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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2 : 1~14🍑갑절의 능력을 구하는 믿음의 사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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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1.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여호와께서...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 -
선지자 엘리야 (Elijah, B.C.875-848)가 자신의 공적 사역을 모두 마친 후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왕 아합의 통치 초기에 등장, 숱한 역경을 이기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역을 완수한 엘리야에게 이제 남은 일이라곤 엘리사(Elisha, B.C. 848-797, 왕상 19:19-21)를 차기 후계자로 굳건히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면 그는 영광스러운 최후를 맞이하게 될 터인데 곧 에녹(창 5:24)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昇天)하는 것이었다(11절). 한편 성경상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므로 이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이같은 엘리야 승천 사건은 이스라엘왕 아하시야(Ahaziah, B.C. 853-852)가 죽고난 뒤에 일어났던 것만은 분명하다(1:17,18).
길갈에서 -
성경에 나오는 길갈(Gilgal)은 두 곳이다. 하나는 여호수아의 정복사에서 언급된 곳(수 4:19)으로 여리고에서 북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질질리아(Jiljiliya) 또는 칼킬리야(Khalkiliya)에 해당하는 곳(신 11:30)으로 벧엘에서 북서쪽으로 약 13km정도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해 있다(T.R.Hobbs).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동한 경로(1-11절)와 2절의 '벧엘로 내려가니'란 말로 미루어 볼 때 본절의 길갈은 후자의 길갈임이 분명하다. 이곳은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며 엘리사의 중심 활동지이다(4:38). 그러나 후에 이곳은 우상 숭배지로 변하여 아보스, 호세아 등의 선지자에게 규탄을 받았다(암4:4;호4:15;9:15).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다음 지도를 참조하라.
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
본장에서 세번씩이나 언급된 말로(2, 4, 6절) 엘리야가 엘리사를 자신에게서 떼어 놓으려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구절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처럼 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있다. 1)엘리야가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알고 마지막 지상 생활을 홀로 지내기 위해(Pulpit Commintary), 2)자신이 승천하는 영광을 엘리사와 생도들에게 나타내지 않으려는 겸손에서(Keil & Delitzsch), 3)엘리사의 충성과 사랑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Wycliffe)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의 세 견해 중 어느 한 가지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모든 견해를 두루 섭렵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하다.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것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맹세의 일반적인 형식이다(삼상 14:39; 20:3;삼하 11:11). 라기스 문서(LachishLetters)에서도 동일한 맹세 형식을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자신의 맹세나 말의 신실성을 확증, 강조하려 할 때 대개 이같은 표현을 썼다. 이는 곧 하나님과 상대방의 전인격 및 전존재를 건 것으로 '여호와와 당신이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듯 ...도 확실하다'는 뜻이다. 삼상 25:26 주석 참조.
3.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 -
구약 성경 중 사무엘서나 열왕기에는 '선지자의 무리'(삼상 10:5;19:20;왕상 20:35)또는 '선지자의 생도'(5,7,15절; 4:1,38; 5:22; 6:1)란 말이 종종 나온다. 이들은 영적으로 지극히 암울했던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도덕적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당대의 위대한 선지자였던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의 수하에 몰려든 자들이다. 이런 무리를 가리켜 우리는 소위 원시 형태의 '선지자학교'라고 부르는데 곧 벧엘, 여리고(5절) 등에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상 10:1-16 강해, '선지자 학교'를 참조하라.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직접 엘리야에게 나아가기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권위가 너무 컸다(PulpitCommentary). 또 그들은 엘리사를 자신들과 동일한 생도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와 접촉하기가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
본절 및 5절과 같은 말로 볼 때 벧엘과 여리고 생도들도 엘리사와 같이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나이까?"라는 질문은 어떤 사실에 대해 확인하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취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카흐'(*)로서 '돈을 주고 사다', '결혼하여 데려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수동형(Niphal)으로는 '포로로 잡혀가다', '죽음에 의해서 옮겨지다'(겔 33:6)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러나 이 단어 '라카흐'(*)가 여기서는 '엘리야의 승천'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의 승천에 대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계시해 주고 엘리야가 엘리사와 선지자들의 생도들에게 그 계시의 내용을 알려준 것으로(Wycliffe) 행 1:9,10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감람 산에서 승천하실 때의 모습과 같이 하늘로 올리움을 생생히 나타낸 것이다(Keil & Delitzsch). 또한 본절의 '머리 위로'라는 구절이 이 의미를 더욱 강화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메알'(*)은 '...로부터'라는 뜻의 비분리 전치사(*, 메)와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 알)가 합성된 것으로 엘리야가 하늘 나라로 옮기게됨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생도들이 본절에서 언급한 말은 엘리야 선지자의 승천에 대한 질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혹자는 이것을 가리켜 단순히 엘리야가 엘리사를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B hr). 즉 엘리야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에 대한 언급으로서 엘리사의 마음에 슬픔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벧엘에 있는 성도들이 엘리야의 승천에 관해 알 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K.W.B hr). 그러나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히브리어 '라카흐'(*)와 전치사 '메알'(*)의 용법, 그리고 당시 상황등을 고려해 이 구절을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질문으로 보고 있다.
너희는 잠잠하라 -
이것은 "그가 하늘로 올라 가는 것을 큰 소리로 말함으로써 백성들을 소란시켜서는 안 된다"(J. Lange)는 의미가 아니다. 또 "엘리야의 겸손을 위해서 그의 영광을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Keil)는 의미도 아니다. 즉 이것은 "너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Wycliffe) 내 사랑하는 주를 이별하려고 하는 이 순간에 말을 많이 함으로써 내 마음을 격동시키지 말라"(Bunsen)는 뜻으로 엘리사 자신의 내적 심정을 토로한 것이며(Matthew Henry) 거룩한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엄중한 요구이다(Pulpit Commentary).
4.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엘리야와 엘리사의 여행은 길갈-벧엘-여리고-요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험한 여행에서 스승에 대한 엘리사의 인내와 충성심은 명백하게 증거되고 있다. 이러한 훈련의 과정들을 통하여 결국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다.
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
엘리사는 마침내 스승 엘리야의 반복된 시험을 통과하였다. 이러한 그의 결단은 스승에 대한 깊은 애정과 불타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엘리사의 고백은 그의 전 인생을 엘리야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7.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선지자의 생도 오십 인이 -
여기에 언급된 오십 인이라는 숫자는 1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를 잡으러 왔던 병사들의 수와 동일하다(1:9). 오십 명의 생도들은 엘리야의 최후를 목격한 증인들로서 그의 승천을 전파하게 될 사람들이다. 한편 선지자의 생도들이 50명이라는 것은 그들이 단체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바 이러한 사실은 암살의 위험에서 도피하는 다윗의 사건 등 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도 볼 수 있다(삼상 10:5,6,10; 19:20).
8.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겉옷을 취하여 -
'겉옷'은 히브리어로 '에데르'(*)로서 소매없는 외투 또는 양가죽으로 되어 어깨를 감싸는 망토를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70인역(LXX)에는 '톤 멜로텐'(*)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양가죽'을 의미한다. 한편 모세의 지팡이가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권위의 상징인 것과 비교해서 여기에 나타난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의 직분을 상징한다. 그리고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가 일하는 곳에다 던진 일(왕상 19:19)이 있는데 이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선택한다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선지자직을 위임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들 앞에서 엘리야의 겉옷을 보인 것은 엘리사가 그의 후계자임을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외투를 말면 모양이 어느 정도 지팡이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
이 사건은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사건(출 14:16,21)과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가른 사건(수3:13)에 상응한다. 또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가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처럼 스승과 제자의 관계, 혹은 지도자 위임의 관계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 사건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이적이다. 왜냐하면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기 때문이다(시 62:11). 따라서 겉옷을 취하는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와 이 이적의 사건은 이것을 지켜보는 생도들에게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그분의 목적을 알게 했을 것이다. 한편 '육지'는 히브리어로 '하라바'(*)로서 '마른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라 공동 번역과 영역본들에서는 모두 '마른 땅'(dry ground)이라고 번역했으며 70인역(LXX)도 이와 비슷하게 '에레모스'(*) 즉 '사막', '광야'란 의미로 옮겼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요단 강을 건널때 '마른 땅'(출 14:21;수 3:17)이라고 말했던 그 표현으로서 성경에서는 드물게 사용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강물과 바닷물을 갈라 놓을 수 있는 분일 뿐만 아니라 갈라서 드러난 땅을 마르게도 하셔서 백성들의 불편함을 알고 조처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 한편 이 두 선지자가 요단 강을 건너 당도한 곳은 모압 땅이었는데 이곳이 바로 모세가 죽음을 맞이했던 곳이다. 신 34:6을 보면 "오늘까지 이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묘가 없는 엘리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17절에서 무리들이 엘리야의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한 사건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에녹과 연관시키려고 하지만 오히려 모세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무덤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두 기사 뿐이기 때문이다.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
'영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로서'영', '호흡', '영혼'이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선지자적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문의 '갑절'이라는 말은 신 21:1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용어로서 맏아들의 분깃을 강조한 표현이다(Keil & Delitzsch). 즉 이 말은 일반의 형제들보다 장자가 받는 두 몫의 유산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합법한 계승자로서 충분한지도자의 역량을 엘리야에게 요구한 것이다. 만일 이 구절이 엘리야보다 두배의 능력을 구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때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긴다(B hr). 1)실제로 엘리사가 받은 능력은 엘리야의 두 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산 생애의 길이나 그가 나타낸 기적의 수나 양은 엘리야가 행한 것보다 두 배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인 것이다. 2)그러한 요구는 주인을 모시는 종된 자로서 가장 겸손치 못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종이 결코 그 주인만 못하다고 했던 것이다(마 10:24). 따라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을 나타낸 표현으로 엘리야같이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다(Matthew Henry, The Interpreter's Bible).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사역자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 먼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간구하는 경건의 훈련이 절실히 요청된다(히4:16).
10.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
엘리야의 이 말은 엘리사가 요구한 일의 중요성의 정도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9절에서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고 할때 엘리야는 자신이 쉽게 줄 수 있는 것을 의미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엘리사의 요구는 엘리야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닐 뿐만 아니라(Matthew Henry Commentary) 자신이 행할수 없는 하나님께만 속한 일 즉, 신령한 축복을 원한 것이기에 그 일은 어렵다고 한것이다. 또 엘리야는 후계자를 임명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의식은 만인이 보는 가운데서 치룰 수 있으나 이에 대한 신적인 증거는 자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그렇기에 엘리야는 엘리사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 엘리사의 신앙심 깊은 요청이 허락되도록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
신 31:23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지도권을 양도받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직접 임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적이 곧 엘리사의 선지자적 직분에 대한 증거가 되리라고 했다. 즉 엘리야는 엘리사가 자신의 승천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그리고 그 승천의 영적 의미를 깨닫는다면(Wycliffe) 그의 요청이 성취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6:17;눅 24:16,31). 그래서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어느 정도 부정적인 면을 암시하는 말을 첨가해서 엘리야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나타냄과 동시에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바라보면서 그분의 뜻을 신뢰하였으며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선지자적인 태도의 모범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이에 그들이 걷기를 계속하면서 계속해서 말했다'란 의미로 이것은 두 사람이 요단 강을 건너 걸어가고 있을 때(Wycliffe) 하늘로 부터의 징조를 기다리면서 한참동안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무슨 증거를 보이시도록 기도하였을 것이며 또한 엘리사는 스승의 최후를 맞이하면서 엘리야가 남긴 교훈을 하나라도 더 듣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유사한 예로서 눅 24:50, 51에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시기 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서 축복해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
이 구절은 1장에서 말한 '하늘에서 내려온 불'과 연관됨이 분명하다(1:9-16). 엄밀하게 말하면 실제로 '불수레와 불말'에 관한 언급은 엘리야의 생애 중에서 불의 역사로 말미암은 그의 승리를 연상시켜 준다(왕상 18:24-38;왕하 1:10-12). 실제로 구약에서 말과 병거는 군대의 전쟁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며(출14:7; 삿 4:3;욜 2:5;나 3:2), 불이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출 3:2;24:17;신 33:2;합 3:3-5)이 '불수레와 불말'이 하나님의 권능과 의지를 나타내는 구름을 의미(Lange)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회리바람을 타고 -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회리바람 안에' 또는 '회리바람 가운데'이다. '회리 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세아라'(*)로서 검은 구름과 번갯불을 동반한(Wycliffe) '태풍' 상태를 의미한 말로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여기서 회리 바람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욥 38:1;행 2:2). 그리고 원문을 보면 엘리야가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승천했는지 분명치가 않다. 단지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이 나타나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태풍 가운데 사라진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말 4:5,6;마 11:14) 폭풍 중에, 즉 주께서 임재하시는 가운데 승천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Wycliffe). 그래서 17절에서 오십인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아오게 한 것도 이와 같이 그의 사라짐이 묘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리야가 에녹(창 5:22-24), 예수(눅 24:50-53)와 같이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모든 신자들이 경험하게 될 일에 대한 예표이기도 하다(고전 15:51;살전 4:17). 한편 후대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지 직전에 먼저 엘리야가 나타나리라(말 4:5)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대 문헌 가운데 기록하고 있는바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엘리야가 갑자기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하며, 개들이 즐겁게 짖으면 그것이 엘리야가 오는 소식이라 하여 가슴을 두근거렸다는 것이다(B hr).
승천하더라 -
여기서 히브리 원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알라'(*)인데 이것은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질문할 때(3,5절) 사용한 단어 '라카흐'(*)와 다른 뜻이다. 즉 '라카흐'는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심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알라'(*)는 그 원형인 '번제'라는 뜻의 '올라'(*)에서 보듯이 완전히 태워져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확실히 에녹이 승천한 경우와 연관되는데(창 5:24) 창세기의 기록에서는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해석할 때 엘리야의 승천 방법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그의 모습을 사라지게 하심으로써 에녹과 모세와 동일하게 취하셨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의 일부는 본 엘리야의 승천 기사를 하나의 전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그 현장을 목격한 당시의 선지 학교 학생들과 엘리사의 증언에 의해 또는 승천 전에 언급된 사실(3,5절)을 미루어볼 때 그리고 변화 산상에서 모세와 같이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엘리야의 기사를 살펴볼 때 그 사건의 역사적 진실성과 객관적 사실성은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할수 있다(마 17:3,4;눅 9:30). 이러한 엘리야 선지자의 승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대한 확실성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불멸성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불멸성은 성도의 몸이 입게 될 영광이고, 이러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것에 대한 한 상징인 것이다(Matthew Henry Commintary).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사가 보고 -
10절과 비교해 볼 때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엘리야의 승천 사실을 엘리사가 목격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엘리사가 제시해 주었던 상황(3, 5절)이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때 엘리사는 자신이 요청한 '갑절의 영감'이 응락된 것을 알았다.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
엘리사의 이 외침은 2장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13:14에서 요아스 왕의 입을 통하여 이 문구가 다시 말해진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 자체가 갖는 독특한 의미를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지자를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요아스 왕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을 문맥과 독립시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아버지여'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존경을 나타낸다. 즉 종들이 자기 주인에게(5:13), 또는 젊은 생도들이 나이든 선지자에게 이와같은 존칭을 사용했다. 둘째, 이것은 선지자들의 지도자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볼 수있다. 또는 이외에도 혹자는 이것을 '엄마, 마마' 등과 같이 어린 아이의 근심된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T. H. Gaster).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엘리사가 자신을 엘리야의 영적 아들로 인식하고 엘리야를 '아버지'라고 호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라'는 외침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참 보호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Wycliffe). 왜냐하면 특히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뿐이심을 증명했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또 엘리사의 이러한 외침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사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요아스 왕이 엘리사에 대하여 이 구절의 내용과 똑같은 말을 사용한 것(3:14)도 엘리사를 엘리야와 같은 이스라엘의 보호자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병거와 마병은 그당시 최고로 강력한 병기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왕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안전을 의존했던 것(Keil &Delitzsch, Vol. . p.296-297)으로 싸울때(욜 2:5;나3:2), 물건을 나를 때(9:28), 여행할 때(행 8:29)등에 사용된 것이다.
엘리사 -
히브리어로 '엘리솨'(*)로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리'(*)와 '그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예솨'(*)가 합쳐진 말이며 '나의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때는 이스라엘 왕국의 7대 왕 아합(B.C. 874-853)의 통치 말년이거나(왕상 19:1-7), 또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B.C.853-841)의 통치 초반으로 본다(3:1). 이때부터 제 12대왕 요아스(B.C.798-782) 통치 초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 활동을 하였다(13:14-19).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
'둘로 찢고'라고 해야 바른 번역이 된다. 여기서 엘리사가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은 스승과 이별하는 슬픔을 나타낸 행동이었다(PulpitCommentary, Wycliffe).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던 엘리야가 사라진 것은 엘리사에게 큰 슬픔과 더불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그의 이러한 심적 상태가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5:7;수 7:6). 이밖에도 재를 뒤집어쓰는 것(욥 2:8), 얼굴과 가슴을 치는 행위(눅 18:13), 정수리의 머리털을 면도해 버리는 것(렘 7:29)등은 모두 극도의 애통을 표시하는 관례적인 행동들이다.
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이제 엘리사는 다른 생도들, 즉 위의 모든 사실을 목격한 증인들에게로 되돌아 오기 시작한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줍는 후계자 계승의 상징적 행위는 왕상19:19에서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처음 부름을 받던 행위와 서로 연관된다. 한편 엘리야의 떨어진 겉옷은 엘리사의 요구가 성취되었다는 하나의 증표(Keil & Delitzsch)임과 동시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확증시켜 주는 외적 증거이다(15절, Wycliffe).
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물을 치며...물을 치매 -
여기서 '물을 치다'라는 표현이 두번 거듭해서 언급된 것은 스승 엘리야가 행했던 능력을 상기시켜 줌(8절, The Bible Knowledhe Commentary,Pulpit Commentary)과 동시에 홍해를 가르던 모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출14:21,22;수 3:17).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 -
히브리어 원문은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더욱이 그는?'으로 표현되어 있어 마지막의 두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엘리사가 이렇게 외친 것은 엘리야에게 능력을 주셨던 하나님께 자기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간구했던 기도였다(Wycliffe). 그러나 이것을 엘리야와 함께 그 하나님의 능력이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닐까 하는 근심의 표현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와는 반대로 엘리사는 질문의 강조 형식을 빌어서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심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신앙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게 하셨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외적으로 확증시켜 주셨던 것이다(Keil & Delitzsch, Vol.3 ,p.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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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영광, 부르시는, 승천,
사랑, 맹세, 확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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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거룩한, 권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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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기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 충성,인내, 스승,
훈련, 후계자, 전파, 겸손,
종, 열심, 간구, 경건,
슬픔/애통,
🔵
고요한 마음.
하나님의 뜻에 따르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겸손한 마음으로 경건을
훈련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바라보면서
그분의 뜻을 신뢰하기.
또한 주님의 명령을
전적으로 순종하자.
🩸✝️
🌱🌿🌳
나의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영적 암흑의 시대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주님을 증거하고 목숨다해 순종했던 선지자들을 본받아 생명과 구원되신 예수님을 담대히 증거하고 셩령의 능력으로 충만함을 입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6756rIOpAM
내면을 위한 사역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베드로 전서 2:9)
우리가 무슨 권리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까? 속죄의 권리입니다. 자신을 과감히 버리고 제사장적인 기도 사역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자신이 제대로 서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중심적인 병적인 교인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힘 있고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도 못한 채 간신히 자신의 힘에 매달려서 “나는 멋진 승리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모습에는 구속의 기적이 나타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구속은 완성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전진하십시오. 더 이상 자신에 대하여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께서 중보기도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실행하십시오. 한밤중에 당신을 찾아오는 친구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오 주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아뢰는 대신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깨달음 가운데 기도하십시오.
자신만 생각하는 우리의 병적 습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 관하여 어떤 말씀을 하셔도 더 이상 놀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천박함의 깊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의 내적인 생명이 마음껏 중보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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