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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22 : 1~12🍑전쟁을 앞두고 먼저 찾아야 할 대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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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열왕기상 22장 전체 원어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와예쉐부 솨로쉬 솨님 엔 밀하마 벤 아람 우벤 이스라엘 개역개정,1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 새번역,1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세 해 동안이나 전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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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2:1.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년을 지내었더라
전쟁이 없이...지내었더라 -
20장에 수록된 아벡(Aphek)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로 아람은 약 3년간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런데 혹자에 의하면, 이 무렵의 아람은 알만에셀이 이끄는 앗수르와 교전 중이었으며, 아합 역시 아람 동맹군으로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간에 다툴 겨를이 없었다 한다(Rawlinson). 일설에 의하면, 아합은 이때 1만의 병력과 2천대의 병거를 앗수르에 대항하는 아람군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더구나 이러한 동맹은 공동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적인 것일 뿐 양국간의 신뢰에 바탕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20:1 주석 참조. 그 실례로 본장에서 보는 것 처럼 불과 3년만에 양국이 재차 대립 상태에 들어간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아람이 전에 반환하기로 한 길르앗 라못을 반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밝혀지고 있다(3절). 즉 이스라엘은 아벡 조약을 통해 다메섹에서의 교역권은 물론 기타 분쟁 지역들을 할당 받기로 하였던 바 그 지역들 중에는 길르앗 라못도 포함되어 있었다(20:34). 그런데 아람 왕 벤하닷은 일단 사경(死境)의 위기에서 벗어나자 애초의 조약을 무시하였던 것이다.
2. 제 삼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
제 삼 년에 -
여기서 '제 삼 년'이란 '전쟁 없이 지낸 지 삼 년 만에'란 뜻이다. 즉 이는 20:34에서 이스라엘 왕 아합과 아람 왕 벤하닷이 서로 화친을 맺은 때를 기점으로 해서 3년째 되던 해를 가리킨다. 이 말로 미루어 아람과 이스라엘이 휴전(休戰) 상태로 지낸 기간은 만 3년이 채 못됨을 알 수 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내려가매 -
지금까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대체적으로 적대 관계를 유지해 왔다(14:30; 15:6,7,16,32). 그런데 그동안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없이 본절에서는 돌연 남북 왕국이 서로 우호(友好) 관계를 누리는 사이로 등장한다. 그러나 추측컨대 이러한 우호 관계는 아합의 딸 아달랴(Athaliah)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Jehoram)의 혼인을 매개로 이루어진 듯하다(대하 18:1; 21:6;22:2). 더군다나 당시는 동쪽에서 점점 강성(强盛)해 가는 앗수르의 위협에 대처키 위해 팔레스틴의 여러 국가들이 곧잘 동맹을 맺던 때이다. 그러므로 본래 외교에 능한 아합이 남왕국과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당시의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여호사밧(Jehoshaphat)과 공동 전선을 펼쳤던 것이라 보여진다. 또한 팔레스틴 동북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는 아람에 대해서도 양국은 나란히 견제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한편 유다 왕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의 아합왕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내려가매'로 표현한 것을 보아 본장은 남왕국을 중심으로 한 기록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호사밧 -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다'이다. 유다의 제 4대 왕인 그는 25년간(B.C.871-847)을 통치하였다. 비록 몇 가지 실책을 저지르기는 하였지만 여호와를 경외한 여호사밧은 히스기야, 요시야와 더불어 유다의 현왕(賢王) 중 한 명으로 분류된다. 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왕 -
다른 사람이 아닌 16장 말미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등장한 아합(Ahab)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이제 본장에서 유명(幽明)을 달리하니 이로써 열왕기상도 끝이 난다.
3. 이스라엘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길르앗 라못 -
일명 라못 길르앗(Ramoth in Gilead)으로도 불리우는 이 성읍은 길르앗 지방 동북방의 중요 요새지이다. 혹자는 이곳을 여호수아 13:26에 나오는 라맛 미스베(Ramath Mizpeh)와 동일시하기도 하나(Van de velde) 분명치 않다. 아무튼 길르앗 라못은 요단 동편에 위치한 세 도피성 중 하나였고 래위인의 성읍이었으며, 솔로몬 시대에는 제 6지역 장관이 거주하던 곳이다(4:13; 신4:43; 수20:8). 그런데 이 지역은 고원(高原) 지대로서 골짜기마다 물이 많고 포도와 올리브가 잘 자라는비옥한 지역이다. 그러나 타부족과의 접경에 위치한 관계로 자주 분쟁이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B.C.922년경 르손(Rezon)이 솔로몬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 2세기 동안 이 지역은 아람과 이스라엘 간의 주요 분쟁지역이 되었다(1:23-25).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은...알지 못하느냐 -
갈르앗 라못을 아람에게 빼앗긴 것은 이스라엘로서는 천추의 한이 되는 일이었다. 아마도 이 지역은 벤하닷 1세가 바아사(15:20) 혹은 오므리와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아람에 합병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벤하닷 2세가 아합에게 패배한 뒤, 그리고 아합이 앗수르 대항 동맹군에 협력하는 대가로, 길르앗 라못은 이스라엘에 반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20:34 주석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하닷 2세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본장의 전쟁은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Cohen).
4.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뇨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
여호사밧...싸우시겠느뇨 -
여호사밧 통치하의 유다는 제법 강성하였다(대하17:1,2,10-19). 따라서 아합은 이스라엘 단독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인 아람에 대하여 여호사밧과 공동 전선을 펴려 하였다. 한편 여호사밧으로서도 당시 유다 주변국들에 대하여 그다지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국방 사업으로 내실을 기하면서 외면적으로는 외교에 치중하는 정책을 펴 나갔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람을 견제하는 일은 여호사밧으로서도 도모해 봄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당신과...일반(一般)이니이다 -
원문에는 '와 같이'라는 뜻인 '케모'(* )가 거듭 사용되었다. 즉 '나나 당신이나 다를 바 없고,내 백성이 곧 당신 백성과 같고, 내 말들이 곧 당신의 말들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현란하리만치 일치를 강조한 의교적 언사(言辭)는 아람을 공격하는 일에 있어 남북 이스라엘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그러나 그 동기야 어떠했던 간에 여기서 여호사밧은 중대한 과실을 범한 셈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그는 여호와의 대적자였던 아합을 도운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대하19:2). 사실 두 차례에 걸친 아람의 침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20장)께서 이제 아람을 도구로 사용하사 아합을 징치(懲治) 하고자 하셨으리라고는 여호사밧으로서 깨닫기 힘들었을 것이다.
5.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먼저...물어보소서 -
대하 17:3-4에 의하면, 여호사밧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경건한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여호사밧의 면모가 본절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즉 비록 정치적 판단에 있어 길르앗 라못 공략의 필요성을 공감했더라도 그는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묻자는 태도를 보인다(대하18:4). 이처럼 하나님께 의지하는 태도는 훗날 여호사밧이 여호람과 더불어 모압을 정벌하던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왕하 3:4-12). 그러나 여기서도 굳이 여호사밧의 잘못을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즉 여호사밧은 구체적 전투 사항을 여호와께 물어 보기 이전에 아합과의 군사 동맹 여부 자체에 관해 먼저 물어보았어야 옳았다.
6. 이스라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인쯤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저희가 가로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이에 선지자 사백 인쯤 모으고 -
본장에는 아합이 집합시킨 이 400명의 선지자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규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장의 기록에서 이들은 (1) 왕의 정책 결정에 일종의 자문(諮問) 위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2)권력자의 구미에 맞을만한 말만 하는 아부형의 인물들로 나타난다. 즉 이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권력의 핵심에 포진(鋪陣)한 어용(御用) 선지자들이다. 그런데 또한 이들은 외견상 여호와 신앙에 속하는 선지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참 선지자인 미가야(Micaiah)와 이들의 차이점은 예언의 진위(眞僞) 여부에 있었지(10-28절)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극명한 대립처럼 근본적인 차이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18:20-40). 어쨌든 본장에서는 이 400명의 선지자들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합과 이세벨이 한편으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면서(16:31-33) 또 한편으론 형식적이나마 여호와 신앙을 허용하는 종묘 혼합주의 정책을 펼쳤으리라고 추측해 볼수 있다. 사실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한 경우에도 그녀는 표면상 이스라엘의 전통과 율법에 편승해서 간접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21:9,10). 물론 실제에 있어 이는 여호와 신앙의 파괴였다. 이처럼 과거 여로보암 당시와 마찬가지로 아합 시대에도 이스라엘 전통을 완전히 내버리지는 않으면서 이방 사회의 풍습과 종교를 도입하려는 혼합주의 세력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12:25-33). 본절의 400명 선지자들은 바로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무리들로 판단된다. 특히 이들이 왕의 정책에 언제나 동조하는 무리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그들은 왕권의 무한한 확대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구실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전체적(專制的) 왕권의 강화란 이방 국가들의 특징이지 이스라엘 전통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즉 여호와 신앙이 뒷받침하는 이스라엘 전통 속의 왕권이란 언제나 제한적이었다. 21:2 주석 참조. 그래서 엘리야 같은 여호와의 선지자는 왕권의 전횡(專橫)에 언제나 비판적이었다(21:17-26).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해 왕전 강화와 이방 체제 도입에 공헌한 400인의 선지자들은 실상 여호와 신앙과 그에 뒷받침된 전통 체제를 붕괴시킨 무리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들이 참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길르앗 라못에...올라가소서 -
요단 동편의 길르앗(Gilead) 일대는 대체로 고원 지대였다. 즉 그곳은 해발 약 210m에서 910m까지 이르는 구릉지대인 것이다. 그래서 본절과 같이 '올라가소서'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7. 여호사밧이 가로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이 외에...있지 아니하니이까 -
'이외에'에 해당하는 '오드'(*)는 '계속해서', '다시'라는 뜻을 가진 부사이다. 즉 여호사밧은 400명의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더 물어 볼 선지자가 없는가 묻고 있다. 여기서 여호사밧이 이들의 예언(달콤한 말임에도 불구하고)에 만족하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즉 여호와 신앙 가운데서 살아온 여호사밧은 민감하게도 이 무리들의 예언에서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다시 말해 그는 '이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모나게 발설하지는 않았으나 내심 그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오히려 -
'오히려'로 번역된 '오드'(*)는 7절에서 '이 외에'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문맥상 본절에서는 '아직'으로 번역하는 게 좋음직하다.
이믈라의 아들 이가야 -
'미가야'(*, 미카예후)는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그는 당시 북이스라엘에서 활약하던 참선지자로 엘리야, 엘리사의 계열에 들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아합의 주된 비판자로 나타난다. 즉 물론 엘리야처럼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극렬한 역할을 담당하지는 않았으나(19:2). 미가야 역시 아합이 만나기를 꺼리는 껄끄러운 선지자였다. 본장에서도 그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참된 예언을 대언(代言)하다가 그만 이번 사건에서 옥고(獄苦)를 치루고 만다(24-28절).
저는 내게...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
여기서 '흉한 일'(*, 라아)은 본래 '재난', '불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말은 장래에 대한 불길한 예언으로만이 아니라 교훈과 경고, 권면 등과 같은 보다 폭넓은 '메시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 본절로 미루어 볼 때 이미 미가야는 아합의 그릇된 행위에 대해 자주 비판과 미구(未久)에 임박할 재난들을 경고해 왔던 것 같다. 그러기에 병행 구절인 대하 18:7에는 '항상'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
여호사밧의 대꾸에는 은근한 책망이 담겨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좋든 싫든 하나님 말씀 자체로서 존중되어야지, 듣기 싫은 말을 한다고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 본절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같은 말가운데서도 여호사밧의 진실한 신앙적 태도를 거듭 엿볼 수 있다.
9.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로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내시 -
이에 해당하는 '사리스'(*)는 '거세(去勢)하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곧 본 직책을 가진 사람이 고자(鼓子)임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원래 근동 세계에서는 고자를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는 관습이 있었긴 해도(J.Austel), 이스라엘인들은 고자를 언약의 총회에서 제외시킬 정도로 불완전한 존재로 여겼었다(레 22:24;신 2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아합의 왕궁에서 내시가 상당히 비중있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이는 두로의 우상과 함께 이방의 사회 체제를 끌어들이는 데 열심이었던 이세벨의 영향 탓일 것이다(16:31-33). 그리하여 결국에는 이후의 왕들도 계속 내시를 두게 되기까지에 이르른다(왕하 8:6;9:32).
10.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문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본절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중대사를 눈앞에 두고 소집된 국가 회의의 면모를 짐작케 해준다.
왕복을 입고 -
원문은 단순히 '그들의 옷을 입고'이다. 물론 '그들'은 왕이므로 '그들의 옷'(*, 베게드)은 '왕복'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본절이 그들의 의복 착용을 새삼스럽게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즉 의복이란 곧 그 사람의 신분 및 직무를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본서 기자가 아합과 여호사밧의 왕복 착용 사실을 지적한 이유는 저들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라 볼 수 있다. 그만치 본절은 사안(事案)의 중대성을 부각시키는 문구이다.
문 어귀 광장에서 -
'광장'에 해당하는 '고렌'(*)은 본래 '타작 마당'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타작 마당도 광장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R.D.Patterson). 한편 왕이 문 앞에 나와서 회의를 갖는 것은 지도자가 장막 입구에 나와서 재판 등의 직무를 수행하던 이스라엘 족장 시대 이래의 관습이다. 다시 말해 본절의 '문 어귀 광장'이란 현 공동체의 장(長)이 그 구성원들과 만나 의견을 수렴(收斂)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뜻이다(신 21:19; 수 20:4; 왕하 7:1; 느 13:19; 시69:12; 잠 1:21). 실상 건강한 공동체라면 이런 자리에서 기탄없는 견해가 만발하여 지도자의 직무 수행에 참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합의 주변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명의를 빌어 권력에 영합하는 정상 모리배(政商謀利輩)들만이 들끓었다.
모든 선지자가...예언을 하는데 -
본절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이 왕의 정치적 결단에 조언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이들은 마치 왕의 정치 자문 위원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정책을 조언하고 뒷받침하는 이념적 구실을 하는 것이다. 사실 원래 구약에서 정치, 경제 등을 종교와 구분하는 사고 방식은 낯선 것이다. 그 대신 하나님 앞에서는 다만 모든 분야가 통전(通電)된 삶이 놓여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현실이 하나님 앞에 바르냐 그르냐일 뿐이다. 본장에서도 문제는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토로하지 않고 거짓 예언을 들려주었다는 데 있다.
11.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시드기야 -
'시드기야'(*, 치드키야)란 '여호와는 나의 의로움이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처럼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는 본문에서 거짓 영에 감동된 선지자라는 부정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그의 이름이 지닌 뜻에서도 나타나듯 당시 400명의 선지자들은 철저히 여호와의 선지자로 행세하는 무리였음을 알 수있다.
철로 뿔들을 만들어 -
성경에서 뿔(Horn)은 상징적으로 힘과 능력을 의미한다(삼상2:1,10; 삼하 22:3; 시89:24; 92:10; 단7:21; 8:8). 게다가 철은 당대로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금속으로서 '강함'의 대명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철로 뿔을 만들었다는 것은 곧 당할 자가 없는 막강한 힘을 상징한다. 즉 시드기야는 아합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철 뿔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의 과장된 부추김은 가뜩이나 어린애 같은 아합의 불붙는 만용(蠻勇)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하셨다 하고 -
시드기야(Zedekiah)의 이 같은 예언 역시 초자연적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시드기야를 포함한 거짓 선지자들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22절). 그러나 본문이 제시하는 문제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거짓 영의 감동을 구별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인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구별 문제와 직결된다(Szikszai). 한편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 영이라는 초자연적 존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12절) 그들이 윤리적 책임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개 미혹에 빠지게 되는 자들의 마음 바탕에는 욕심과 탐심이 감춰져 있게 마련이다. 마치 세균의 감염은 깨끗치 못한 부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듯 말이다(잠12:36; 렘 23:32; 사44:20; 고후11:3; 약1:14). 그러므로 이 직업적 선지자들은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기 보다는 권력 주변에서 곡언(曲言)을 일삼는 무리였음에 분명하다. 즉 그들이 거짓 영의 노리개가 되었던 것도 그들 안에 거짓의 바탕이 상응(相應)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미가야가 거짓 영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그가 정직한 선지자였기 때문이다(14절).
12.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승리를 얻으소서 -
이에 해당하는 '차라흐'(*)는 '번영하다' 또는 '형통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의도했던 바를 만족스럽게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길르앗 라못 공략이 아합의 숙원(宿願)이었으므로 선지자들이 왕이 원하는대로 답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아합의 의도에 거침없이 반발할 인물은 처음부터 회의에서 제외되었다(8절).
성경 말씀:
3-5그러자 여호사밧왕은 "좋습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싸우러 가겠습니다. 물론 나와 내 백성은 당신과 당신의 백성이 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여호와께 물어 봅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아합왕은 예언자 400명을 불러모으고 그들에게 "우리가 길르앗의 라못을 치러 가야 하겠느냐 가지 말아야 하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치러 가십시오. 하나님이 그 성을 왕에게 넘겨 주실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대하18:4
4모압의 메사왕은 양을 길러 해마다 새끼 양 10만 마리와 그리고 숫양 10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조공으로 바쳤는데
5아합왕이 죽자 그는 이스라엘에 반기를 들었다.
6그래서 요람왕은 즉시 사마리아에서 나가 모든 병력을 소집하고
7유다의 여호사밧왕에게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습니까?"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자 여호사밧왕은 이런 회답을 보냈다. "내가 싸우러 가겠습니다. 내 백성과 말들도 당신의 지휘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8그런데 우리가 어느 길로 공격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요람은 "에돔 광야 길로 가서 공격하려고 합니다"라는 전갈을 다시 보냈다.
9그래서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은 에돔 왕과 함께 모압을 치려고 나섰다. 그들이 광야 길을 돌아 7일 동안 진군했을 때 사람과 가축이 먹을 물이 떨어졌다.
10그때 요람왕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여호와께서 우리 세 왕을 모압 왕의 손에 넘겨 주시려고 이 곳까지 불러내셨구나!" 하고 외쳤다.
11그러나 여호사밧왕은 "우리가 여호와께 물어 볼 예언자가 여기에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요람왕의 신하 한 사람이 "사밧의 아들 엘리사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엘리야의 제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2그때 여호사밧왕이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는 진실한 예언자입니다" 하였다. 그러고서 그 세 왕은 엘리사에게 내려갔다.
13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 부모의 예언자들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오." "아니오.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 세 왕을 불러모아 모압 왕의 손에 넘겨 주려고 하시기 때문이오."
왕하 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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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속성:
구원, 함께 하시는, 뜻,
예언, 왕권, 참되신, 말씀,
경고, 교훈, 권면, 도움,
의로움, 힘, 능력, 강하신,
승리, 하나님의 영의 감동,
초자연적인 근원, 번영,
형통,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외, 현왕賢,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사용하시는 도구,
경건,주의 뜻을 먼저 묻는
태도, 의지, 여호와 신앙,
대언, 존중, 정직/진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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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사밧이 감언이설의
400명이라는 적지 않은
수의 선지자들의 잘못된
예언을 듣고도 다 믿지
않고 정말 맞는지 정확히
확인하려는 신중함과
통찰력이 마음에 들었다..!
아합의 그릇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경고의
예언을 주신 점에 대해서
주님의 한이 없는 인자하심이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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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야 선지자와 여호사밧왕처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신앙과 함께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보여지는 상황에 대해 사실 여부를 꼼꼼히 따지는 깨어 있는 마음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r7yzSnbDrs
질문 없는 계시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6:23)
“그날”은 언제일까요? 승천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실 때는 아닐까요. 그날에 당신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날에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생명이 당신 안에서 나타날 때까지는 당신은 이것저것을 묻길 원합니다. 그 후 좀 지나면 당신은 모든 질문이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목적에 완전히 부합하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온전히 의존하는 자리에 온 것입니다. 당신은 그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까? 만일 아니라면 왜 아닙니까?
당신이 잘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것들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마음을 떼게 할 수 없습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 당신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마음 상태는 실제로 요한복음 14:1절처럼 될 것입니다. 또한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상하게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뭔가가 끼어들면 당신의 지성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당신 속의 성향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찾으십시오. 만일 당신의 성향이 예수님의 생명에 기꺼이 항복하면 당신은 아버지와 더 이상의 거리를 느끼지 않게 되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당신을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5월 28일 질문 없는 계시 Unquestioned Rev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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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8일 주님은 나의 최고봉
질문 없는 계시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6:23) “그날”은 언제일까요? 승천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실 때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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