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삶 QT👼열왕기하 5 : 1~14🍑사랑의 권면과 설득, 순종을 통한 치유 본문
https://tripol.tistory.com/466
열왕기하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아람 -
'셈족'의 후예로서 '수리아'라고도 불린다. 유목 민족이었던 그들은 B.C.13세기 경에 힛타이트의 영토였던 다메섹에 정착했다. 북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우호 관계, 혹은 적대 관계를 맺었다(16:5;왕상 15:18-20). 특별히 상업에 재능을 보여 각지를 돌아 다니며 통상을 벌였기 때문에 그 언어가 동방 무역 세계의 언어가 되었다(18:26;사 36:11;스 4:7;단 2:4).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된 후 신약시대에는 아람어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었다(마 27:46;막 5:41;7:34).
아람 왕의 군대 장군 나아만은 -
여기서 아람 왕이란 직접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그 이름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6:24과 8:7에 등장하는 벤하닷I세(Ben Hadad I세, B.C. 900-860)와 동일 인물로 알려져 있다(T.R.Hobbs). 그리고 본장에 기록된 사건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계속적인 전투중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평화 기간에 발생한 것으로 추측한다(K.W.B hr). 왜냐하면 벤하닷 I세가 생존한 시기에는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가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본장의 중심 인물인 나아만의 이름은 우가릿어(Ugarit)로서 '공평한', '은혜로운'이라는 뜻(Gray)인데 혹자는이 이름이 아람인이 섬기는 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Ewald)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당시의 아람에서 군대 장관이라는 직책은 군대의 총지휘권을 가진 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 아래에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라는 직위 서열로 군대 조직이 구성되어 있었다(1:9 주석 참고).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
여기서 '크고'라는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전장(前章)에서 수넴 여인을 가리킨 단어인 '귀한'(4:8)이라는 말과 동일한 용어 '게돌'(*)이다(4:8주석 참고). 그리고 '존귀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뜻은 '한 권위자가 스스로 얼굴을 들어 올리는 행위'에서 나온 것(Gray)인데 일반적으로 존경 스러움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인다(3:14). 이처럼 나아만은 벤하닷의 군대 장관으로서 큰 영화를 누렸던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영예를 얻었다', 혹은 '존경을 받았다'라고 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
본절에서 이방인이 얻은 승리를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한 결과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구약 전반에서 보더라도 참으로 특이하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논리적 결과이다(T.R.Hobbs). 즉 이는 온 천하에 유일한 신(神)이신 여호와께서 이방인의 삶까지도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나타낸 독특한 히브리적 개념인 것이다(암9:7;사10:13,Lange Commentary). 그래서 여기에 특별히 언급된 아람의 구원은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얻은 승리를 언급한 것으로 해석된다(T.R.Hobbs). 한편 요세푸스에 따르면 나아만은 아람의 배반자인 이스라엘의 아합 왕(B.C.874-853)을 살해한 자였다고 한다. 또한 역대하 18장의 아람어 탈굼(Targum) 역본에도 이와 동일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
나아만은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많은 공적을 세운 능력있는 군대 장관으로서 영화를 누렸지만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걸리고 만다. 그렇지만 문둥병자를 사회에서 추방하는 이스라엘(레 13장-14:57)과는 달리 아람에서는 문둥병자라도 왕과 아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Keil &Delitzsch, Vol. , p.317).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에까지 도움을 구하러 온 것을 보면 그의 문둥병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대단한 지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Thenius). 이러한 사실에 대해 혹자는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서 앗수르를 치는데 더이상의 공헌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Wycliffe). 한편 본절에서 '큰 용사'라는 표현은 '좋은 군인'이라는 의미 이상의 아무런 뜻이 아니다(Pulpit Commentary).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
여기서 '전에'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전치사는 언제라고 분명히 그 시기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본장의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의 '때'를 가리킨다. 아합 왕이 라못 길르앗을 원정한 이후로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는 조그만 싸움들이 잦았다. 본절은 그러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해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떼를 지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르다', '침투하다'라는 어근 동사 '가다드'(*)의 변형인 '게두딤'(*)으로서 흔히 '몰래 습격하는 비적 떼'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삼상 30:8,15). 또한 헬라어 역본들에는 '모노조노스'(*)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벨트를 하나 밖에 차지않은 가벼운 복장 차림을 한 군대의 병사들을 가리킨다(3:21 주석 참고). 그리고 중세 헬라어 역본들을 보면 '도적 떼'라는 뜻의 단어 '페이라테리온'(*)이 첨가되어 아람 사람들의 떼가 비적, 혹은 도적 떼임을 더욱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작은 계집 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
고대의 도적 떼들은 보물의 약탈뿐 아니라 종으로 삼을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일이 성행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본절에 언급된 작은 계집 아이는 자신을 잡아온 사람들에게까지 탁월한 용기와 자비를 보이고 있다. 그녀는 고향과 친지들과 떨어져 낯선 곳에서 고생하고 있지만 괴로워하지 않고, 복수하기보다는 오히려 친절을 베푼다(마 5:44).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본절의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Wycliffe).
수종들더니 -
이것을 히브리어 문자대로 직역해 보면 '앞에 있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4:12,15에 기록된 '앞에 서 있다'라는 말의 단축형으로 보기도 하며 '존경'을 표시하기도 하며 심지어 '숭배'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T.R.Hobbs). 그 뿐만 아니라 이 용어는 맹세를 나타내는 구문에서도 사용된다(5:16 '나의 섬기는').
3.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
이는 엘리사 선지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엘리사는 사마리아에 집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6:32) 그곳에서 때때로 거주했기 때문에 그렇게 칭함을 받은 것같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
하나님은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 잡은 '작은 계집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명성이 이방 땅에도 전파되도록 하셨다. 이 약한 소녀를 통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이방에까지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벧전 2:1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안목으로 판단했을 때 지극히 비천한 자를 종종 들어 쓰시며(고전 1:28) 그들을 사용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이러이러 하더이다 -
이와 같은 표현은 대화시에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서 전기 선지서에 많이 나타난다(9:12;수 7:20등). 이처럼 나아만이 이스라엘에서 온 계집 아이의 말을 왕에게 전함으로 인해 엘리사 선지자의 명성은 더욱 더 널리 아람 땅에 전파된다.
5. 아람 왕이 가로되 갈찌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벌을 가지고 가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
본절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이 아람 왕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총애를 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K.W.B hr, Pulpit Commentary). 한편 아람 왕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왕의 이름을 본문에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엘리사가 활동한 것은 여호람,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4대에 걸친 시기, 즉B.C.848-797년이었다. 그러나 본장에 등장하는 아람 왕이 8장에 나오는 벤하닷 I세와 동일인이라고 간주할 때 본장의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벤하닷 I세가 암살되기 이전,즉 B.C. 842년 이전이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그때에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은 바로 여호람이 되는 것이다(T.R.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p.63-64).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 -
나아만이 이스라엘을 향해 떠날때 가지고 간 선물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한 달란트는 3,000세겔에 해당되며 무게로는 약 34.27kg에 해당되므로(출 38:25,27;왕상 16:24;계 16:21) 은 십 달란트는 약342kg에 해당된다. 그리고 금 육천 개는 두 달란트에 해당되며 무게는 약 68.4kg에 해당된다. 또한 이것을 카일(Keil)의 계산법에 따라 환산해 보면 은 십 달란트는 옛 독일의 화폐로 약 25,000탈러(Thaler)이고 금 육천 개는 약 50,000탈러이다. 그러니까 영국 화폐는 약 3,750파운드와 7,500파운드에 각각 해당된다. 한편 그가 선물로 갖고간 의복 열 벌은 매우 높은 가격의 선물로서 상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한 방법이었던 근동 지방의 풍습을 반영한 것이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풍속과 습관은 오늘날까지도 이 지방에서는 지속적으로 내려온다(Keil & Delitzsch). 이처럼 나아만이 가지고 간 선물은 상당한 것으로 그 당시 나아만의 권세와 부귀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 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본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외교문서에서 쓰는 공식적인 용어이다(T.R.Hobbs). 그리고 본절에 나타난 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엘리사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아람 왕이 엘리사를 일종의 '우두머리 마술사나 이스라엘 종교의 대제사장'(Menken)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왕에게 부탁하면 왕의 수하에있는 이 선지자가 병을 고쳐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고쳐주소서'라는 표현은 '모으다', '회복시키다', '제거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사프토'(*)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병의 근원을 뿌리채 뽑아 달라는 탄원과 함께 간절한 열망을 내포하고 있다.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자기 옷을 찢으며 -
본절에서 이스라엘 왕은 극한 슬픔과 분노의 표현으로 옷을 찢는다(창 37:29; 44:13;민 14:6;수 7:6;삿 11:35). 이것으로 보아 당시의 이스라엘이 아람의 위압에 눌려 있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이 어렇게 분노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아람 왕의 말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왕은 아람 왕의 말을 왕 자신이 그 문둥병을 고쳐 달라는 말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 이 병은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과 같이 중한 병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신32:39;삼상2:6). 따라서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신에게 이러한 중대한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공연히 시비를 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K.W.B hr, Pulpit Commentary). (2) 엘리사가 이적을 행하는 줄 몰랐던 왕으로서는(8절) 이렇게 오해한 것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벤하닷은 아합 왕 때에도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왕상 20:3-6). 한편 히브리 민족은 옷을 찢는 행위 이외에도 슬픔이나 분노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에 티끌을 뿌리거나(수 7:6) 흙이나 재를 뒤집어쓰기도 하였다(삼하 13:19;에 4:1,3;욥 2:8). 그리고 정수리의 머리털을 면도해 버리거나(렘 7:29) 얼굴과 가슴을 치고 뜯기도 하였다(눅 18:13).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그가 있던 곳은 사마리아로 추정된다(G.Rawlinson). 따라서 요단 강과는 어느정도 떨어진 곳(이십마일 정도)이었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1:6;3:11;8:7-15)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계심을 이방인 나아만을 통해 알게 할 것입니다'(K.W.B hr) 혹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 마소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나아만을 구원하셔서 참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있음을 나타낼 것입니다'(Wycliffe)라는 뜻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근심하게 되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심리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압박만 더욱 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근심을 떨쳐 버려야 한다(벧전 5:7).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
애굽으로부터 말과 병거를 수입한 아람은 전쟁 뿐 아니라 평화적인 용도, 즉 사람과 물건의 운반을 위해서도 말과 병거를 사용하였다(왕상10:29). 한편 애굽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일찍 이러한 말과 병거의 사용이 있었다(창41:43;50:9).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
여기서 나아만이 취한 태도는 4:15에서 수넴 여인이 취한 태도처럼 존경의 표시로 볼 수는 없다. 나아만은 자기의 직책과 부귀 영화로 인한 교만 때문에 말에서 내려 들어가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PulpitCommentary)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을 고치려는 간절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교만한 나아만을 맞이하러 엘리사 선지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부귀 영화로 구원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K.W.B hr).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민 12:12) 문둥병자 나아만은 오히려 선지자 엘리사를 교만하다고 진노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11,12절).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고침이 선지자의 어떤 마술적인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겸손함으로 순종한 결과라는 사실을 후에서야 깨닫게 된다(Keil).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
본절에 나오는 엘리사의 명령은 율법에 준한 것이지만(레 14:8,9) 그 의미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율법에서 몸을 씻는 것은 문둥병이 완전히 고쳐지고 난 이후 깨끗케 되었음을 증거하는 상징적 의식 행위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깨끗하게 되기 위한 예비적 동작으로 몸을 씻는 행위를 명령한 것이다(T.R.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64). 이와 비근한 예로 예수께서 한 소경을 치료하실 때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고 하시니 이에 소경이 즉시 순종하여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져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게 한 것은 치료를 위한 행위나 치료 후 행하는 의식적 행위에 대한 명령이라기보다는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일곱 번이나 씻으라고 한 것은 완전한 순종에 대한 요청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인내까지도 포함된 명령인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하다', '만족시키다'란 뜻의 히브리어 '솨바'(*)에서 온말이 '일곱'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을 일명 '완전 수'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이것은 여리고 성을 칠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말씀(수6:3-5)과 3년 6개월 동안의 가뭄 끝에야 엘리야가 자기 사환에게 비 올 증거를 찾도록 명령한 것(왕상 18:43)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곱 번씩이나 같은 행위를 하게 한 것은 사람들이 흔히 소유하지 못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만 치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내용들로 살펴볼때 이와 같은 엘리사의 명령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1)나아만의 교만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다.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 장관인 반면에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에 불과했으므로, 나아만이 교만한 자라면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결코 당신의 능력과 은총을 베푸시지 않는다(잠 8:13;16:5;눅 16:15). 2)나아만의 문둥병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치유됨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불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가지 주술 행위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러한 처방은 커녕 아주 평범하게 여겨 오던 혼탁한 요단 강가에서 씻으라는 처방을 했다(12절).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당처(當處) -
이 말은 히브리어 '하마콤'(*)을 번역한 용어인데 이는 '일어 나다'란 뜻의 '쿰'(*)에서 파생한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질병으로 인해 부어 오른 바로 그곳', 즉 '환부'란 의미이다.
손을 흔들어 -
이러한 표현은 흔치 않다. 레 14:12에서 여호와 앞에 요제를 드릴때에 흔들어 드린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본절과의 연관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선지서에는(사11:15) 이와 같이 손을 흔드는 행위가 심판과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T.R.Hobbs).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손을 흔드는 행위는 나아만이 알고 있는 고대 근동 지방의 주술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지도 않고 이러한 주술적 행위도 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였던 것이다(Menien). 한편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노를 발한 원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엘리사가 친히 나와 자기를 맞이하고 '당처', 즉 헌데 난곳을 손으로 만지고 병을 제거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2)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는 것, 다시 말해서 침례하듯이 몸을 잠기게 하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이야기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병이 물에 씻어 낫는다면 요단 강같이 적고 더러운 물보다는 차라리 맑고 큰 다메섹의 강들이 더 효력을 나타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12.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
여기에서 '아마나'(*)는 시리아 역본과 아람어 탐굼 역본에 의한 것이며 히브리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에는 '아바나'(*)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베트'(*)와 '멤'(*)의 혼동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Keil & Celitzsch, Vol. , p.318).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은 이것 둘 다를 사용하고 있다. '아마나'는 다메섹의 중심부에 있는 안티레바논(Anti-Lebanon) 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오늘날의 바라다(Barada)와 동일한 강이다(G.A.Smith, TheHistorical Geography of the Holy Land, p.429-430). 그리고 '바르발'은 다메섹 지방에 있는 또하나의 중요한 강으로서 다메섹에서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오늘날의 '와디아와이'(Wadi Awaj)와 동일한 강이다. 이 두 강 중에 특히 아마나 강은 대단히 맑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물이 찬 강으로서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에게는 '크리소로아스'(Chrysorrhoas), 즉 '황금의 강'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요단 강은 깊고 서서히 흐를 뿐만 아니라 진흙 색을 띠는 혼탁한 강이다(Robinson). 그래서 나아만이 요단 강보다 자기 나라의 강들이 더 좋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Keil &Delitzsch, Pulpit Commentary).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
나아만의 이런 생각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적이 오직 순종함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웠다(신 30:8;비 11:8).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했을 때, 아브라함이 자신의 합리적인 생각을 따라 불순종했다면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창 22:12-14). 그리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대에 높이 매달린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살것이라고 하셨다. 이때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 본 자는 모두 살았다(민 21:6-9). 이것은 구원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이다(요 3:14),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롬 3:21-24;엡 2:8).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위해 쉬운 방법으로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은 이성(理性)만 고집하여 하나님의 능력은 물론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구원마저도 거부해 버린다. 그러므로 본절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는 진리가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본절은 조건을 나타내는 전치사 '임'(*)이 없는 조건문으로서 나아만이 종들이 행한 지혜로운 구변이 나타나 있다(Keil & Delitzsch).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태도는 주인을 노하게 하지 않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였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여'라는 존경과 충성을 포함한 본절의 표현은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공손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6:21;삼상 24:12, Lang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이와 같이 오늘날의 성도들도 남을 책망하거나 충고할 때는 틀린 점에 대해서 비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존경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삼하 12:1-15).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
'내려가서'라는 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1)나아만이 요단 강으로 내려갔다는 뜻이다(Keil & Delitzsch,Lange, Pulpit Commentary). 당시 엘리사가 있던 곳은 사마리아 땅의 고지대이므로 나아만은 상당한 거리를 여행하여 요단 강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2)나아만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였다는 뜻이다(T.R.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65).
몸을 잠그니 -
여기서 '잠그다'라는 말은 몸을 물에 완전히 적시거나(왕하 8:15) 물 속에 몸을 전부 집어 넣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10절의 '씻다'라는 단어와는 뜻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또한 모세 오경에서는 이 단어가 '피에 잠그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레 14:6;신 33:24;삼상 14:27). 따라서 나아만은 선지자의 명령(10절)보다 더 철저히 몸을 씻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아만의 병이 치유가 되고 그 살이 어린 아이와 같이 부드럽게 된 것은 그의 철저한 순종적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일곱 번'은 나아만이 엘리사의 요구에 얼마나 철저히 순종했는가를 나타냄과 동시에 나아만의 문둥병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일곱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속성/성품:
구원, 섭리, 주관, 유일한 신,
승리, 주권, 절대적인, 역사,
나라, 구원, 전능하신, 능력의,
치유, 이적, 완전, 은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친절, 용기, 자비, 하나님의
사람, 전파, 존경, (참)선지자,
(철저한) 순종, 겸손, (전적)의지,
깨달음, 공손, 충성,
진심어린 충고/책망
🔵
하나님은 낮은 자를 들어 쓰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신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근심을 떨쳐 버려야 한다.
즉시 순종하기
믿음과 인내
자신 또는 세상(인간)적인 이성이나
합리성을 따져서 불신하기 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여
순종해야 한다.🩸✝️
🌱🌿🌳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는 인간적인 이성으로는 판단할 수 없이 크고 깊은 은혜로 역사하심을 기억하며 이해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과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wA2kTgwP_I
훈련의 방향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30)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오른손을 잘라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네 오른손이 나와의 동행을 방해하거든 잘라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당신이 맘대로 행하여도 완벽하게 합법적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주님께 집중하려 할 때 합법적이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당신의 오른손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된다면 잘라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훈련은 인간에게 충격을 주는 가장 혹독한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함으로 변화시킬 때, 그 삶의 특징은 불구로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감히 해서는 안 되는 수백 가지의 것들이 생겼습니다. 이런 것들은 과거 당신의 세속적인 눈에는 당신의 오른손과 오른눈처럼 여겨지던 것들이었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말합니다. “도대체 그것이 뭐가 나쁘다는 것입니까?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성도로서 불구의 삶으로 시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나 불구지만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사람의 눈에 아름답지만 하나님의 눈에 불구인 삶보다 낫습니다.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성령으로 당신의 많은 행동들을 막으십니다. 그 행동들은 당신에게는 합당치 않지만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완벽하게 합당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당신에게 제약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들을 비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영적 삶의 출발은 불구의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벽하게 온전해진 삶의 그림을 제시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https://reformedkjy.tistory.com/9673
https://i.pinimg.com/564x/b8/1c/93/b81c9375e5f4254957ddec91fb518207.jpg
https://i.pinimg.com/564x/46/c8/1f/46c81f1fb9f3a5a5a9fea20dd8294057.jpg
https://i.pinimg.com/564x/3c/c5/81/3cc5812e7915a50eb5914304b0183f9e.jpg
https://i.pinimg.com/564x/f4/89/35/f4893501fbdb57573eb0a696a7e5334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