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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베드로전서 1 : 10~21🍑구원 받은 성도의 거룩한 삶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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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베드로전서 1 : 10~21🍑구원 받은 성도의 거룩한 삶

credo15229850 2024. 6. 2. 07:01

https://tripol.tistory.com/1441

 

헬라어 베드로전서 1장 전체 원어 원문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해설 해석

페트로스 아포스톨로스 예수 크리스투 엨클렠토이스 파레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스 폰투 갈라티아스 캎파도키아스 아시아스 카이 비뒤니아스 개역개정,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tripol.tistory.com

(시간이 촉박해서 11절까지만 묵상하고 일정 끝난 후 집에 와서 다시 수정할게요~

수정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 

본절에서 불특징인으로 나타나는 '선지자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1) 혹자는 베드로 당시에 활동하던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한다(Selwyn). 이 견해는 본서를 읽는 수신자들이 선지자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베드로가 불특정으로 썼다고 추측한다. (2) 혹자는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선지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Blum, Cranfield).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견해는 본절과 12절 이하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하므로 유익함을 얻은 자들은 선지자들 자신이 아니라 수신자들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으며 신약 시대의 선지자를 포함할 경우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알았기에 그것을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지자들'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메시야의 때에 대해서 간절히 알기를 원했으며 그것을 알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였다(눅 10:24).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상고하니라 -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선재(先在)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Lenski). (2) 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ichaels, Selwy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 혹은 '성령'과 상호 교환으로 사용되고 있으며(행 1:16; 2:33; 벧후 1:21)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12절; 요 15:26, Stibbs). 성령께서 예언자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때와 그가 받으실 고난과 영광에 대해 예언하게 하였다(삼하 23:2; 눅 24:26).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예언자들이 간절히 알기를 원하며 열심히 상고하고 예언한 것은 예언의 내용 곧 메시야의 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예언자 자신과 당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롬 4:23,24; 15:4; 고전9:9,10;10:11, Blum, Stibbs, Michaels).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

'보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탈렌티'(*)는 수동태 분사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성령을 보낸 자'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요 14:16,26; 갈 4:6)라고 나타내기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요 15:26; 16:7; 행 2:33)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령'을 보낸 자에 대해서 특정한 자로 정하기는 어렵다(Michaels). 한편 앞서 언급된 예언자들이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여 전한 것을(11절) 본절에서는 '복음'과 동일시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말씀을 상고하여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였던 바와 같이 신약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성령을 힘입어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 즉 복음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였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살펴보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사이'(*)는 '자세히 주의하여 보다'라는 의미로 잘 보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것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본래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하는 존재이기에 인간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알 수 있지만 구원의 계획은 너무도 오묘하여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실현되어 하나님의 계획이 공개되고 선포될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은 예수의 초기 지상 생활을 지켜보았으며(딤전 3:16) 구속이 완성될 때에는 찬양으로 기뻐할 것이다(계 5:11-14,Blum). 한편 베드로는 10-12절의 논의를 통해 복음의 전달 과정을 세 단계로 기술하고있다. (1) 선지자(10절). (2) 복음전파자(12절). (3) 천사들(12절). 이러한 전달 과정을 거쳐 실현된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속 계획은 신실하게 성취되어 왔다(Lenski, Cranfield).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

'동이고'의 헬라어 '아나조사메노이(*)는 '급한 일을 당할 때 취하는 태도'(출 12:11)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게으른 삶을 반성하고 목표로 매진하는 자세'를 가리킨다(Lenski). 예수께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종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눅 12:35)를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동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는 가운데 긴장된 자세로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Michaels).

 

 근신하여...온전히 바랄지어다(*, 네폰테스 텔레이오스 엘피사테)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헬라어 문법에서 부사가 '오스'(*)로 끝나면 앞에 있는 날말을 수식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텔레이오스'가 앞에 있는 '네폰테스'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온전히 근신하여'로 해석한다(Michaels, Bigg). 이 경우 '온전히 근신하여'는 '인내'를 강조한다. (2) 혹자는 일반적인 헬라어 문법으로 따질 때 동사 앞에 있는 부사가 동사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번역하며 '소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Selwyn, Lenski).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가져다 줄 은혜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마음을 가다듬고 언어나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며 인내 가운데 살아야 한다(Blum, Stibbs).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테크나 휘파코에스'(*)는 전형적인 셈어적 표현이다(막 2:19; 눅 10:6). 특별히 셈족 언어에서 '자녀'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상속자'라는 뜻으로 자녀는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지닌다. (2) '부모의 인격이나 성품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일 경우 누구의 자녀이냐에 따라 자녀의 인격이 결정된다(Selwyn). 이러한 언어적 배경 속에서 베드로는 수신자들을 향해 '불순종의 자녀'(엡 2:2)가 아니라 '순종의 자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서(롬 1:5; 16:26) 복음을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마음을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그 성품을 배워가기 때문이다(Michaels).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

'알지 못할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아그노이아(*)에서 '아그노이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ranfield,Selwyn). 왜냐하면 헬라어 단어 자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무지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기 때문이다(행 17:30; 엡 4:18).(2) 혹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Bigg).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있어서 '아그노이아'는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행 3:14-17).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즉, 이는 이방인이었든 유대인이었든간에 진정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나타낸다(Stibbs). 이러한 자는 사욕 즉 자연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Michaels, Stibbs) 충동대로 방종한 삶을 산다. 그러나 영적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삶 즉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버려야만 한다.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거룩한 자'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칭호로서 '거룩한 자' 혹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나타난다(LXX 시 70:22; 77:41; 88:19; 사 1:4; 5:16; 12:6;17:7; 29:23; 30:12,15; 31:1; 41:20; 45:11; 55:5). 이것은 하나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시사한다(Blum). 이러한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과거에 처했던 어둠에서 광명한 빛으로 부르셨으며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2:9;5:10). '되라'의 헬라어 '게네데테'(*)는 '기노마이'(*, '되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명령형이다. 그러나 고전 헬라어에서 '기노마이'의 수동태 명령형 '되다'(become)의 의미보다 '이다'(b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의 의미보다 '거룩한 존재이니 거룩함을 나타내라'라는 의미이다(2:9).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한편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트로페'(*)는 본서에서 '선한 행실'(2:12), '선한 양심'(3:16), '정결한 행위'(3:2)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거룩'이 하나님께로의 분리를 의미하나 일상적인 삶의 행동과 연관된 것으로서 세상에서 윤리를 실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Blum, Michaels).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

 여기서 '기록하였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그라프타이(*)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사용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베드로가 인용한 본문은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으로(레 11:44; 19:2; 20:2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아가도록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이 말씀을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복음 안에 산다 할지라도 율법과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완성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윤리적 삶을 영위해야 한다(Lenski, Stibbs).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

'외모로 보시지 않고'의 헬라어 '아프로소폴렘프토스'(*)는 '얼굴을 보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사파님'(*)에서 유래한 것으로 편견에 사로잡혀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구약시대에서는 생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다(마 6:9; 눅11:2).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보살피시는 분'과(마 6:32) '재판장으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눅 18:1-7)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이러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여 위로와 권면을 하고 있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나그네로 있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이 세상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이전에 잠시 거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것이다(Stibbs). 그러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할 것처럼 안일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는 악에서 떠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한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너희가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는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신앙에 대해 언급할 때나(Hort) 표준이 되는 가르침을 언급할때 사용되는(Kelly) 관용구이다. '에이도테스'가 사용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사도의 교훈을 심화시켜 설명할 때(롬 6:9; 고후 5:6). (2) 앞에서 명령한 구절에 대한 설명이나 이유를 보충하고자 할 때이다(고전 15:58; 엡 6:8,9). 이 두 가지 중 본절의 '에이도테스'는 후자의 경우이다. 왜냐하면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는 권면에 이어 계속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가기 때문이다(Michaels,Blum).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

'망령된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마타이아스 아나스트로페스'(*)는 유대인의 생활 양식을 가리키기보다는 이방인의 생활 양식을 의미한다(Blum). 더욱이 '망령된'의 헬라어 '마타이아스'(*)는 이방종교의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된다(렘 2:5; 8:19; 행 14:15; 엡 4:17). 한편 '구속된 것'의 헬라어 '엘뤼트로데테'(*)는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에서 비롯된 용어로 두가지를 의미한다(Blum, Selwyn). (1) 돈을 지불하고 사다. (2) 속박에서 해방시키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구속받기 위해 치른 대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과 은'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힘으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구속사역이 완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막 10:45; Lenski). 이러한 대가의 귀함과 완전함에 대한 베드로의 진술은 '값 없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52:3)과 상치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비록 문자적인 의미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하여 (1)과 (2)의 의미를 모두 강조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태도로 (2)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Michaels).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

'어린양 같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암누'(*)는 침례 요한이 예수를 가리릴 때 이미 사용한 표현이다(요 1:29,36). 본문의 유래에 대해 혹자는 사53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사 52장에서는 구속의 대가를 예수의 보혈과 비교하며 사 53장에서 예수와 어린양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어린양의 피는 예수의 보혈로 비유되는 반면에 사 53장에는 어린양의 피가 없으며 심지어 침묵하는 어린양으로만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 53장은 예수의 고난을 나타내나 구속의 보혈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차라리 본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출 12장에 나타난 유월절 어린양과 대비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은 유월절 어린양이 지닌 구원과 해방에 대비된 예수의 사역을 시사하기 때문이다(Michaels).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과 같이 죄와 허물이 없으신 유일한 분으로서 그의 구속은 보다 완전하고 귀한 것이다(출 12:46; 요 19:36;고전 5:7, Blum).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그는 창세 전부터가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 

본절은 전형적인 비교 구문인 '멘...데'(* ... ,'한편...또다른 한편')로서 베드로는 이 구문을 통해 '창세 전'과 '말세'를 비교하여 네 가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1)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창세 전'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진실하게 진행되었다(Michaels). (2) 동사 시제에 있어서 '미리 알리신 바'의 헬라어 '프로에그노스메누'(*)는 완료 수동 분사로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에 대해 '미리 알리신' 내용이 완전했음을 시사하며, '나타내신 바'의 헬라어 '파네로덴토스'(*)는 부정 과거 수동 분사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이 일회적으로 완전했음을 시사한다(Lenski). (3) 내용상 '창세 전'은 메시야의 신성과 사역을 나타내며 '말세'는 구속과 부활의 증거를 보여준다(Stibbs). (4) '프로에그노스메누'와 '파네로텐토스' 모두 수동태 분사형으로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인간의 타락이나 죄악도 하나님의 계획을 파기시킬 수 없음을 시사한다(Michaels).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는...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

'하나님을'의 헬라어 '에이스 데온'(*)은 문자적으로 '하나님 안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며(요 1:18) 자신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켰기 때문이다(고후 5:19, Blum, Kelly).베드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를 이룬 하나님에 대해 두가지로 진술한다. (1)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분이시다. 곧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Stibbs,Blum). (2) 영광을 주신 -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실 뿐만 아니라 영광을 주신 것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도 미래에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보증해 준다(롬 8:17-30; 히 2:10, Stibbs).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호스테 텐 피스틴 휘몬카이 엘피다 에이나이 에이스 데온) - 

본문을 헬라어 구문상으로 해석할 때 두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본문을 '의도문'으로 본다(Robertson). (2) 이유는 본절이 직설법로 쓰였기 때문이다. 비록 '호스테' 다음에 부정사가 따르면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지라도 문장 전체가 명령법이 아니고 직설법일 때는 '의도'로 해석한다는 주장이다. (2) 혹자는 본문을 '결과문'으로 본다(Robertson). 그 이유는 코이네 헬라어에서 '호스테' 다음의 부정사가 따르면 일반적으로 '결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비록 서술적 용법일 때 '의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문법적 규칙이 아니기에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문맥상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이유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로 그리스도인들을 안위하기 위함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되었기 때문에(Michaels)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믿음과 소망'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1) 혹자는 '믿음'에 '소망'이 종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서 '믿음'에는 정관사가 있지만 '소망'에는 정관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러므로 너희 믿음이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게 한다'(Kuhl)라고 해석해야 한다. (2) 혹자는 '믿음과 소망'은 병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Bigg).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실의 두 가지 의미를 반복적으로 기술하여 강조적 효과를 나타내며 믿음과 소망을 강조하기 위해 앞에서 배경적 설명을(3-9절) 해왔기 때문이다(Michaels, Selwyn).

 

 

 

 

 

 

🟠🔴
🟢

 

🟣
하나님의 성품/속성:
성령, 예언, 영광, 
(하나님의) 영, 복음,
계획, 오묘하신, 신실한, 
성취하시는, 소망, 온전한,
은혜, 믿음, (영적) 생명,
거룩, 정결, 광명한 빛,
선한, 공의로운 심판자,
아버지, 가르침, 보살피시는,
판단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언자, 사역,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 선지자, 그분을
간절히 아는 마음, 상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실현, 찬양/기쁨,
반성, 인내, 기다림, 조심, 
상속자,순종의 자녀, 
선한 양심 및 행실, 위로,
권면, 
🔵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은혜를 바라며
거룩하심을 본받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힘입어야 한다.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만
아시는..주님의 성품을
배워가고 닮아가는 순종의 
자녀가 되어야 겠다.
과거의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버리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본향
천국을 바라보며,,
🩸✝️
🌱🌿🌳
거룩한 자->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율법을 완성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원리를 따라 윤리적 삶을 영위하기.
예수님의 값없이 주신 완전하고 귀한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게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끝까지 주님을 위해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hNwynsUW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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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시 25:12)

무엇이 당신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아마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모두 뭔가에 의하여 다 사로잡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리스도인일 경우는 자신들의 신앙 체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는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 사로잡혀야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지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애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임재에 붙잡혀야 합니다. 어린 아기들은 엄마를 의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데도 아기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엄마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닥치면 갓난아이의 뿌리 깊은 의식에는 엄마가 있기 때문에 저절로 엄마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느낍니다.(행 17:28)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보게 됩니다. 이는 바로 우리 속에 깊게 자리 잡은 하나님을 향한 의식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히게 되면 염려와 환난과 난관 등…그 어떤 것도 우리 삶 가운데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염려의 죄악을 왜 그토록 강조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항상 계시는데 어떻게 감히 주님을 불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가 되면 원수의 모든 공격을 대항하여 가장 효과적인 성벽을 세운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쉼을 얻네.”(시 25:13) 환란이나 오해나 비방 등,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져 있다면 주님은 우리의 평강을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라.”(시 46:1) 그 어떤 것도 이 피난처를 뚫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6월 2일 사로잡혀 있는 것 Are You Obsessed by Something?

https://m.cafe.daum.net/mercyreformedchurch/ULF8/1411

 

6월 2일 주님은 나의 최고봉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시 25:12) 무엇이 당신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아마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모두 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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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루 호수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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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파랑 빛나는 날개가루로 만든 호수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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