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

생명의 삶 QT👼열왕기하 4 : 18~37🍑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권능 본문

카테고리 없음

생명의 삶 QT👼열왕기하 4 : 18~37🍑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권능

credo15229850 2024. 6. 27. 11:32

https://tripol.tistory.com/465

 

히브리어 열왕기하 4장 전체 원어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웨이솨 아하트 민네쉐 베네이 한네비임 차아카 엘 엘리솨 레모르 압데카 이쉬 메트 웨앝타 야다타 키 압데카 하야 야레 엩 아도나이 웨한노쉐 바 라카하트 엩 쉬네 예라다이 로 라아바딤 개역개

tripol.tistory.com

열왕기하 4:18. 그 아이가 저으기 자라매 하루는 곡식 베는 자에게 나가서 그 아비에게 이르렀더니

 그 아이가 저으기 자라매 -

히브리어 본문에는 '저으기'라는 부사가 없고 단지 '그 아이가 자랐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의 내용만으로는 그가 태어난 후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본절 이후의 문맥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아이'에 해당하는 원어가 '어린 아이', '아이'를 의미하는 '엘레드'(*)와 '나아르'(*)로 사용되었다. (2) 이 아이가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었다(19절). 따라서 이 정도 되기까지는 아마도 2,3년의 기간이 흘렀음을 짐작할 수있다. (3)자기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20절). 이것도 그 아이가 그렇게 많이 자라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아이가 부모에게 재롱을 가장 많이 떨 정도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하루는 곡식 베는 자에게 나가서 그 아비에게 이르렀더니 - 

수넴 지방은 옥수수 재배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본절에서 곡식을 벤다는 말은 옥수수를 베는 것, 혹은 옥수수를 따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곡식 베는 곳에 있었던 것은 그가 직접 추수를 했다기보다는 추수하는 일꾼을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부자이기 때문에 일꾼을 부렸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PulpitCommentary).





 

19. 그 아비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 아비가 사환에게 명하여 그 어미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

이 아이는 추수하는 들로 나아갔다가 일사병에 걸린 것 같다. 왜냐하면 일사병은 팔레스틴에서 흔한 것일 뿐만 아니라(시 121:6;사49:10) 추수 때는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이기 때문에 일사병에 걸리기 쉬웠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Wycliffe). 그러나 이 아이의 병이 일사병에 의한 뇌염이었다고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Keil & Delitzsch, Vol. , p.311).

 

 







 

20. 곧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 -

본절을 보면 아이가 들판에서 병을 얻은 것이 아침 나절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낮까지'라는 표현을 써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또한 본절은 아이의 죽음이 명백한 실제적 사실이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 이유로서 수넴 여인은 아이를 무릎에 안고 아침 나절부터 낮까지 아이의 임종에 대해 줄곧 관찰해 왔음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수넴 여인은 아이의 죽음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21. 그 어미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서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서 -

수넴 여인은 아이의 시신을 자신들의 방이나 아이의 방에 두지 않고 선지자의 침상 위에 두었다. 그리고 아이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이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서 문을 꼭 닫아 두었다. 그런데 여인의 이런 행동은 아이가 죽은 것을 남편에게 알려서 근심을 주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고, 또한 엘리사가 오기만 하면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하는 신앙적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K.W.B hr).





 

22.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컨대 한 사환과 한 나귀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한 사환과 한 나귀를 내게로 보내소서 -

그녀는 엘리사에게 가는 길이 멀고 험하기 때문에 나귀 한 마리와 그 나귀를 몰고 갈 종을 남편에게 요구했다. 그런데 본절에서 한 나귀를 요구한 것이 그들이 두 마리의 나귀 밖에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Wycliffe)은 의심스러운 해석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여인의 믿음이 나타나 있다. 수넴 여인의 이러한 믿음은 (1)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부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을 낳았던 사실과 (2) 엘리사를 오랫동안 섬기면서 체득한 영적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23. 그 남편이 가로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뇨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

초하루(월삭)와 안식일은 백성들의 종교적 휴일이었다(삼상 20:5;암 8:5;사 1:13). 그래서 엘리사는 아마도 절기일이나 안식일에만 방문자들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Hobbs). 왜냐하면 다른 날은 백성들을 살피며 여행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8절). 또 방문자들도 그런 절기때에만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선지자를 만나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에 기록된 남편의 질문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1) '오늘 그를 만나기가 힘들지 않겠느냐'는 뜻이며, (2) '그렇게 급히 선지자를 만나야 할 다른 무슨 이유가 있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그녀는 '샬롬'(*)즉 "평안이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흔히 안부의 물음에 대한 대답(26절)으로서 '아무 일 없다', 또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참으로 이것은 그녀가 남편을 안심시키기 위한 지혜로운 처신이었으며 또한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확신의 표현이었다. 한편 여인이 나타낸 이 표현에 대해서 혹자는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하기 위한 말이라고도 한다(Keil & Delitzsch, Vol. , p.311).

 

 






 

24.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아 앞으로 나아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의 달려가기를 천천하게 하지 말라 하고


수넴에서 갈멜 산까지는 약 40km나 되었기 때문에 수넴 여인은 사환에게 말을 급히 달리게 했다(T.R.Hobbs).





 
25. 드디어 갈멜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저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여기에서 엘리사가 자신의 사환을 보내어 수넴 여인을 맞이하게 한 것은 그가 얼마나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를 나타내 보여 준다. 한편 게하시로 하여금 남편과 아이의 평안을 물어보게 한 것은 갑자기 찾아온 그 여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게하시의 안부 인사에 수넴 여인은 '평안하다'라는 짧은 답변을 했는데 그 이유는 (1) 더 많은 설명을 하려다가는 많은 시간을 지체해야한다고 생각한 때문이며(Keil), (2) 이런 일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직접 말해야만 문제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저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그 발을 안은지라 -

수넴 여인이 엘리사의 발을 안은 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심정의 간절함을 나타낸다(Pulpit Commentary).그런데 게하시가 그녀의 행동을 막으려고 했던 것은 (1)이와 같은 방법으로 선지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례한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며(Keil & Delitzsch) (2) 선지자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요 4:27). 한편 여인이 엘리사의 발을 안은 행위에 대해 혹자는 '큰 슬픔에 사로잡혀서'(Lange), 혹은 '불안을 더이상 자제할 수 없었기에'(Wycliffe)라고 설명하지만 이러한 의견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그녀의 믿음으로 미루어 살필 때(10,13,22절) 그녀는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여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큰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존경하는 사람,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동양에서 흔히 하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방할 듯 싶다(Pulipit Commentary).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

본절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임하고 있지는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3:15).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즉 어떤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실 때에만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와 바울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1)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모친 마리아의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4)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께서도 성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와 일치되게 행하셨음을 보여준다. (2)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심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의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가도록 인도하셨다(행 16:6-10). 여기에서 우리는 위대한 사도 바울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시기까지는 자신의 뜻을 따라 행하려고 했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계획과 정하신 때에 맞춰 주어진다(전 3:1;행 1:7). 그러므로 자신이 원하는 때면 언제든지 예언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에 대한 신중한 경계가 성도들에게 요청된다.






 

28. 여인이 가로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

여인은 엘리사에게 자기의 아들이 죽은 사실을 힐책의 표현을 써서 간접적으로 알리고 있다(Pulpit Commentary). 사실 여인은 애초부터 자식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자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그녀는 한없이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식이 죽은 마당에 처음과 같은 원점으로 돌아가 '저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라고 하면서 탄원 섞인 말을 하는 것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역경과 고난의 어려움을 원망하기 이전에 겸손히 순종하는 여인의 아름다운 믿음을 볼 수 있다.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

이 말 속에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하나님의 사람에게 은혜를 바라는 간절한 요청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즉 16절에서 '속이지 마옵소서'라고 말했을 때는 자신이 아이를 얻을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무슨 일로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아들이 주어지는가 했더니 역시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구나하는 애탄이 섞인 말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이 없을 때보다 하나 있는 아들 자식을 잃었을 때의 슬픔이 몇 십배로 더 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축복으로다시 살려달라는 요청이 내포되어 있다.





 

 

29.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찌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인사하지 말며 -

엘리사가 이렇게 명령한 것은 동양인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인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일을 지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Thenius, PulpitCommentary)만은 아니다. 그것은 (1)외적인 상황을 핑계로 게하시가 이적 수행에 실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Keil), (2) 게하시로 하여금 온전한 기적 성취를 위해 기도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C. Lap), (3) 허영심이 많은 그가 여행의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함으로써 스스로 이적을 행하는 것인양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해(Theodoret) 그렇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에서 '허리를 묶는다'라는 표현은 행동의 신속함을 위한 당시의 습관을 반영한 말임과 동시에 마음을 가다듬고(벧전 5:15) 진리에 굳게 선다(눅 12:35)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

엘리사는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 게하시를 통하여 지팡이만 보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은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로서 지팡이가 선지자의 임무를 대행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에 그렇게 했다. 왜냐하면 그 지팡이는 여행용이 아니라 왕의 홀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지자적인 은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출 4:17,20;Lange). 그리고 또한 엘리사가 취한 이러한 조치는 지팡이 자체에 어떤 신비적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징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나타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선지자로서 갖는 겸손의 발로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상징적 행위를 아이에게 덮치고 있는 사망을 저지하기 위함이라는 혹자의 주장(Wycliffe)에 대해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30. 아이의 어미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좇아가니라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 -

이러한 수넴 여인의 믿음에 찬 고백은 순전히 그녀의 신앙에 기인한 것인데 이는 엘리사가 자신의 스승 엘리야에게 했던 신앙 고백과 같은 것이다(2:2;4:6, Pulpit Commentary, Word Biblical Commentary).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

'제자 게하시가 대신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Wycliffe), 혹은 '자신을 따라 나설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Pulpit Commentary)라는 의미이다. 이는 게하시에 대한 불신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만을 의지하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과 사태의 긴박성를 나타낸 것이다.






 

31. 게하시가 저희의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는 모양도 없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가로되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

게하시가 지팡이를 죽은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사실을 갖고 주석가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카일(Keil)은 게하시가 엘리사의 명령대로 충실히 수행했으나 아이를 살리려는 그의 노력은 무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 p. 313). 또 랍비들의 주장에 따르면 게하시가 엘리사의 명령대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속히 가라는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것이다. 한편 데오도르(Theodoret)는 야심과 허영심이 강한 게하시가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이 위임 받은 하나님의 일을 자랑했다는것이다. 그러나 게하시가 아이를 살리는 일에 성공하지 못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있다. (1)엘리사가 수넴 여인과 함께 가기로 작정한 직후 게하시의 위임은 무효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게하시가 아이를 살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2) 엘리사가 준 지팡이에 대해 게하시는 어떤 마술적인 힘이 그 지팡이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게하시는 그 능력을 속히 나타내기 위해서 미리 앞서 간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능력을 남에게 위탁할 권세를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위임한 것은 엘리사의 실수라는 혹자의 주장(Wycliffe)은 우리가 고려할 문제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은 게하시와 같은 불신앙이 아무런 이적을 행할 수 없음을 보여 줌으로 인해 여호와께 대한 참된 신앙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엘리사가 집에 들어갔을 때 아이는 자기 어머니가 눕혀 놓은 엘리사의 침상 위에 그대로 있었다(21절). 그리고 엘리사는 외부의 방해를 막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위하여 문을 닫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이와같은 엘리사의 신중한 태도는 여호와께 대한 그의 신앙이 얼마나 진지하였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본문 33절에서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었다'라는 표현은 죽은 아이를 산 자, 즉 잠자는 사람으로 간주한 것이다(Matthew Henry, Vol. , p. 730).




 

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본절은 엘리사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취한 행동에 대한 묘사로 왕상 17:21에서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살릴 때보다도 훨씬 더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리스도가 행한 이적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곧 자신이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다 가지신 분이시기에 그는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셨다(막 5:39-42;눅 7:13-15;요 11:43,44). 그러나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의 능력에 기인한 이적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한 바대로의 응답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행한 것과 같은 죽은 자를 살리는 동일한 이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한편 엘리사가 내려서 집안에서 한 번 이리저리 다니고(35절)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한번은 이쪽으로, 또 한번은 저쪽으로'라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엘리사가 크게 감동되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다(Wycliffe)는 의미보다도 '아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다닌 것'을 의미한다.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서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가로되 네 아들을 취하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방에서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엘리사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 참으로 27절에서 엘리사에게 원망하며 발을 안던 모습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수넴 여인이 본절에서 취한 행동은 엘리사에게는 존경과 감사의 표시였으며 여호와께는 찬양의 표시였을 것이다(시 110:4;요11:41).




 

 

 

🟠🔴
🟢


🟣
하나님의 속성/성품:
영, 지혜, 능력, 말씀, 
예언, 은사, 뜻, 계시,
계획, 영원, 축복, 진리,
이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확신, 섬김, 믿음, 직감,
의지, 존경, 겸손, 순종,
기도, 선지자, 상징, 
신중함, 찬양, 감사,
🔵 
하나님 찾기.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계획과 정하신 때를
믿고 기다리자.🩸✝️
🌱🌿🌳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 마음과 본문의 수넴 여인과 같이 위기의 순간에도 먼저 주님을 찾고 의지하는 참 신앙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VL5XucAi8I

이쁜찬양~💖🎶

 

 

개인 구원에 임하는 먹구름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8)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를 개인적으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렘 39:18)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든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 재산과 소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마음을 쏟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포와 마음의 상처와 걱정이 밀려올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내적 먹구름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할 때는 우리 자신을 챙길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요약하면 당신이 공정하게 대우를 받느냐 마느냐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의를 바라는 것은 주를 향한 헌신에서 빗나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세상에서 결코 공의를 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공의를 베푸는 일은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만일 우리가 공의를 바라면 우리는 곧 불평하게 되고 자기연민의 불만족에 빠져들게 됩니다.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지?”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했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던, 그것이 불의하던 불의하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계속 꾸준하게 내가 너에게 하라고 한 것을 하거라. 내가 네 생명을 보호하리라. 만일 네가 스스로 너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면 너는 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 중에 가장 경건한 사람도 이 점에서는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대신에 상식을 왕으로 모시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표를 붙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의지합니다.(잠 3:5-6)

https://reformedkjy.tistory.com/9669

 

6월 27일 주님은나의 최고봉 "개인 구원에 임하는 먹구름(The Overshadowing Personal Deliverance)" by 오스왈

개인 구원에 임하는 먹구름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8)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를 개인적으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reformedkjy.tistory.com

 

 

 

 

 

 

https://i.pinimg.com/564x/88/d5/2d/88d52d3ca56440003d62a4638bff5aae.jpg

굳이 썬그라스를 끼는 이유가 뭘까? 파카님은 너무 눈이부셔~🦙💖

 

 

 

https://i.pinimg.com/564x/1b/32/c8/1b32c821405dc89047ab380a85e7d197.jpg

 

용이 있어요 ~ 멋지면 다에용🧸💖

 

 

 

 

https://i.pinimg.com/564x/1f/7e/02/1f7e026f8b228345a50fb3cf90b2398c.jpg

 

남미 미남씨의 미의 미로로 되어있는 바다의 파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데요~💖👼🧸

 

 

 

 

 

 

https://i.pinimg.com/564x/7f/30/8b/7f308b0f7c8ecf558bbc35629fe32dce.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