. 그리하여 그 죽음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자의 생전의 삶의 방식과 모든 행적이 저주받아 마땅한 그릇된 것임을 생각케 할 것이다. 사실 이세벨은 아합을 충동질하여 온갖 죄악 가운데 놀아나게 한 장본인이었으니 그 삶이 욕된 것이었다고 밖에 달리 평가할 수 없다(25절). 한편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훗날 정확하게 성취되었는바 그녀는 예후(Jehu)의 반역시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이 으깨지고 개에게 뜯어 먹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였다(왕하 9:30-37).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개들이 먹고...새가 먹으리라 -
아합 가문에 속한 자들이 당할 치욕스러운 죽음과 하나님의 강렬한 노여움을 강조해 주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4:11 주석을 참조하라.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본절은 죄의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절이라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인간을 그 아래 노예처럼 두려 하는 죄의 권세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죄에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약 1:13-15), 다음으로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한 판별 기준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에 달려 있음을 확인케 된다. 사실 죄에 대해 주관적이고 자의적(恣意的)인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 죄짓는 자의 일반적 성향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입각할 때죄인은 자신의 처지를 죄로 자각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죄를 짓도록 권유하는 자기 외부의 객관적 조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아합의 생애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을 일관하게 된 주유요 원인은 악독한 이사벧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16:31)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상과 같이 죄의 주관적, 객관적 조건들은 서로 맞물려 그 열매를 산출해 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반 요소들을 함께 경계해 나가는 것이 죄의 예방에 효과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 성경은 우리들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고 충고하고 있다.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
'충동하다'에 해당하는 '수트'(*)는 '꾀다', '유혹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고 선동(煽動)하는 교활한 행위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의 처지를 이보다 더 정확히 요약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음란한 계집의 호림에 넘어간, 그리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여인의 간교한 치맛자락에 놀아난 전형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합도 우매한 결점을 소유하고는 있었지만,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렇듯 비참한 말로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26.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
'아모리 사람'(Amorites)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이주하기 전의 거민을 가리킨다(창10:16; 출 3:8; 대상 1:14; 겔 16:3). 수9:2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 참조. 그런데 '아모리 사람'이라는 종족적 호칭만 갖고는 팔레스틴 역사에서 명멸(明滅)한 여러 족속, 국가들과의 관계를 밝혀내기란 어렵다. 아마도 성경 밖의 역사 자료들을 추적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과 관련하여 '아모리 사람'이 던져 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즉 그들은 우상을 섬겼고 음란하고 부정한 행위를 벌이는 사람들이다(수24:15; 삿 6:10; 레 18:28; 20:22,23).그리고 그들이 팔레스틴을 이스라엘에 내줘야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견해이다(창 15:16). 그렇다면 '아모리 사람'의 땅을 인수한 이스라엘은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일삼아온 아합의 우상 숭배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축출당한 아모리인들의 운명에 이스라엘마저 동일하게 몰아놓은 행위라는 것이 본절의 준론(峻論)이다.
 
 
 
 
 
 
 

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은 아합(17-26절)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악함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자세를 취한다. 본절과 29절을 통해 판단하건대 아합의 회개는 비록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나 그순간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가식적이거나 표면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포하신 재앙을 아합 당대에서 그의 아들대에로 연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합이 이처럼 회개하고 나서도 다시금 악을 행했다는 데 있다(22:8, 26,27). 즉 아합은 일시적으로는 회개하였으나 지속적으로 회개의 참된 열매를 맺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회개는 다윗의 회개(시 51편)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하겠다.
 
 옷을 찢고...굵은 베에 누우며 -
본절에 열거된 행위는 모두 회개와 겸손 또는 극한 슬픔을 표시하는 것들이다(스9:3; 에4:1). 29절은 이 모든 행위의 성격을 '겸비함'으로 요약하고 있다. 즉 겉옷을 찢는 행위는 자신의 능력과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의 훼손을 통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낮추는 행위이다. 그리고 '베'(*, 사크)로 만든 옷은 종종 슬픔과 자기 비하(卑下)의 표시로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시신(屍身)을 베로 감싸는 관습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창37:34; 사37:1; 막 15:46; 눅 23:53),그 뿐 아니라 금식 역시 생명 현상을 지속케 하는 음식을 끊음으로써 자신을 하잘 것없는 존재로 여기는 자기 부인(否認)의 행위이다.
 
 행보(行步)도 천천히 한지라 -
'천천히'에 해당하는 '아트' (*)는 '부드럽게'또는 '상냥하게'라는 뜻이다. 원래 걸음걸이란 그 사람의 성격과 마음자세를 드러내준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걸음을 천천히, 부드럽게 걸었다는 것은 곧 겸손의 자세 보이려고 무진 애를 썼음을 뜻한다.
 
 
 
 
 


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겸비함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나'(*)는 '꺾이다', '복종하게 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새가 날개를 접다'이다. 여기서 새가 날개를 접는다는 것은 곧 사신의 최대 강점을 포기하는 모습이다. 대개 동물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강한 면모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전의(戰義) 상실과 굴복을 표시하곤 한다. 그러므로 아합이 겸비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적하기를 멈추고 할복을 표하였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블 수 없었던 모습이긴 해도 아합의 이러한태도는 다시금 이스라엘의 타락에 끼친 이세벨의 영향에 눈을 돌리게끔 한다. 즉 비록 우매(愚昧)한 자로 묘사되긴 해도 이세벨과의 결혼만 아니었다면 아합도 그토록 배도(背道)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본문을 통해 암묵리(暗黙裡)에 독자들에게 주는 인상이다.
 
 그 아들의 시대에야 ...내리리라 -
여기서 그 아들이란 아합의 아들이자 아하시야의 형제인 여호람(또는 요람)을 가리킨다. 22절 주석 참조. 한편 이기주의적,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본절은 당혹감을 안겨 준다. 즉 왜 첵임있는 당사자를 비껴간 징벌이 애궂은(?) 타자에게 떨어져야 하는가 하는 난제(難題)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다루기란 쉽지 않다. 죄, 기질, 성향의 유전, 교육적 환경, 즉 가치및 태도의 후천적 습득 등 여러 가지 합리적 설명의 노력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연대성(連帶性), 즉 서로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돌리는 신앙적 사고 방식에 입각해 본절을 대한다면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출20:5,6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
🟢
아합을 만난 엘리야는 하나님이 재앙을 내려 아합의 집을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처럼 멸하실 것이라 전합니다. 아합을 충동해 악을 행하게 한 이세벨은 개들이 먹게 될 것이라며 그의 최후도 전합니다. 아합이 말씀을 듣고 금식하며 겸비하자, 하나님은 재앙을 그 아들 시대로 연기하십니다.
🟣
하나님의 성품/속성:
이러한 분노는 
당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설적 표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겸비, 자기 부인(금식),
겸손, 
🔵
사람들의 계속적인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마을 상하게 하고
마침내 절정의 분노를
발하게 하는 죄이다
(출20:3-6).
아합은 일시적으로는
 회개하였으나 지속적으로 
회개의 참된 열매를 
맺지는 못하였다.
🩸✝️
🌱🌿🌳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거짓말과 속임으로 저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제 생각이 맞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이제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님 앞에 행동하고 말하는데 있어 정직하게, 말씀에 순종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LM4Wk0Qrpw

 
 
살아있는 생명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히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누가복음 24:49)

제자들은 오순절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자신들의 준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역사적으로 영광을 받으실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자마자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39절의 이 내용은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은 이미 주어졌으며 주님은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기다림이란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준비를 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영향과 능력은 오순절 이전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 자신은 이 세상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직후에 성령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계속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계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을 영접하는 것은 신자들의 한결같은 자세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영접할 때 우리는 승천하신 주님으로부터 살리는 영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세례가 아닙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성령을 통하여 그 사람의 삶 가운데 임함으로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성경이 분리하지 않은 것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올 수 있는 경험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증거입니다.

성령 세례는 당신으로 하여금 미래 또는 영원을 생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는 언제나 놀라운 영광스러운 “현재”를 위한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아는 것이니이다.” 그분을 지금 알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영원토록 멈추지 마십시오.

 

5월 27일 영원한 생명에 현재 The Life To Know Him

https://m.cafe.daum.net/mercyreformedchurch/ULF8/1405?listURI=%2Fmercyreformedchurch%2FULF8

5월 27일 주님은 나의 최고봉

살아있는 생명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히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누가복음 24:49) 제자들은 오순절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자신들의 준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

m.cafe.daum.net

https://i.pinimg.com/564x/de/79/fc/de79fc0af7effa281036c4e8bf30b91d.jpg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