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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베드로후서 3 : 1~9🍑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심판을 늦추시는 사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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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3: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개역성경에는 '에데'(*, '이미')가 생략되어 있다. 이 단어는 본절의 '둘째편지'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서가 베드로전서가 쓰여진 후 얼마되지 않아서 기록되었음을 나타낸다.
사랑하는 자들아 -
본문은 베드로가 본서의 수신자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수신자에 대한 베드로의 깊은 사랑과 관심 그리고 친근감을 시사한다. 한편 보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페토이'(*)는 호격이다.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호격을 사용하여 부름으로(8,14,17절)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Green, Morris, Gibson).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
본서가 '둘째 편지'라고 한다면 '첫째 편지'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본서가 본래 앞부분과 본장이 분리된 편지여서 '첫째 편지'는 본서 1,2장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rotius, McNamara).(2) 혹자는 유다가 유다서와 본서를 썼으며,'첫째 편지'는 '유다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obinson, Smith). (3) 혹자는 '첫째 편지'는 잃어버린 서신이라고 주장한다(Spitta, Zahn, Green). (4) 혹자는 베드로전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igg, Blum,Bauckham). 이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본서 서론 참조).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
본문의 '진실한 마음'의 헬라어 '에일리크리네 디아노이안'(*)은 문자적으로 '순전한 생각' 혹은 '순수한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수신자들의 생각이 부도덕한 욕망에 의해서 왜곡되거나 타락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Bauckham). 한편 '일깨워 생각하게'라는 말은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빠지지 않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새롭게 일깨우는 것을 의미한다(유 1:5). 이것은 본서가 수신자들로 하여금 이단사설에 빠지지 않고 과거의 진실한 마음을 갖도록 일깨워 순결하게 하기위해 기록되었음을 시사한다.
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곧...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
'곧'은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는 부사가 아니라 본절이 1절의 연속임을 나타내주는 연결 부사로서 본절이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일깨우고자 하는 내용임을 나타낸다.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
'거룩한'은 거짓 교사들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부인한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1:19-21) 선지자들이 전하여 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Cranfield, Green). 또한 '예언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이레메논'(*)은 완료 수동태 분사로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이 영구한 것임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단회적으로 주신 완료된 예언의 말씀을 통해 지금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Mayor) 상기해서 이를 부인하는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대적하고 순수한 마음을 통해 지켜야 한다.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 -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의 헬라어 '톤 아포스톨론 휘몬 투 퀴리우카이 소테로스'(*)는 이중 소유격으로 '기원', '알림'을 나타내는 독특한 표현법이다(Mayor, Gibson, Morris). 이것은 '명하신 것'이 사도들에 의해 선포되었으나 주님에게서 나왔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롬 1:2;유1:17)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의 권위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기인한것임을 시사한다(Cranfield, Green, Bauckham). 따라서 본절은 구원의 진리를 예언한 선지자들과, 그것을 실제로 성취하신 그리스도와, 또 그것을 효과있게 해석하고 전파한 사도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Calvin). 한편 '너희 사도들'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당시 모든 사도들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속해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Schelkle, Kelly, Schrage). (2)혹자는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하여 준 사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tta, Zahn, Bauckham, Cranfield, Mayor,Fornberg).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준 사도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먼저 이것을 알지니 -
'알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테스'(*)는 독립 분사 구문으로 베드로가 가르치고 전파할 때 흔히 사용한 문자의 형식이다(1:20, Bigg). 베드로는 이와 같은 독립 분사 구문을 앞서 언급한 예언자와 사도들의 말씀과 관련하여 경고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행 20:29-31;딤전 4:1,Cranfield). 먼저 수신자들은 사도와 예언자들이 전하여 준 말씀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말세에'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다(Blum).
말세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프 에스카톤 톤헤메론'(*)은 문자적으로 '마지막 날들에'라는 의미이며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신약 시대를 가리킨다(벧전 1:5,20;유 1:18, Green, Blum). 이처럼 신약시대를 '말세'라고 표현한 것은 오순절 이후 세상의 심판 때 성취될 주의 재림을 기대함을 암시한다.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
'기롱하는 자들'은 미래의 종말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키며(2:2,3,10, 13-18,Blum) '기롱한다'는 하나님을 경멸하고 모독하는 교만한 언사를 나타낸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악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조롱하는 자들이다(Bauckham). 한편 '기롱하는 자들이...기롱하여'의 헬라어는 '엘류손타이...엠파이크타이'(*)로서 동사가 먼저 나오고 주어가 마지막에 놓여 있다. 본문의 이러한 구조는 기롱하는 자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을 시사한다(Morris, Bigg). 말세에 거짓 교사의 등장은 성경 전체에서 교훈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전하여 준 말씀을 잘 숙지하여 거짓 가르침에 대적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
본절은 기롱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의 기롱은 '주의 강림' 즉, 모든 피조물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림에 관해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며(마 24:34) 승천하실 때 천사가 약속하였으며(행 1:11; 3:20)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굳게 믿고 전파하였다(살전 4:15;5:1-11;살후 2:1;벧전 4:7). 따라서 주님은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기롱자들의 주장은 교회를 허물고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것이었다(Calvin).이러한 주의 재림에 대한 기롱자들의 조소는 마지막 날에 혀로 조소한 그 사실로 인해 멸망당할 것이다(사 5:18,19;렘 17:15;마 24:38;눅 17:26-30).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있다 하니 -
본문은 기롱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근거이다. '조상들'에 대해서 혹자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세대라고 주장하나(Kelly,Cranfield, Schelkle, Gilson) 구약의 조상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히 1:1, Blum). 왜냐하면 이것은 신약성경 전반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요 6:31;행 3:13;롬 9:5, Green, Bigg). 한편 '잔다'는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막 5:39;요 11:11)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평안이 쉬며 부활을 기다리는 축복의 상태임을 암시한다. '그냥 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메네이'(*)는 '지속되다' 혹은 '계속되다'라는 의미로 갑작스런 이변이 일어나지 않고 과거나 현재처럼 그대로 남아 있음을 나타낸다. 기롱자들은 창조 이래로 세상의 모습과 자연 법칙이 변하지 않고 규칙적인 것처럼 구약의 조상들도 수없이 잠들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이 계속적으로 반복될 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는...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저희가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RSV, JB, NIV, Plumptre, Bigg, Mayor,Moffatt, Spicq). (2) 저희가 자기 주장을 위해서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Spitta,W-indisch, Schelkle, Reicke, Kelly, Schrag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베드로는 본절에서 기롱자들이 주장한 것 즉 세상이 불변하다는 사실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것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
본문은 창 1장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창조사역이 성취되었음을 가리킨다(창 1:3-25; 히11:3). 하나님께서 명령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자연 질서가 그 자체로 충분하며 불변하다는 기롱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 세상은 그 자체가 충분하여 불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좌우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은 세상의 창조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이다. '하늘의 옛적부터 있는 것'은 창조 때에 땅보다 하늘이먼저 창조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창 1:1, Bauckham, Spitta). 물이 혼돈한 가운데서 윗 궁창과 아랫 궁창으로 구별되면서 땅이 드러났다(창 1:8-10). 본문에 나타난 이런 구체적인 창조 과정은 긍극적으로 창조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진행된 것을 묘사할 뿐 창조 자체에 있어서 다른 어떤 생각 즉 세상이 불변하다는 기롱자의 사상이 개입될 수 없다.
6.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
베드로는 본절에서 세상이 불변하다는 기롱자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홍수로 심판하신 사실을 예로 들어 반박한다. '이로 말미암아'의 헬라어 '디 혼'(*)에서 관계 대명사 '혼'이 받는 선행사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하늘과 땅'이라고 주장한다(Reicke, Marin). (2)혹자는 '하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James). (3)혹자는 5절의 '물에서 나와 물로'라고 주장한다(Spitta, Plumtre, Moffatt, Chaine,Sidebottom). (4)혹자는 '물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Bigg, Kelly, Green).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물에서 땅이 드러나게 하신 것처럼(5절) 물을 통해서 세상을 심판하셨다. 홍수를 통한 심판은 세상이 불변하다는 기롱자의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섭리하심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심을 예표한다(시 47:2,3,8).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이제 -
이것은 전후 문맥을 연결하는 연결사 '데'(*)로서 현재의 하늘과 땅과 재림 후에 전개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13절). 미래에 있을 심판에는 현재의 하늘과 땅이 불살라지고 새 하늘과 새땅이 약속된다.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
'그 동일한 말씀'은 5,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명령을 가리킨다. 한때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물로 심판을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미래에 현재의 하늘과 땅을 심판할 것이다(Morris). 한편 심판의 방법은 과거에는 물이었던 반면에 미래에는 불사름이다. '불사르기 위하여'는 '불에 의한' 세상의 심판을 의미한다(Robertson).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경건치 않은 자들만 심판하시고 하늘과 땅을 남겨두신 것은 미래에 있을 불에 의한 심판을 위해서 간직하신 것이다. 이와같이 예정된 심판이 있을 미래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로서 현재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일지라도 이는 불심판이 유보된 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욕을 좇으며 기롱하는 불경건한 자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잊으려 해도 끝내는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25:31-46; 고전 3:13;살후 1:8). 한편 '불 심판'에 대해서 혹자는 범신론적인 스토아 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나(Origen, TDNT),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불 심판은 이미 구약성경의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예언 중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 유래된 것이다(사 29:6; 30:30;34:4;단 7:9,10;욜 2:30,31).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
베드로는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한 후 사랑하는 수신자들을 위해 시 90:4을 인용하여 재림 지연에 대한 미혹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천 년이 하루 같은'은 실제로 주의 재림이 연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때를 인간들의 시간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설정해 주신 제한된 인간의 시간 개념은 어떤 법칙이나 제한에 얽매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에 비추어 볼때 우리의 천 년은 하나님의 하루에 불과한 것이다(시 90: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간의 시간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거나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거짓 교사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경계해야 한다(요 7:1-9 주제 강해 ''카이로스'에 관하여' 참조).
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
본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앞절의 시간 개념보다 진보된 설명이다. '어떤 이'는 주의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기롱자들(3절) 뿐만 아니라 기롱자들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악한 영향을 받고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Blum). 이들은 주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더디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참으시는 것'이다. '참으심'은 피조물을 향해 세워놓은 계획에 대해서 실행하시는 신실한 속성과 더불어 죄인들을 향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주의 재림의 지연은 믿음 없는 자들이 보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태만이나 능력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래 참으시는 긍휼이다. 한편 '너희를 대하여'의 헬라어 '에이스 휘마스'(*)는 사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본문과 같이 기록된 사본은 B,C,P이며, 어떤 사본에는 '에이스 헤마스'(*, '우리를 대하여')로 되어 있으며(K,L) 어떤 사본에는 '디 휘마스'(*, A) 이러한 사본상의 차이는 뒤이어 나오는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과 연관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대상에 대한 언급으로,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참으심의 대상이 전인류를 향한 것임을 시사한다(Calvin,Blum).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본문은 하나님을 기롱하고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미혹되어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해답이다. 그것은 회개하여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를 원하는 대상에 대하여 혹자는 이미 선택받은 자들중에서 아직 회개치 않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Clark) 타락한 모든 인류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Calvin, Blum).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많은 차이점이 생기기 때문이다(겔 18:23,32;33:11;롬 11:32;딤전 2:4;딤후2:25). 하나님께서 전인류가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인류의 보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를 향해 똑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성품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이 공허한 하나님의 약속임을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인류를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기회를 불신자들에게 알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성화된 삶을 영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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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속성:
순결, 예언, 말씀, 완성하신,
지키시는, 복음, 교회, 권위,
심판,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 축복, 부활, 평안,
함께 하시는, 창조, 명령,
성취하심, 다스리시는, 섭리,
영원,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긍휼, 구원, 은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웃 사랑, 순수/진실한
마음, 사도, 전파, 믿음,
경계, 회개, 성화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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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잘 숙지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고
미혹되지 않도록
거짓 교사를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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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류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f6URBGazy4
계속 나아가십시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공급하라” (베드로 후서 1:5)
단조로운 일들 가운데서
베드로가 말하길 당신은 신의 성품을 물려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마음을 모아서 경건의 습관을 만들기 위하여 집중적으로 노력하라고 말합니다.(벧후 1:4-5) “더하라”는 의미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도 자연적으로나 초자연적으로나 성품이 완성된 가운데 태어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성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습관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넣으신 새 생명을 근거로 하여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완벽함과 눈부심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 은혜의 기이함을 드러내도록 의도되었습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단조로움이 우리의 성품을 결정하는 시금석입니다. 영적인 삶에 가장 큰 장애는 뭔가 큰일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건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요 13:3-5)
아무 조명도 받지 못하고 신나는 일도 없고 매일 일상적인 일로 똑같은 일만 반복되는 그러한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나는 일이 없고 매일 일상적인 일로 반복되는 이 기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많이 빚으시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신나는 순간들을 늘 주실 것으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되풀이되는 따분한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성품이 자라나도록 '공급'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안락한 꽃 침대 위에서 우리를 하늘로 데리고 가실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그러한 하나님을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 주님을 순종해 보십시오. 그 순종 뒤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전능하신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의무 때문에 억지로 순종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상황을 연출하신다는 것을 믿고 나의 할 바를 행하십시오. 순종하는 즉시 속죄를 통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그 엄청난 은혜가 나의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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