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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마가복음 15 : 1~15🌿살인자보다 멸시받는 만왕의 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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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마가복음 15 : 1~15🌿살인자보다 멸시받는 만왕의 왕

credo15229850 2024. 2. 18. 06:36

https://tripol.tistory.com/1093

 

헬라어 마가복음 15장 전체 원어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카이 유뒤스 프로이 쉼불리온 포이에산테스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메타 톤 프레스뷔테론 카이 그람마테온 카이 홀론 토 쉬네드리온 데산테스 톤 예순 아페넹칸 카이 파레도칸 필라토 개역개정,1

tripol.tistory.com

 

마가복음 15: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새벽;- (날이 밝아 오자) 대제사장의 인도에 따라

예수님을 정죄하고

(로마의 판결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로마 법정으로 끌고 갔다.

산세드린 공회;-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나

사형 집행은 직접 할 수x 

판결 받은 죄수->로마 정부->사형 선고 받음-> 형 집행

로마 정부;-

공회의 사형 판결을 재가/기각할 수도..

 

 

15:1하

 

산헤드린;-

예수님을 결박->가야바의 집->헤록 궁궐

사형 판결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빌라도(총독);-

주후 26~36년 유대를 통치

유대인을 멸시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빌라도;-

로마 정부를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

산헤드린이 내린 사형 선고 확정 대신, 

빌라도는 이 사건을 상세히 듣고 싶었다.

예수님이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빌라도에게 여겨졌을 것

 

 

 

 

3. 대제사장들이 여러가지로 고소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로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님의 답변으로 볼 때

사형 선고의 근거가 없다 생각한 빌라도는

다른 정보를 더 얻기 위해

예수님을 고소한 사람에게로..

대제사장들;- 

예수님을 고소할 전략과 근거를

더 많이 찾아 놓고 있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빌라도;-

귀찮은 재판을 피하기 위해

(그 때 예루살렘에 와 있던 갈릴리의 영주) 

헤롯 안티파스에게 예수님을 보냈다.

헤롯은 그를 곧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는데

오직 누가만이 중간에 있었던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6.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유월절이 되면 해마다 백성들이

환심을 얻기 위한 수단;-

 백성들이 선택하는 죄수 한 명을

석방시켜 주는 관습

빌라도;-

 백성들이 예수님의 석방을

요청하리라 예상하고, 

예수님을 풀어 주는 대신

유월절 사면 관례를 이용해

예수님을 놓아주려 하였다.

 

 

 

 

 

 

 

7.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바라바;0

 민중 선동가, 강도, 살인자

아마 로마에 대해 혁명을 일으킨

(민족주의자) 열심당의 일원

지금 체포되어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많은 무리들;-

재판 장소 앞으로 몰려들었다.

관례대로 죄수 한 명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6절 참조)

아마 그 중 상당수가 바라바의 추종자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충동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13.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군중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했던.. 

그리하여 빌라도는 마침내

십자가 형을 선언하게 되었다.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빌라도;-

 군중의 요구에 이끌려

정의보다는 정치적인 이익을 선택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남자;-

 처형되기 전에 잔혹한 매질을

먼저 당하는 것이 당시 로마의 관례

 죄수;-

 벌거 벗기워지고

때로는 나무에 묶인 채로

날카로운 금속이나 뼈 조각을 박은

짧은 가죽 채찍을 든 로마 병사들에게

사정없이 등에 매질을 당하여야 했다.

 

 

 

🟠살인자보다 멸시받는 만왕의 왕
🔴마가복음 15 : 1~15
🟢
새벽
산헤드린 공회의 고소 
(무리의 만족을 택한)빌라도 
왕이신 예수님의 침묵
죄수1 사면 관례
(민란/살인)바라바
무리들이 원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
왕( 👑)이신 하나님
히브리서 1장
의와 평화의 👑
히브리서 7장
 👑들의  👑
계 19:16
🔵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를 때가 많다.
사람은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기 쉽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나의 생각을 
고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당근과 채찍이 있다. 가끔 이웃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언을 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오랜시간 쟁여놨다가 때가 되면 말하게 
되는 것 같다. 사실 내가 주는 충고는 곧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조언도 내가 잘 지키고 있는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눌 수 있게 됨을 본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더 많이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있어서 당근이기도 하고
채찍이기도 한 깊은 지혜와 신비가 담긴
흥미롭고 때로는 슬프기도 한 나의 생각과 모든 
차원을 뛰어넘는 생명의 양식이다.🩸✝
🌱🌿🌳
죄는 무엇일까? 악은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주님을 대적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
그래서 늘 깨어 경계해야 한다. 사단에게 틈을 
주면 안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싶은 마음이 있다.
선하신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신다. (마 5:38-48)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완전해지기를 소망합니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19015

 

 

당당뉴스

불의를 끝장내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폭력에 관한 가르침을 단순히 실천할 수 없는 이상주의라고 치부해버린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다른 쪽

www.dangdangnews.com

불의를 끝장내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폭력에 관한 가르침을 단순히 실천할 수 없는 이상주의라고 치부해버린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수동적이며 현관의 발 닦개(doormat)처럼 남들에게 무조건 짓밟힐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되어, 많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불의 앞에서 겁쟁이가 되고 불의를 방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 역시 악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꺾어버리고 굴종하도록 권고하는 말씀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10리를 가라”를 말씀 역시 구조적 변화를 도모하기보다는 “친절을 베풀라“는 상투어가 되어, 억압하는 자들과 협력할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런 식으로는 결코 행동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오해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살지도 않았으며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본래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역사상 이제까지의 어떤 발언보다도 가장 혁명적인 정치적 선언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할 수 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태복음 5:38-41 표준새번역 개정판)

제임스 왕(King James, 최초로 영어번역 성경 흠정역을 만든 영국의 왕 - 역자주)이 고용한 궁중 번역자들이 ‘안티스테나이’(antistēnai)를 “Resist not evil,” 즉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로 번역했을 때, 그들은 단순히 그리스어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 이상의 무엇인가를 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비폭력 저항(nonviolent resistance)을 온순함으로 번역해 놓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억압받는 청중들에게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목회 전체가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과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한글개역에는 “대적한다,” 공동번역에는 “앙갚음한다,” 표준새번역에는 “맞선다”로 번역된 단어 - 역자주)는 두 부분, 즉 ‘안티’(anti)와 ‘히스테미’(histèmi)로 이루어진 단어로서, ‘안티‘ 는 ‘~에 맞서서‘라는 뜻(영어로 against)이며, ’히스테미‘ 는 명사형(stasis)의 동사로서 폭력적인 반란, 무장 봉기, 첨예한 대결을 뜻한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에서 ’안티스테나이‘ (antistènai)는 주로(71회 가운데 44회) 군사적 충돌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두 군대가 맞부딪쳐 한쪽이 패배하여 도망할 때까지 칼싸움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단어가 바라바에 대한 설명, 즉 “반란을 일으키다가 사람을 죽인”(마가복음 15:7: 누가복음 23:19, 25) 부분에서 나오며, 에베소 사람들에 대한 설명, 즉 “소요죄로 몰릴 위험”(사도행전 19:40)이 있다는 대목에서 나온다. 이처럼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인명살상의 가능성이 있는 소요사태나 무장혁명을 가리킨다.6)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적절한 번역은 “악에 대해(혹은, 너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맞받아 치지 말아라,” 혹은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보복하지 말아라”일 것이다. 학자역본(Scholars Version, 최근에 예수 세미나의 학자들이 번역한 영역 복음서 - 역자주)은 “악한 자에게 맞서서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아라”(Don't react violently against the one who is evil)라고 탁월하게 번역했다. 즉 예수님은 악에 대해 반(反)로마 투사들 못지 않게 대항했다는 말이다. 단지 차이점은 악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에 관한 것이었을 뿐이다.

악에 대한 일반적 대응 방법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수동적 태도, (2) 폭력적인 대항, 그리고 (3) 예수님이 분명히 가르친 제3의 길, 즉 전투적인 비폭력(militant nonviolence)이다. 이 셋 가운데 인간은 진화론적으로 처음 두 가지 대응수단, 즉 도피(flight)와 싸움(fight) 두 가지만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싸우자!”는 예수님이 말씀하기 20년 전에 로마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갈릴리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예수님과 그의 청중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수 천명의 동족들의 모습을 길가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고작 3 마일 떨어진 도시 셉포리스의 주민들 가운데 그 반란군이 무기고를 습격하는 것을 도왔다는 이유로 노예로 팔려간 주민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청중들 가운데 일부는 살아 생전에 인류 역사상 가장 소름끼치는 참상들 가운데 하나였던 반로마 전쟁(기원후 66-70년)을 체험했을 것이다.

만일 “싸움”이 그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면, 다른 대안은 “도피” 뿐이었다. 즉 수동적인 태도, 굴복하거나, 혹은 기껏해야, 소극적인 공격으로서 명령에 복종은 하지만 잘 따르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태도일 따름이다. 그들에게 제3의 길은 없었다. 억압에 대한 그들의 선택은 굴복하거나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는 것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왜 제임스 왕의 충실한 학자들이 ‘안티스테나이’를 “resist not,” 즉 “저항하지 말라”로 번역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제임스 왕은 사람들이 그를 비롯한 군주들의 부당한 정책들에 맞설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단지 두 가지 선택, 즉 도피하거나 싸우는 길만이 있다고 믿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우리는 저항하지 않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밖에는 선택할 수 없다는 식이다. 그리고 제임스 왕의 번역자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군주들의 절대권력을 인정하신 것처럼 보인다. 즉 굴복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 번역자들 역시 온순하게 이런 번역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선택 가운데 어느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다. 여기서 우리가 매우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악에 대한 대응 방법으로서 수동적인 태도와 폭력 모두를 몹시 싫어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 번째 길로서, 이 두 가지 선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안티스테나이’는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예수님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간단한 사례를 들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왜 오른쪽 뺨인가?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오른쪽 뺨을 치는가? 한번 시험해 보라. 당시 오른손을 쓰던 세상에서 오른손 주먹으로 상대방을 치면 그 상대방은 왼쪽 뺨을 맞게 된다. 주먹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치기 위해서는 왼손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왼손을 불결한 일을 위해서만 사용했다. 쿰란 공동체(메시아를 기다리며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한 집단 - 역자주)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했을 경우 공동체에서 쫓겨나 10일 동안 참회하는 벌을 받았다(󰡔사해사본󰡕, 1QS 7).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른손 손등으로 치는 방법이다. 이것은 주먹다짐이 아니라, 창피를 주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즉 그 의도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욕을 주기 위함이며, 그 “꼬락서니”를 제대로 알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당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같은 신분의 사람을 손등으로 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만일 그랬다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같은 신분의 사람을 주먹으로 치면 벌금이 4전이었던 반면에, 손등으로 치면 400전이었다. 그러나 하급자들을 손등으로 칠 경우에는 벌금이 없었다. 󰡔미슈나󰡕, Baba Qamma 8:1-6).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하급자들을 훈계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 주인은 종들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녀를, 남자는 여자를, 로마인은 유대인들을 손등으로 때렸다. 이것들은 불평등한 관계들로서, 각각의 경우 보복을 한다는 것은 자살과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한 대응 방법은 움츠려 굴복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청중들이 누구였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경우에서 예수님의 청중들은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고소하거나, 강제노동을 부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피해자들이었다(“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너를 걸어 고소하여 ...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그의 청중들 가운데는 이처럼 신분, 종족, 성별, 나이, 지위 등의 위계적 질서와 로마제국의 점령으로 인해, 그들이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밖에 없으며, 비인간적 대우에 대한 분노를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처럼 이미 치욕을 당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왜 왼뺨을 돌려대라고 가르치시는가? 왜냐하면 왼뺨을 돌려대는 행동은 그 압제자에게서 모욕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좋다. (오른손 주먹으로) 다시 때려 봐라. 네가 처음 때린 것은 네가 의도했던 효과를 얻지 못했다. 나는 네가 나를 모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나는 너와 똑같은 인간이다. 너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너는 나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그 때린 사람은 몹시 난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순전히 논리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는 이제 더 이상 손등으로 칠 수가 없다. 이미 아무런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왼손으로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가 (오른손) 주먹으로 친다면 그는 스스로 상대방을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처럼 손등으로 치는 것의 요점은 신분계급 제도를 강화시키고 불평등을 제도화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왼뺨을 돌래댄 사람을) 매질하도록 명령한다 해도, 그의 주장은 이제 취소할 수 없게 되었다. 즉 그 억압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이 하급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도록 된 것이다. 이 강자는 약자를 비인간화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긴 것이다. 이런 대응 방법은 수동성과 비겁함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도전하는 행동이다.


“누가 너를 고소하여 네 겉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두 번째 사례는 법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 사람이 겉옷 때문에 고소를 당했다.7) 누가 그런 고소를 하며 어떤 상황에서 고소하는가? 구약성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당신들은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 줄 때에, 담보물을 잡으려고 그의 집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바깥에 서 있고, 당신들에게서 꾸는 이웃이 담보물을 가지고 당신들에게로 나아오게 하십시오. 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면, 당신들은 그의 담보물을 당신들의 집에 잡아 둔 채 잠자리에 들면 안 됩니다.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담보로 잡혔던 그 겉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 것이며, 당신들에게 복을 빌어 줄 것입니다... 과부의 옷을 저당잡아서는 안 됩니다.(신명기 24:10-13, 17)

가장 가난한 사람들, 즉 극빈자들은 겉옷 이외에는 담보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유대 율법은 해질 무렵에 그 담보물을 되돌려줄 것을 엄격하게 요구하였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덮고 잘 수 있는 것이 겉옷뿐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런 상황은 그의 청중들 모두가 매우 익숙했을 상황이었다. 즉 가난한 채무자는 더욱 가난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어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그의 채권자는 법적인 수단을 통해 그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그를 법정으로 끌고 갔던 것이다.

부채(負債)는 1세기 팔레스타인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예수님의 비유들에는 채무자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무능한 사람들에게 덮치는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이것은 로마제국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즉 로마 황제들은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자들로부터 무자비하게 세금을 걷었다. 그러자 부자들은 자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비유동성 투자방법을 물색했다. 토지가 최고였지만 문제가 있었다. 즉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토지를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아 자손들에게 상속하는 방식이었다. 적어도 팔레스타인에서는 토지를 파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돈과 곡식 등의 채무에 대해 - 역자주) 엄청난 이자를 매겨, 토지 소유자를 더욱 큰 부채 속으로 몰아넣어, 마침내는 그들의 토지를 팔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 이미 이 과정이 상당히 진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규모 농장(latifundia)들을 부재지주(不在地主)들이 소유하고, 그 관리는 청지기에게 맡기고, 일은 종들과 소작인, 품꾼들이 했다. 기원후 66년 유대 혁명가들의 첫 번째 행동이 성전 금고, 즉 부채문서가 보존되어 있던 성전 금고를 불태운 일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 청중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누가 너를 걸어 고소하여”). 그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토지, 살림살이, 그리고 심지어는 겉옷까지 빼앗아 가는 그 체제를 죽이도록 미워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에게 속옷까지 넘겨주라고 가르치시는가? 속옷까지 벗어서 넘겨주게 되면, 그들은 완전히 벌거벗은 채 법정을 나서게 된다는 말이다. 당신이 그 채무자의 입장이 되어, 이 말씀대로 했을 경우 벌어질 우스운 꼴을 상상해 보라. 그 채권자는 한 손에 당신의 겉옷을 들고, 다른 손에는 엉겁결에 당신의 속옷을 받아든 채, 당황해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서 있을 것이다. 당신은 갑자기 그 공을 상대방에게 넘긴 것이다. 당신은 그 재판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법은 완전히 채권자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당신은 모욕당하는 것은 거부했으며, 동시에 그처럼 높은 이자를 받는 체제에 대해 정식으로 맞서서 항의를 표시했다. 당신은 결국 이렇게 말한 셈이다. “네가 내 옷을 갖고 싶다고? 좋다.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가라. 너는 이제 내 몸 이외에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갔다. 다음에 네가 가져갈 것이 내 몸이냐?”

유대교에서는 벌거벗는 것이 금기(taboo)였으며, 그 수치는 벌거벗은 사람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를 벌거벗게 만든 사람, 혹은 그 벌거벗은 몸을 본 사람에게 돌아갔다(창세기 9:20-27). 즉 당신이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으면, 당신은 그 채권자로 하여금 가나안이 저주받게 된 똑같은 금지조항을 어기도록 만든 것이 된다. 그리고 당신이 벌거벗은 채로 길거리를 행진하면, 당신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아연실색하여 그 이유를 묻게 된다. 당신이 그 이유를 설명하면 그들도 당신의 행진에 가담하여, 오늘날 개선 퍼레이드 비슷하게 된다. 이로써 채무자들을 억압하는 체제 전체가 공개적으로 폭로된다. 즉 그 채권자가 “존경할만한” 대부업자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한 계급 전체를 무산자와 극빈자로 떨어뜨리는 장본인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폭로는 단순히 그 채권자에게 벌을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이런 폭로를 통해 그 채권자로 하여금 아마도 그의 생전에 처음으로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를 직시하도록 만들어,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가난한 사람은 불의에 협조하기보다는, 법을 이용하여 그 착취적인 법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과적으로 어릿광대 짓을 후원하고 있다. 그러는 중에 그는 유대교의 유서 깊은 전통을 지키고 있다. 탈무드의 후대 말씀처럼, “만일 네 이웃이 너를 나귀라고 부르면, 네 등에 안장을 올려놓아라.”8)

권세는 문자적으로 뽐내고 있다. 그 권세를 무력하게 만드는 데 재치 있는 풍자보다 빠른 것은 없다. 그들의 힘에 놀라기를 거부함으로써 약자들은 비록 구조적 변화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대담하게 주도권(initiative)을 잡을 수 있다. 이 메시지는 이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완전한 충고가 아니라,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넣어주기(empower) 위한 실제적이며 전술적인 조치이다. 이것은 체제 전체를 어떻게 다룰 때 그 잔인성을 폭로할 수 있을 것이며, 정의와 법과 질서를 가장하는 그 체제를 하나의 사람 웃기는 노릇으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준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더 이상 부자들이 쥐어짤 수 있는 핫바지가 아니다. 즉 그는 현행법을 받아들이고, 그 부조리가 드러날 때까지 법대로 하자고 밀고 나가, 그 현행법들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부자들에게 드러낸다. 그는 벌거벗은 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걸어나감으로써, 채권자와 그 경제구조 전체를 완전히 적나라하게 벌거벗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apartheid) 정권 시절에, 당국자들은 오랫동안 어떤 한 빈민촌을 없애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하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러 나간 후에 군인들이 도착했다. 군인들은 남아있던 몇몇 여자들에게 5분 이내로 물건을 챙겨 떠나면 불도저가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여자들은 아마도 그 군인들 대다수가 점잔빼는 농촌 출신이란 점을 알아챘는지, 불도저 앞에서 자기들의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결국 군인들은 물러나고 말았다.

남아프리카의 변절한 민족주의 사업가 요한 스탠더가 1986년 4월 인종차별 정권에 반대 시위를 하던 도중 포트 엘리자베쓰 시청 앞에서 하의를 벗어던진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충분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을까?9)


“누가 너더러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거든”

예수님의 세 번째 사례는 10리를 가는 것에 관한 것으로서, 이것은 로마 군인들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부과할 수 있는 강제노역을 제한시키는 매우 용의주도한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전쟁이나 반란 시기를 제외하고는 로마의 군단 병력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는 군인들은 유대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던 외인부대로서, 로마의 군단 소속 군인들보다 봉급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초라한 군인이었을 것이다. 갈릴리에는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의 군대 편제를 따른 부대를 갖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들 역시 강제노역을 부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요 도로 상에는 정기적으로 거리 표지가 놓여 있었다. 따라서 군인은 민간인에게 자기의 배낭(30~38Kg)을 꼭 5리만 지고 가게 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을 지고 가게 할 경우에는 군법에 따라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로마제국은 점령지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지 않도록 했으며, 동시에 군인들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강제노역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심지어 약속의 땅에서조차 예속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쓰라린 현실이었다.

이처럼 자존심이 강하지만 예속된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반란을 권고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군인들을 “돕는 척” 하다가 길옆으로 데리고 가서 칼로 찌르지 않았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군대에 맞서서 무장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체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 만일 그런 말씀을 했다면 혁명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왜 10리를 걸어가라는 것인가? 10리를 걸어가면 그만큼 적을 도와주어 그들이 더욱 설치도록 만들지 않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서도 문제는 앞의 두 가지 사례와 마찬가지로,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며, 얼마동안은 변하지 않을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존엄성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강제노역의 규칙들은 로마 황제가 만든 것이지만, 그 규칙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로마 황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힘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거리 표지에 따라 5리를 간 다음에 그 군인이 할 수 없이 자기의 배낭을 돌려 받으려 할 때, 당신이 “아니오. 내가 5리를 더 지고 가겠소”라고 말하면 그 군인이 얼마나 놀라게 될 것인지를 상상해 보라. 왜 그러느냐?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냐? 그는 보통 당신의 동족에게 강압적으로 자기 배낭을 지고 가도록 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당신은 그 일을 기꺼이 하면서 또한 멈추지 않겠다고 하니 어찌된 영문인가! 지금 누구 약을 올리겠다는 것인가? 당신은 그의 체력을 얕잡아보고 그러는가? 아니면 좀더 친절을 베풀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지고 갈 거리보다 더욱 멀리 지고 감으로써, 그 군인을 혼내주려고 그러는가? 당신은 그 군인을 고소할 작정인가? 말썽을 일으키려는 수작인가?

(이렇게 함으로써) 비굴한 강제징발의 상황에서 당신은 또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선택할 능력을 되돌려 받은 것이다. 그 군인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당신의 반응 앞에서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는 예전에 이런 식의 문제를 다루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 당신은 그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밀어 부쳤는데, 그의 이제까지의 경험으로는 그 결정을 내릴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이다. 만일 그가 피정복민보다 우월하다고 느껴왔다면, 오늘은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보병이 유대인에게 “제발 내 배낭을 돌려주시오”라고 애걸하는 통쾌한 장면을 상상해 보라. 독실한 믿음을 가진 척하는 사람들은 이 장면의 해학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지만, 예수님의 청중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을 것인데, 그들은 자기들의 압제자들이 그처럼 쩔쩔매게 될 것을 예상하고 배꼽을 쥐고 웃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일부 독자들은 그 군인을 쩔쩔매게 만드는 것이나, (속옷까지 벗어줌으로써) 채권자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에 대해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억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 자신들의 행동 자체로 인해 당혹스럽게 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회개할 수 있는가? 물론 비폭력적 행동을 보복과 치욕감을 주기 위한 전술로 사용할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 정반대로, 예수님의 타협하지 않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잘 대해주는 것과 혼동하는 부드러움과 감상에 빠질 위험도 있다. 사랑으로 대결할 때, 억압당하는 사람을 양순함에서 해방시키며 동시에 압제자를 죄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비폭력적 행동이 비록 즉각적으로 압제자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폭력적 행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끼친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증거했듯이, 비폭력적 행동은 그들에게 새로운 자기 존경심을 갖게 하며, 자신들이 갖고 있는 줄 몰랐던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권고가 힘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한평생 주인들에게 굽실거리며 등을 긁어주던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역할이 열등하다고 내면적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작은 발걸음이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파출부들이 합심하여 거의 불가능한 발걸음을 시작한 것, 즉 자신들의 고용주들에 대해 그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에 견줄 만한 일이다.

이 세 가지 사례들은 “악한 자에 맞서서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것은 수만 년 동안 (사회적) 환경을 통해 생물학적 위협에 대해 무분별하고 맹목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우리들 몸 속에 배어 있는 두 가지 선택, 즉 도피냐 싸움이냐 대신에, 예수님은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이 새로운 길은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역사적인 돌연변이, 즉 적자생존의 원칙에 대한 반란으로 기록될 것이다.10) 예수님을 통해서 악을 악으로 맞서서 대항하지 않는 길이 열린 것이다.

월터 윙크, <예수와 비폭력 저항>(2003)에서

 

 

https://medium.com/@being4christ/2%EC%9B%9418%EC%9D%BC-%EC%A0%88%EB%A7%9D%EC%97%90-%EB%8C%80%ED%95%AD%ED%95%98%EB%8A%94-%EC%B2%AB%EA%B1%B8%EC%9D%8C-e56d771b8c0e

 

2월18일 절망에 대항하는 첫걸음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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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2월 18일

절망에 대항하는 첫걸음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26:46)

제자들은 깨어 있어야 할 때 깊은 잠이 들었고 나중에 이를 알게 되었을 때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미 저질러진 일로 인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느낌은 우리를 절망케 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다 끝났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소용없어.” 우리는 자신의 절망이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실 절망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엄청난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쉽게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자느냐. 그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구나. 네가 다시 바꿀 수 없는 것이로구나. 그러나 일어나라. 함께 다음 단계로 가자.” 과거로 하여금 잠이 들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 과거가 예수님의 품 안에서 잠들게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다가오는 미래로 들어가십시오.

 

우리는 누구나 절망의 경험이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쉽게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말로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어야 할 그때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친히 찾아오셔서 영적인 시발점을 허락하십니다. “일어나라. 다음 단계로 가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힘을 얻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주의 구속을 바탕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실패의식이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https://www.youtube.com/watch?v=bpq9aZMt0tw

 

 

 

 

 


성경말씀:

 

 

 

1옛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없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또 아들을 통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3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4그래서 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이름을 받으시고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분이 되셨습니다.

5하나님께서는 어느 천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시거나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6그러나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여라" 하셨습니다.

7또 천사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으시고 그의 종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라고 하셨습니다.

8그러나 아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주는 영원히 통치하시고 주의 나라를 정의의 지팡이로 다스리십니다.

9왕이 옳은 것을 사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였으므로 왕의 하나님은 왕에게 기쁨의 기름을 부어 다른 왕들보다 높이셨습니다."

10"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하늘도 주의 손으로 만드셨습니다.

11하늘과 땅은 없어질 것이나 주는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며 그것들은 옷처럼 낡아질 것입니다.

12주께서 그 모든 것을 옷처럼 말아 버리시면 그것들이 의복처럼 변할 것이나 주는 변함없이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13하나님께서 어느 천사에게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앞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14천사들은 모두 섬기는 영들이며 앞으로 구원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일꾼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 1장

 

1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왕들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아 축복해 주었습니다.

2아브라함도 모든 전리품의 10분의 1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멜기세덱의 이름을 번역하면 의의 왕이라는 뜻이고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3그는 부모도 족보도 없고 태어난 날과 죽은 날도 없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언제나 제사장으로 있는 자입니다.

4여러분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자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까지도 모든 전리품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의 10분의 1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5제사장 직분을 받은 레위 사람들은 같은 동족인 아브라함의 후손에게서 10분의 1을 받도록 율법에 규정하고 있습니다.

6그러나 멜기세덱은 레위 사람의 족보에 들지 않았는데도 아브라함에게서 10분의 1을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7일반적으로 축복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8제사장들도 10분의 1을 받았고 멜기세덱도 10분의 1을 받았으나 제사장들은 죽을 사람이고 멜기세덱은 성경이 증거한 대로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9그리고 십일조를 받았던 레위도 아브라함을 통해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바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이것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레위는 아직 태어나지 않고 자기 조상의 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1하나님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에 근거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 직무가 완전해질 수 있었다면 어째서 아론의 계통이 아닌 멜기세덱의 계통에서 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12제사장 직분이 변하면 율법도 반드시 변경되어야 합니다.

13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분은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 속해 있는데 그 지파에서는 하나도 제사장 일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14우리 주님은 분명히 유다 지파의 후손입니다. 모세는 이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15멜기세덱과 같은 다른 제사장이 나타난 것을 보니 우리가 말한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6그분은 인간의 법이나 규정에 따라 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능력으로 되신 것입니다.

17성경은 그분에 대하여 "너는 멜기세덱의 계열에 속한 영원한 제사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8옛 계명은 약하고 쓸모가 없어서 폐지되었습니다.

19율법은 아무것도 완전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좋은 희망을 갖게 되었고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20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약속 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약속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나

21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주께서 약속하셨으니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너는 멜기세덱의 계열에 속한 영원한 제사장이다."

22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더 좋은 계약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23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기 때문에 그 직무를 계속할 수 없어서 많은 제사장이 필요했습니다.

24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므로 그분의 제사장직도 영원합니다.

25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언제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재의 기도를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6이런 대제사장은 거룩하고 흠이 없고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죄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하늘에 계시므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27예수님은 다른 제사장들처럼 먼저 자기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고 나서 백성의 죄를 위해 제사드리는 일을 날마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바쳐서 단번에 그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28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지만 율법 후에 온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히브리서7장

 

16또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왕들의 왕, 주들의 주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한계시록 19:16

 

 

 

마태복음 5장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한 말을 듣지 않았느냐?

39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라.

40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주어라.

41누가 네게 억지로 오 리를 가자 하거든 십 리를 가 주어라.

42네게 요구하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말아라.

43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말씀을 듣지 않았느냐?

44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45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도리이다. 하나님은 해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 비를 똑같이 내려 주신다.

46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무원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