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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베드로전서 1 : 22~2:10🍑영원한 복음을 사모하며 아름다운 덕을 전하는 삶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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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
'깨끗하게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그니코테스'(*)는 완료 시상으로 회개로 이루어진 상태를 나타낸다(Michaels). 그리스도인에게 성취된 이러한 정결(淨潔)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진다. '진리'는 두가지를 의미한다(Selwyn). (1) 거짓과 구별된 참됨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의 화육,대속, 부활, 승천을 뜻한다. 본절의 '진리'는 후자의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받아들며 순종함으로 깨끗하여진다. 이렇게 진리를 통해 죄로부터 온전히 깨끗해진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형제애를 나눌 수 있게 된다. 한편 '깨끗하게 하여'와 관련된 의식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깨끗하게 하여'가 구약 시대의 정결 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Bigg) (2) 혹자는 '깨끗하게 하여'가 침례를 암시한다고 주장한다(Blum).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비록 '침례'에 대한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할지라도 '깨끗하게 하여'와 다음 절의 '거듭난'이 모두 완료시상으로 과거에 단회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
'사랑하라'의 헬라어 '아가페사테'(*)는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부정 과거 시상은 과거의 행위와 뚜렷한 차이를 나타냄과 동시에 행위의 시작을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서로 반목(反目) 상태였을지라도 회개하여 온전히 깨끗하여진 그리스도인은 과거와는 달리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새로운 품성으로 서로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이면 행했어야 할 덕목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피차가 열정적으로 사랑하여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서로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요일 3:14-18).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거듭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게겐네메노이(*)는 완료 분사로 앞절의 '깨끗하게 하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회심된 상태를 시사한다. 한편 '씨'의 헬라어 '스포라스'(*)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selwyn). (2) 혹자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lum,Cranfield, stibbs).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중 다른 곳에서도 '씨'는 '말씀'에 비유되고 있으며(막 4;14; 눅 8:11) 문맥상 이어지는 설명에서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진술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시 33:9; 사55:10,11; 히 4:12, Stibbs).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본절은 포로로 끌려가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인 사 40: 6-8의 인용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구약 본문을 인용하여 당시 핍박받고 흩어져 방랑하는 수신자들에게(1절) 위로될 뿐만 아니라(Blum) 모든 육체의 영광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질지라도 말씀은 영원하며 말씀을 통해서 약속하신 그리스도인의 구원도 영원함을 강조하고 있다(Selwyn, Stibbs, Blum).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본절은 사 40:8(LXX)의 인용이다. 여기서 '주의 말씀'의 헬라어는 '토 레마 퀴리우'(*)이나 70인역에는 '토 레마 투 데우'(*, '하나님의 말씀')로 되어있다. 인용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베드로 자신의 의도적인 해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Kelly). (2) 혹자는 사본상의 변화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Hort). (3) 혹자는 베드로가 신약성경의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인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ichael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토레마 퀴리우'에 나타난 속격은 이사야의 말씀처럼 '주격적인 속격'으로 예수의 말씀과 동일하기 때문이다(막 13:31; 눅 21:33, Michaels). 여하튼 베드로는 이러한 구약성경의 인용을 통해서 주께서 전한 말씀인 복음이 영원토록 변치않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됨을 진술하고있다(Selwyn).
베드로 전서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그러므로...버리고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혤라어 '운'(*)은 결과를 유도하는 접속사로 본절이 1:23-25의 결론임을 시사한다. 본절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난 자가 취하여야 할 행동들을 나타낸다. 한편 '버리고'는 2절의 '사모하라'와 대조되어 믿음으로 갓 태어난 자들이 성숙한 삶을 위해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생활 태도를 제시한다(슥 3:3,4; 엡 4:22,23; 골 3:8,10; 약 1:21).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버려야 할 악덕들을 '모든'을 사용하여 세 범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있다.
모든 악독(*, 파산 카키안) -
이것은 단순한 '악의'와는 다른 것으로 남을 해하려는 무자비한 모든 악들을 의미한다(행 8:22; 롬 1:18; 엡4:31; 골 3:8, Michaels, Lightfoot, Selwyn, Stibbs, Lenski).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 판타 돌론 카이 휘포크리세이스 카이 프도누스) -
'궤휼'의 헬라어 '돌론'(*)은 '미끼로 끌어들이다'라는 의미의 '델로'(*)에서 유래한 단어로 3절의 '순전'과 반대되는 '속임'을 의미하며, '외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크리세이스'(*)는 '아래'를 의미하는 전치사 '휘포'(*)와 '심판'을 나타내는 '크리시스'(*)의 합성어로 겉과 속이 다르게 판단하는 죄를 가리킨다. 또한 '시기'는 자기 우월감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타인이 잘 되는 것을 방해(妨害)하는 죄악을 의미한다.
모든 비방하는 말(*, 파사스카탈랄리아스) -
본문은 복수로 표현되어 남을 향해 무고히 '중상 모략'하거나, 악담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죄악은 악의에 찬 마음에서 비롯된다(12절; 롬 1:30; 고후 12:20).
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본절은 부정적인 금지 명령을 한 앞절과는 달리 긍정적인 명령문으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것을 제시한다.
갓난 아이들같이 -
'갓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겐네타'(*)는 '아르티'(*, '방금')와 '겐나오'(*, '되다', '나다')의 합성어로 방금 태어난 상태를 묘사해 준다(Lenski, Robertson). 그리고 '아이들'(*, 브레페)은 문자적로 '아직 출생하지 않은 아이'를 의미하지만(눅 1:41,44) 본문에서는 '네피오이'(*, '유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눅 2:12). 이 '갓난 아이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자에 대한 비유로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간절히 찾듯이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다(마 18:3; 막 10:14,15).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
'순전하고'의 헬라어 '아돌론'(*)은 부정접두어 '아'(*)와 '유인하다'라는 의미의 '돌로스'(*)의합성어로 '궤휼'(1절)과 반대되는 거짓이 없는 순수함을 의미한다. 한편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콘'(*)은 '말씀', '이성', '교리' 등으로 해석되는 '로고스'(*)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말씀의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V, Calvin,Bigg, Caffin, Bengel, Keil, Lenski). (2) 혹자는 '사리에 맞는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RSV, Vincent, Hort). 두가지 해석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로 앞장에서도 '말씀'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1:23-35) 본절 후반부에서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하고 신령한 젖'은 가감이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한편 '사모하라'의 헬라어 '에피포데사테'(*)는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상태를 나타낸다(빌 2:26). 베드로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이 성장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말씀을 갈망해야 함을 강조한다(시 119:20, Michaels, Blum,Calvin).
이는 이로 맡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말씀의 젓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단회적 사건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성장하는 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야 하는 과제이다. 성장하고 성숙해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가능해진다(히 5:11-14). 본문의 '구원'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화의 완성(完成)을 시사한다. 이런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계속적인 성장으로 나타내 보여야 할 미래의 목표이기도 하다(1:5,9; 고전 3:1-4, Stibbs, Caffin).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리라 -
본절은 시 34:8의 인용으로 '에이'(*, '만약')로 시작되는 조건문이다. '인자하심을 맛본다'라는 것은 마치 갓난 아이가 젖의 맛을 알게 되는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기 위해 말씀을 더욱 사모하여 그 능력 안에서 성숙해 가야 한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
저자는 본문에서 '버린'과 '택하심을 입은'을 대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배척당한 진정한 메시야임을 드러낸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는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여야 할자칭 건축자들인 유대인들이 오히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가리킨다(막 8:31; 눅 9:22; 행 4:11). 예수께서는 비록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을지라도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았다. '택하심을 입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크톤'(*)은 '인정받다'라는 의미를 가진 '도키몬'(*)에서 파생된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는 존귀함을 받았음을 시사한다(행 2:22-24).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
'보배로운'의 헬라어 '엔티몬'(*)은 문자적으로 '존경을 받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영광을 가리킨다(1:19; 눅 7:2; 14:8; 빌 2:29).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순종으로 인해 배척 당하셨으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교회의 영원한 기초가 되게 하셨다. '산돌'은 실제로 유대인들 사이에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의 머릿돌'(마 21:42), '생명수의 반석'(고전 10:4), '기초석'(고전 3:11), '심판의 돌'(단 2:34)로 비유되었다(Blum, Stibbs, Leighton, Selwyn). 이러한 비유와 마찬가지로 메시야이신 예수를 비유하는 '산 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한 사실이며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교회의 초석이 되심을 시사한다. 한편 '나아와'의 헬라어 '프로스 혼 프로세르코메노이'(*)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인이 예수께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서 한 번만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끈임없이 나아와야 함을 강조한다(Robertson, Lenski, Caffin).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반석에서 물을 마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는 언제든지 그로 말미암아 신령한 물을 마실 수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전 10:4,Hort, Bigg, Reicke). 본절은 예수께서 비록 사람에게는 버림받았을지라도 메시야로서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의 구원의 반석이 되심을 시사한다.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너희도 산 돌같이 -
베드로는 앞절에서 그리스도를 산 돌에 비유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산돌을 그리스도인들에 비유하고 있다. '산 돌'에 해당하는 헬라어 '리도이 존테스'(*)는 복수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산돌이 되며 생명의 근원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야 할 존재임을 시사한다(Lenski, Leighton, Robertson).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
'신령한 집'은 저자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을 제사직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아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한다(시 69:9;사 56:7; 막 11:17, Blum). 한편 '세워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스데'(*)는 예수께서 직접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실때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단지 교회에 나아올 때 그리스도인이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 돌이 되며 거듭난 자들과의 연합을 통해 교회를 이루게 됨을 강조한다(롬 12:1;15:16; 고전 3:16: 엡 2:21-22; 3:6, Alford, Vincent, Stibbs, Leighton, Selwyn,Mi-chaels).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에 비유하고 있다. '제사장'의 헬라어 '히에라튜마'(*)는 '제사장의 직분'이나 '제사장의 단체'를 의미한다(눅 1:8, Hort, Meyer).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가진 산 돌이라는 사실에서 진일보하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사직을 수행하는 제사장이 되었음(만인 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제사장적 역할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Blum, caffin, Alford, Selwyn, Reicke). 실제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이어야 했던 것을(출 19:6) 이루지 못했으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교회가 그 이상(理想)을 실현했으며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그 직무를 감당하게 되었다(롬 12:1;빌2:17; 히 13:15; 계 1:6; 5:10; 20:6, Lightfoot, Calvin, Stibbs).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경에 기록하였으되 -
베드로는 앞서 진술한 자신의 가르침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증명한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티 페리에케이 엔 그라페'(*)는 문자적으로 '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라는 뜻으로 이제까지 논증한 진술 곧 그리스도께서 산 돌이신 것과 그에게 나아가는 자도 누구든지 산 돌인 것이 성경 안에 이미 확증(確證)된 사실임을 시사한다(사 28:16; 롬9:33).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
본절은 사 28:16의 인용이다. 모퉁이 돌'에 해당하는 '아크로고니아이온'(*)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현관의 돌이라고 주장한다(Jeremias). (2)혹자는 건축물의 현관이나 기초를 닦는데 필요한 돌이라고 주장한다(Grant). (3) 혹자는 건축물의 벽과 벽 사이를 잇는 건물의 기초요 중심되는 돌이라고 주장한다(Lloyd,Calvin, Stibbs). '아크로고니아이온'이 '가장 높은'이란 의미를 가진 '아크로스'(*)와 유대인의 건축 양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요 중심인 '모퉁이 돌'을 의미하는 '고니아이오스'(*)의 합성어인 것으로 보아 세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이것은 '모퉁이 돌'이 벽과 벽을 연결하여 건축물을 지탱하는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퉁이 돌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도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셔서 교회를 이루심을 시사한다(엡 2:20, Blum,Stibbs, Michaels). 한편 '시온에 두노니'는 요긴한 모퉁이 돌로서의 그리스도의 독특한 위치가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확정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두노니'의 헬라어'티데미'(*)가 본절에서는 현재 능동태로 사용되고 8절에서는 부정과거수동태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의 역할이 이미 확정되었으며 지금도 수행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지위가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하며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된다(8절; 마 21:42,44; 롬 9:33).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피스튜온에프 아우토 우 메 카타이스퀸데'(*)는 문자적으로 '저를 믿는 자는 다급한 일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의미로 두려움과 공포로 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서게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는 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현재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Bengel). (2) 혹자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Mey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베드로는 본문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비교하여 각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어떤 가치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Wiesinger, Caffin).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
'보배이나'의 헬라어 '헤 티메'(*)에서 관사 '헤'는 강조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는 자신과 연합한 그리스도인에게 크나큰 영광이요 보배가 되심을 시사한다(Blum). 한편 베드로는 믿지 않는 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지니는 가치에 대해 두 가지 인용문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1)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
본문은 시 118:22의 인용이다. '버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도키마산'(*)은 문자적으로 '거절당한'이란 의미로(고전 9:27,RV) 그리스도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거부당하신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었을 뿐만 아니라(시 118:22) 예수께서도 친히 그 예언을 확인하셨다(마 21:42;눅 20:17,18).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버렸으나 하나님은 배척당한 예수를 영광의 자리로 높이셨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는 사 28:16을 반영하는 것으로(6절 주석참조; 마 21:42; 막 12:10; 눅 20:17; 행 4:11)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심을 시사한다(Blum).
(2)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
본문은 사 8:14의 인용이다. '부딪히는 돌'은 길가에 있는 불필요한 돌들처럼 보행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방해물을 암시하며 '거치는 반석'은 덫이나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나 덫이 되며 심판의 돌이 된다(Origen, Caffin, Delitzch, Selwyn, Stibbs). 그러나 그리스도 자체가 장애물이나 덫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믿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불신앙함으로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덫이나 장애물'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이다(Beare, Blum).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본문 역시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진술이다.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의 헬라어 '프로스코프투신 토 로고 아페이둔테스'(*)는 문자적으로 '순종치 않아 말씀에 넘어진'이라는 의미로 믿지 않는 자들이 넘어지는 원인이 순종치 않는 불신앙에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에서 '이렇게'는 '넘어지나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문은 믿지 않는 자들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 예정되었음을 시사한다(Blum, Hort, Bigg, Caffin,Beare).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본절에서 7, 8절과는 달리 믿는 자들의 신분적인 특권에 대해 네 가지로 언급한다((Caffin, Calvin).
택하신 족속이요 -
본문은 사 43:20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신분을 시사한다. '족속'의 헬라어 '게노스'(*)는 '혈통' 혹은 '출생'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혈통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었다고 자랑하나 진정한 택함을 받은 족속은 혈통이나 민족의 차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의 연합을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영적 이스라엘'을 나타낸다(1:23; 신7:6-7; 사 44:1-2, Robertson, Blum, Selwyn).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본문은 출19:6의 인용으로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혹자는 '왕정의 제사장' 곧 왕에게 속하여 왕을 섬기는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ngel, Stibbs). (2) 혹자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롬 5:17,Clement, Bigg, Stibbs, Blim).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그리스도인은 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서 만국 통치하며,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자이다.
거룩한 나라요 -
본문 또한 출 19:6이 인용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현재 직책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거룩한'은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린 것을 나타내는 말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선별하신 존재들임을 시사한다(blum, Stibbs).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
본문 출 19:5; 사 43:21; 말 3:17의 인용이다. '소유된'의 헬라어 '페리포이에신'(*)은 특별한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된 것을 나타낸다(행 20:28; 엡 1:7; 살전 5:10, Robertson, Stibbs).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사셔서 그의 자녀로 삼으신 언약의 백성이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위의 네 가지 신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하신 이유이다.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과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이전에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신' 사실을(롬 8:29,30; 엡 1:4) 시사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구원하여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신분을 부여하신 목적은 덕을 전하게 하는 것이다. '덕'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스 아레타스'(*)는 '찬미', 혹은 '탁월함'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만이 갖는 온갖 종류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을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실제적 행동들을 시사한다(stibbs, Calvin).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과 역사를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본문에서 베드로는 호 1:6,9,10; 2:23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상태와 그리스도인이 된 후의 상태를 비교한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후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롬 9:25,26, Bengel).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삼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부르셨음을 암시한다(Caffin).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얻지 못하였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엘래에메노이'(*)에서 '엘레에메노이'는 '엘레에오'(*, '불쌍히 여기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방인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 못했음을 암시한다(Stibbs, Robertson, Caffin). 이와는 반대로 '얻은'의 헬라어 '엘레에덴테스'(*)는 사건이 종결되었음을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로 하나님의 긍휼을 오랫동안 얻지 못하던 이전의 상태에서 단회적인 회개 사건으로 구원을 받았음을시사한다(Hort, Michaels, Stibbs).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했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 복종하던 종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 빛 가운데 있어 구원받은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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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속성:
진리, 부활, 복음, 정결,
사랑/인자하심, 말씀,
위로, 영광, 영원, 약속,
구원, 변치 않는, 소망,
믿음, 순전, 심판,
신령한, 순수, 능력,
존귀, 높이시는, 기초,
생명, 반석, 메시야,
근원, 교회, 제사, 세우심,
확증, 견고한, 보호, 가치,
보배, 예정하시는, 신분,
거듭남(그리스도 안에서
그와의 연합을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왕, 통치, 언약,
긍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 기억, 성장/성숙,
간절함/갈망, 경험,
나아오기, 그리스도와
연합/하나가 되어야,
제사장적 역할, 섬김,
예배, 구별된, 희생,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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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 닮아가기.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단회적
사건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성장하는 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야 하는
과제이다.
성장하고 성숙해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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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합당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명령하신 뜻을 따르는 신실한 믿음의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N3epUl6Z8w
주님의 비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시편 25:14)
무엇이 진정한 친구라는 표시입니까? 비밀스러운 슬픔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비밀스러운 기쁨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슬픔을 고백할지 모르나 진정한 친밀함은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분의 기쁨을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쉬지 않고 주님께 자신의 비밀만을 말하느라고 주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초기에는 우리는 하나님께 부탁만 합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사귐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목적을 향하여 우리를 이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본질을 알고 그 본질에 따라 기도합니까?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마 6:10) 이 정신에 붙들릴 때 하나님의 비밀을 붙잡게 됩니다. 하나님께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베푸신 많은 위대한 축복들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실 작은 축복 속에서 얼마든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 각 개인의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주님과 더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주께서 정하신 길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25:12) 처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식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계속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다 보면 하나님을 풍성하게 의식하게 되면서 우리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즉 다른 뜻을 선택하고 싶은 생각이 우리에게 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얻고 정결하여진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 원치 않는 것을 선택하려 할 경우는 주님께서 막으실 것입니다. 이때 주의하십시오. 만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의심이 생긴다면 당장 결정을 멈추십시오. “왜 안된다는 것이지?”라고 하며 절대로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주장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을 지도하실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우리의 상식마저 인도하셔서 더 이상 다음과 같은 되풀이 되는 질문으로 성령을 거스르지 않게 할 것입니다. “주님. 정말로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역자 주 - 주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계속 하나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주님의 비밀 – The Secret of the Lord
https://m.cafe.daum.net/mercyreformedchurch/ULF8/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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