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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베드로후서 3 : 10~18🍑주님의 날을 사모하며 진리 안에서 자라는 성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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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
'그러나...오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헥세이데'(*)는 '헥세이'를 문두에 두고 반의(反意)를 나타내는 접속사 '데'와 함께 연결하여 기술됨으로 기롱자들과 미혹된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께서 오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실 것임을 강조한다. 한편 '주의 날'은 일반적으로 심판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사 2:12;겔 13:5;욜 1:15;말 3:2;행 2:20;고전 5:5;살전 5:2;살후 2:2, Gibson, Charles). 본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도적이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예기치 않게 임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갑작스러운 재림은 이미 예수 자신이 말씀하셨고(마 24:43;눅 12:39), 바울과(살전 5:2) 요한이(계 3:3;16:15) 강조한 것으로 베드로는 이런 표현을 재삼 강조하여 수신자들이 기롱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고 깨어 준비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
본문의 '큰 소리로'의 헬라어 '로이제돈'(*)은 강풍이나, 강한 물살 혹은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세상이 파멸되거나 진멸될 때 나타나는 소리를 암시한다(Gibson). 이는 곧 주의 재림에 나타나게 될 심판의 무서운 상태를 암시한다(계 6:14;20:11).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
'체질'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이아'(*)는 '스토이코스'(*, '열')에서 유래된 단어로 세상을 구성하는 원물질 곧 흙, 공기, 불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갈 4:3;골2:8;히 5:12, TDNT, Robertson, Blum). 이것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은 주의 재림 때에 온 세상이 불에 타 해체됨을 시사한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드러나리로다'의 헬라어 '휴레데세타이'(*)는 사본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본절 역시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태워 버리다'(A.L). 이 경우는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불살라 지는 것을 나타난다. (2)'발견하다'(*,B,K,P). 이 경우는 인간의 모든 것이 심판 때 분명히 알려질 것임을 나타난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불로 태워질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NIV, Blum).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
이제 베드로는 확실한 재림을 앞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취하여야 할 자세에 대해 권면한다. '어떠한 사람이'의 헬라어 '포타푸스'(*)는 헬라어 어법상 의문문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감탄사로 사용된 것으로 하나님이 택한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의 시민인 동시에 하늘나라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Gibson, Charles). 한편 '되어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파르케인'(*)은 '에이미'(*, '이다', 'be')의 강조형으로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으로 영위해야 하는 종말론적 삶을 시사한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
'거룩한'은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헌신된 것을 가리키며 '경건한'은 하나님을 닮아가며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Blum).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확실히 파멸될 것이기 때문에 악을 떠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하나님의 날'은 구약성경의 '여호와의 날'과 같은 의미로 10절에서는 '주의 날'로 나타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계 16:14, Green). 한편 '바라보고'의 헬라어 '프로스도콘타스'(*)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구약에서 발전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다(Robertson, Calvin, Bauckham). 또한 '간절히 사모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퓨돈타스'(*)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면서 오래 참으시는 성품과 관련된 것으로(9절) 문자적으로 '서두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 60:22의 반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회개를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종말을 앞당길 수 있음을 시사한다(사 10:23, LXX;행 3:19,20, Eliezer, Bauckham, Blum).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주의 재림에 관한 소망을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통해서만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종말론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그 날에'(*, 디 헨)는 문자적으로 '날 때문에'라는 의미로 그 날 곧 '하나님의 날이오기 때문에'라는 의미로 그 날 곧 '하나님의 날이 오기 때문에' 또는 '그 날의 임재때문에'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온 세상은 불을 통한 심판을 받아 사라지게 된다(10절).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
베드로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날에 경건한 자들에게 약속된 것에 대해 구약성경을 통해 설명하고있다. '그의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의에 근거한 약속으로(사 11:4,5;45:8;렘 23:5-7;33:16;단 9:24) 노아 시대에 대 홍수로 불경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죄악된 세상을 새롭게 하셨듯이 주께서 재림하는 하나님의 날에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할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의가 영원한 집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킬 약속을 말한다(사 65:17;66:22;계 21:1). 한편 '새 하늘과 새 땅'은 구약성경(사 65:17;66:22)과 유대 묵시 문학에 나타나며(위경 에녹1서 45:4,5;72:1;91:16;바룩 2묵시록 32:6;44:12;57:2;에스라 4서 7::75) 신약성경에서도 받아들여져 나타난다(마 19:28;롬 8:21;계 21:1). 이것은 하늘과 땅이 새롭게 창조되어(시 102:26;사 51:6;히 1:11;계 20:11) 새로와지고 완전해짐을 시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날'이 죄악된 세상과 피조물에 대해서는 멸망과 재앙의 날이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악과 세상의 고난을 도말하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임을 기억하고 기대하며 사모해야 한다(벧전 1:7).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
베드로는 새하늘과 새 땅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경건한 삶을 실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한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는 거짓 교사들이나 기롱자들의 미혹되고 방종하는 삶과 대조되는 삶으로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이 살아야 하는 삶이다. 이런 삶은 그 기준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온전하고 거룩한 삶을 가리킨다(민 19:2;빌 2:15;벧전 1:19). 한편 '평강 가운데서'는 소망과 인내에 뿌리를 박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근거한 상태를 의미한다(1: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될 구원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
베드로는 9절에 이어 그리스도의 재림이 연기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부가적으로 설명한다. 기롱자들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며, 하나님의 인내이다. 따라서 재림의 지연을 재림을 부정하거나 핑계의 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
'형제'라는 호칭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 사역하는 동역자를 부를 때 즐겨 사용한 것이었으며(고후2:13;빌 2:25;살전 3:2) 당시 로마 교회 지도자들에게 흔히 사용된 호칭이었다(엡6:21;골 4:7,9;벧전 5:12). 초대 교회 때에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좋지 않은 긴장 관계에 있었음을 전제하면서(갈 2:11-14) 튀빙겐 학파(Tubingen Schule)는 본절이 본서가 위작(僞作)임을 나타내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형제간의 사랑과 용서를 강조했던 사도들의 사상에 어긋난다(엡 6:21;골 4:7,9;몬 1:16, Green,Bauckham). 사도 베드로는 본절에서 같은 사도로서 바울에게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언급하고 있으며(Bigg) 자신이 언급한 재림에 관한 교리도 바울의 사상과 일맥 상통함을 암시한다(롬 2:4).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또 그 모든 편지에도 -
혹자는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파사이스 에피스톨라이스'(*)에 정관사가 없으므로 '모든 편지'는 바울의 서신에 고정시킬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접할 수 있었던 여러 서신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Morris). 그러나 '모든 편지'는 전후 문맥상 바울이 쓴 모든 서신들을 가리킨다(Gibson, Bigg).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
바울도 자신의 서신에서 여호와의 날, 즉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장한 바대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지역은 물론 그 외 많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회람되고 있었던 바울 서신에도 진술되어 있음을 언급함으로 자신이 언급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히 성취될 것임을 증거한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
본문은 바울이 쓴 서신들 가운데 이해하기 힘든 주제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바울에게 교리적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신을 받는 독자들이 바울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를 말할 때(롬 3:20-24,28) 그것을 성화의 삶을 소홀히 여기는 듯한 주장으로 이해하거나,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주장을(롬 7:4;8:1,2;갈 3:10) 도덕폐기론으로 이해하는 것 등이다(롬 6:1-7;고전 6:13-20). 바울이 쓴 주제들이 난해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
'무식한 자들'의 헬라어 '아마데이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배우다'라는 '만다노'(*)의 합성어로 성령으로부터 배우지 못했거나(요 6:45) 사도들로부터 영적 진리들을 배우지 못한 자들(행 2:42)을 가리킨다. 또한 '굳세지 못한 자들'은 믿음의 뿌리가 내리지 않은 기초가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2:14;눅 22:32).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
'다른 성경'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 서신과 성경을 구별하여 '또 다른 종류의 성경'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사도들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을 믿기 때문에(1:20;딤후3:16,17) '다른 성경'이라 함은 베드로가 바울 서신을 구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성경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Robertson, Green, Blum). 한편 '억지로 풀다가'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트레블루신'(*)은 '왜곡하다', '비틀다'라는 의미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바울 서신과 다른 성경을 자신들의 뜻에 맞게 아전 인수격으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무지한 생각과 논리로 성경의 교훈들을 왜곡시키고 복잡하게 만들어 고집함으로 멸망당함을 의미한다. 베드로의 이 같은 단호한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이 난해한 말씀을 접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것이 아니다. 단지 성령의 도우심과 조명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바르게 해석할 것을 권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본서 전체에 대한 요약과 함께 마지막 두 가지 권면을 하고 있다.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
'무법한 자들'은 이제까지 언급된 거짓 교사들, 기롱하는 자들, 무식하고 굳세지 못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들로서 영적으로 실족시키려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생각과 논리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여 실족케 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떠나게 한다. 한편 '삼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퓔랏세스데'(*)는 '퓔랏소'(*, '경계하다')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대처하고 깨어 경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대처하는 방법은 (1)그들의 활동을 미리 알며 (2)그들의 부도덕한 삶을 경고하며(2장) (3)사도들의 메시지를 일깨우고(1:16-18) (4)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 선포하며(2절;1:19) (5)그런 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다(Blum).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
본문 두번째 권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카리티 카이그노세이...예수 크리스투'(*)에서 '은혜와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유격에 의해서 수식 받고 있다. 이는 '은혜와 지식'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시사한다. 한편 '자라가라'의 헬라어 '아욱사네테'(*)는 '아욱사노'(*, '자라다')의 미완료로 계속적으로 자라가야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는 것에만 만족하여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에 대한 지식 안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하여 굳세게 서서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는자가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
베드로는 마지막 인사말에서 주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 고백을 한다. '영광'의 헬라어 '헤 독사'(*)는 문자적으로 '그 영광'이란 의미로 오직 주님에게만 영광이 있을 것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암시한다(Calvin). 한편 '영원한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헤메란 아니오노스'(*)는 문자적으로 '그 시대의 날까지'라는 의미로 '여호와의 날' 곧 주의 날인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7,10,12절,Blum).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주님이 종말에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서 나타날 '여호와의 날'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모든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부인하여 미혹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교훈에 미혹되지 않고 영광 가운데서 인내할 것을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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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속성:
그리스도, 재림, 말씀,
심판, 뜻, 거룩한, 소망,
기쁨, 의, 온전한, 구원,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긍휼, 사랑, 지혜와
지식이 부요한, 성령,
영적 진리, 은혜, 영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깨어 준비하는, 종말론적
삶, 섬김, 성화, 경건,
기대, 사모, 인내, 존경,
권면, 도우심, 경고,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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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유한하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을
닮아가며 섬겨야 한다.
악을 떠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자.
믿음의 뿌리를 내린
기초, 말씀 선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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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과 성령과 말씀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죄를 지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주님께서 슬퍼하시는 죄의 멍에를 멘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깨닫지 못한 죄가 있다면 알려주시고 저로 죄를 끊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하루들을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하여 주시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R-iMRxxjw8
당신의 삶으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요한복음 15:13, 15)
예수님께서는 내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고 부탁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주를 위하여 내 삶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라고 말할 때, 그는 진심이었습니다. 그의 영웅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이러한 선언을 할 수 없다면 옳지 않을 것입니다.
의무감은 영웅심에 의해서 실현됩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삶을 내려놓겠느냐”(요 13:38)라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까? 당장 목숨을 바치는 것이 높은 소명 의식을 가지고 하루하루 자신의 삶을 내려놓기보다 훨씬 쉽습니다. 우리는 어떤 찬란한 순간을 위해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그 찬란한 빛 가운데 걷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오직 단 한 번 휘황찬란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변화산에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이 두 번째 영광마저 비우시고 다시 악령들로 가득 찬 계곡으로 내려가셨습니다.(막 9:1-29), (역자 주 - 첫 번째는 하나님과 동등되시는 영광을 비우신 것이고 두 번째는 변화산의 영광을 비우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33년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날마다 자신의 삶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요한이 말합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이는 인간 본성의 행위와는 전혀 반대되는 내용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친구라면 마음을 다하여 주께 나의 삶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미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에 구원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내 삶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에게 성령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당부하십니다. “이제 힘을 내서 함께 이뤄내자. 비록 네 주변의 상황들이 너를 방해하여도 내게 충성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참 친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십시오. 그분의 영예가 당신의 이 땅에서의 삶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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