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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6 : 1~14🍑일상을 돌보시고 지키시는 하나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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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6:1.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1-7절까지의 기사는 4장과 마찬가지로 연대를 추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이 익명의 선지자의 생도들로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 기사를 4:38-44절과 연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K.W.B hr).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
이 기사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관해서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는 것 같다. 카일(Keil)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장소를 2:1에 나오는 길갈이라고 주장(Thenius)하는데 그것은 요단 강 근처의 길갈을 잘못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카일은 요단 강과 가까운 여리고가 이 기사의 배경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sch, Vol. ,p.323:Pulpit Commentary). 한편 본절의 '좁으니'란 말은 히브리어 '차르'(*)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꺾쇠로 죄다', '고통을 겪다'는 뜻의 '차라르'(*)에서 온 용어다. 이러한 어원적인 의미로 살펴볼 때 그 장소가 매우 비좁고 불편했던 처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
요단 강변에는 숲과 나무들이 울창하여 버드 나무, 포플라나무, 석류 나무등 건축물의 목재를 충분히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D. Baly, TheGeograply of the Bible, p.92-95;렘 49:19;50:44;슥 11:3).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
이 구절은 선지자의 생도들 모두가 사역에 동참하여 협력해서 금방 선지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성도들의 협동 정신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갈6:10).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
이 말은 배움의 장소를 옮기는데 있어서 먼저 스승의 승인이 있어야 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엘리사는 생도들의 요구가 타당한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승락한 것이다.
3.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
'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벧'(*)은 '노예', '신복'으로 번역된다. 이처럼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 앞에서 자신들을 '노예'와 같은 뜻의 단어로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선지자의 무리 가운데서 엘리사의 위치와 권위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생도들이 제목을 구하기 위해 요단 강으로 가면서 엘리사에게 동행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1) 그들은 자신들이 벌목을 하는 중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엘리사가 자기들과 동행함으로써 그들은 안심놓고 벌목 작업에 착수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행 20:34). 실제로 그들이 엘리사와 동행했으므로 하나님의 이적으로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5-7절). (2)엘리사가 자기들과 동행함으로써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줄 것으로 기대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요청은 매사에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한 사실에서 기인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도 적용된다. 즉 성도들은 어떤 일을 착수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께서 그일을 이루어 주는 분이심을 믿고(잠 16:1) 그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시 56:4). 이것이 곧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다(잠 3:6).
내가 가리라 하고 -
생도들의 요청을 간단히 응낙한 엘리사의 대답을 통해 그의 성격을 간파할 수 있다. 즉 그는 말과 행동이 신속하고, 동일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던 면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Pulpit Commentary).
4.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5.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나무를 베더니...나무를 벨 때에 -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앞뒤 절이 동일하게 '나무를 베다'로 번역되었으나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서로 다르다. 즉 4절의 '나무'는 원어로 '에침'(*)으로서 '일반적인 나무'를 가리키는 반면 5절의 '나무'는 '코라'(*)로서 '들보', '서까래'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공동 번역과 RSV에서는 이를 '나무'와 '들보감'(log)으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한편 선지 생도 중 한 사람이 나무를 찍다 도끼를 물에 빠뜨린 것은 큰 나무를 무리하게 찍다가 생긴 일로 생각된다.
도끼가 -
문자적으로는 '그 쇠가'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애굽으로부터 쇠를 제련하고 용구를 만드는 법을 배워 왔기 때문에 일찍이 모세 때부터 쇠로 도끼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신 19:5).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
이 비판의 외침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그리고 여기서 '빌어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울'(*)은 '애걸하여 빌리다', '구걸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도끼를 물에 빠뜨린 생도는 너무 가난하여 도끼를 살 수 없어 이웃에게 구걸하다시피 애걸하면서 도끼를 빌어온 것이다(Wycliffe). 한편 율법에 따르면 이웃에게 빌어온 것을 상하게 하거나 잃어버리면 그에 대한 대가로 적절한 배상을 하게 되어 있었다(출 22:14). 그런데 이렇게 도끼 하나도 살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는 생도가 그 도끼 주인에게 배상을 해야하니 얼마나 암담하였겠는가!
6.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7.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
본절에 기록된 이적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자연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첫째, 엘리사는 자기 눈으로 물에 있는 도끼날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도끼날 밑에 나무조각을 끼워 수면으로 끌어 올렸다(Von Gerlach)는 것과 둘째, 나무가지를 갖고 도끼날 구멍에 끼워 건져냈다는 것이다(Thenius). 그러나 '떠오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체프'(*)는 '넘쳐흐르다', '덮다', '수영하다'라는 뜻의 동사 '추프'(*)의 허필형(Hihpil:사역형 능동)으로서 쇠도끼를 직접 물 위에 떠오르게 만들었다는 뜻이다(신 11:4). 그래서 선지자의 생도는 떠오른 도끼를 물에서 집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Keil). 한편 엘리사가 행한 이 이적은 예수가 고기의 입에서 금화를 꺼낸 이적(마 17:27)이나 오병 이어의 이적(눅 9:12-17)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의 현세적인 필요들을 채워 주시는 분이심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본절은 단순하고 사소한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 주고 있다.(Wycliffe).
8.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그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
본절은 이 사건에 대해서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열왕기서 기자가 연대기 순으로 본서를 기록하지 않고 비슷한 주제들 끼리 묶어 기록하기를 좋아했다는 증거가 된다(T.R.Hobbs). 한편요세푸스(Josephus)는 이 전쟁을 여호람과 벤하닷의 전쟁이라고 한다(Antipuities ofthe Jesus, , p.51-78). 그러나 23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람보다 국력이 강한 때임을 암시하고 있어서 요세푸스의 견해는 옳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13:3, 14-19,22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람의 손에 붙이셨다고 하여 본 기사와 대조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레이(Gray)는 이기적인 요소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는 다른 면모를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기인 B.C.797년에 일어난 것이며 아람 왕 하사엘 때의 전투라고 한다. 그러나 여호람의 통치 시기에도 이스라엘의 정국이 항상 안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그레이의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따라서 요세푸스의 주장처럼 본절을 여호람 왕과 벤하닷의 전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Lange Commentary). 한편 나아만 사건이 있은지(5:5,6) 얼마되지 않아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이런 조그만 전쟁이 잦았음을 감안해 볼 때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G.Rawlinson). 그리고 본절에서 언급한 '진을 치리라'는 말은 9절의 말씀을 의거해볼 때 '복병을 두리라'(Ewald, Wycliffe)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않다','진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하나'(*)에서 파생한 '테하노트'(*)이기 때문에 본 번역이 타당한 것으로 이해된다(K.W.B hr, Keil & Delitzsch).
9.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나오나이다
당시에 여호람 왕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3:2) 엘리사는 민족의 재난을 방관하지 않고 여호람 왕을 도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이와 같이 보임으로 인해 왕이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
어떤 학자는 아람의 전략에 대한 엘리사의 지식이 스파이 정보에 의존한 것처럼 말하나, 그런 것은 엘리사의 이적을 기록한 저자의 동기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특별히 2:19-6:22에 엘리사의 여러 가지 이적을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그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절의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라는 말은 '이곳을 소홀히 하지 마소서'(Keil & Delitzsch, Clericus), 즉 '이곳을 점령당하지 마소서'라고 해석 할 수도 있고 적군이 매복하고 있으니 '함부로 다니지 마소서'라고도 해석 할 수 있다(K.W.B hr,Pulpit Commentary, Thenius, Wycliffe).
10.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 두번이 아닌지라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
아람 군사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을 치고 숨어 있는 곳을 미리 알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경고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람의 공격은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그 기회를 틈타 오히려 기습을 가하여 아람을 패주(敗走)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일이 한 두번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있어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람에게는 큰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11.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하느냐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
여기서 '번뇌하여'라는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잇사에르'(*)는 '용기를 잃다', '태풍으로 바닷물이 출렁이다'(욘 1:11), '역경으로 마음이 흔들리다'라는 뜻의 '싸아르'(*)에서 파생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몹시 당황하여 안절 부절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엘리사로 인하여 아람 왕이 얼마나 곤혹스러워 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래서 급기야는 내부의 간첩을 색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엘리사의 명성을 듣지 못한 아람왕의 우매함은 패배를 자초할 수 밖에 없었다. 즉 그는 엘리사의 선지(先知)를 근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단순한 점술사의 점괘로 알았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12.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
엘리사의 명성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 아람에서도 자자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 나아만의 문둥병 치유나 그밖의 다른 이적적인 사건들이 아람에 전하여졌기 때문일 것이다(G.Rawlinson). 그리고 원문을 보면 '선지자' 앞에 정관사 '헤'(*)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전쟁에서 이상한 연유로 자주패할 뿐만 아니라 엘리사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를 특별한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Pulpit Commentary).
13.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보내어 잡으리라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리사가 도단에 있나이다
엘리사가 도단에 있나이다 -
도단은 '두 우물'이란 뜻으로 오늘날 '텔 도단'(TellDothan)으로 알려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사마리아에서 동북쪽으로 약 18km정도 떨어진 도단 계곡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Word Biblical Commentary). 또한 이곳은 세겜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창 37:14)으로서 요셉이 자기 형들에 의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팔렸던 장소이기도 하다(창 37:17). 한편 본절에서 아람 왕이 도단에있는 엘리사를 잡으려고 한것은 바로 자신들의 비밀 계획이 엘리사에 의해서 폭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K.W.B hr, G.Rawlinson). 한편 다음 지도는 도단의 위치를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많은 군사 -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하일 카베드'(*)는 그 의미가 대단히 모호하다. 왜냐하면 18:17에서는 '보통 군대의 규모'를 가리키고, 왕상 10:2에서는 '많은 수의 수행원'을 ,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큰 군대', 혹은 '강한 군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후 문맥과 23절의 내용을 살펴보아 '일반적인 대규모의 군대'로 이해함이 좋을 것 같다(T.R.Hobbs).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
아람 왕은 단지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하여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을 다 에워살 만큼 많은 군사들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많은 군대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을 힘으로 잡으려는 것은 무력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사4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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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이적, 필요를 채우시는, 구원,
보호, 선하신, 전지하신,
역사, 전능하신, 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스승, 협동 정신, 성도들,
배우는 일, 선지자, 경고,
하나님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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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어떤 일을 착수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께서 그일을 이루어 주는
분이심을 믿고 그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것이 곧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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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많은 이적으로 주님의 역사하심을 드러냈던 것처럼 오늘날 믿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예수님이 증거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는 은혜와 성령으로 다스려지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IrFZzlhvF0
불가피한 빚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26)
작은 구석에 지옥을 만들어둔 천국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순결하고 거룩하며 의롭게 만들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한순간도 성령의 세심한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당신의 죄를 책망하실 때 당장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재촉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끝까지 저항합니다. 따라서 불가피한 법적 절차가 진행되며 결국 당신은 감옥에 있게 됩니다. 당신은 이제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갚아야만 그 감옥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자비가 있으시고 사랑이 있으시단 말인가?”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사랑의 사역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순결하고 흠이 없고 깨끗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동안 보여왔던 죄성을 깨닫길 원하십니다. 그 죄성은 바로 자신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성향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그 죄성을 고쳐주시길 간절히 원한다면, 그분의 재창조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 후 당신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며 또한 이웃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이러한 바른길을 걸을 수 있도록 우주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실 것입니다. 지금 결정하십시오. “그래요, 주님. 저는 지금 그 편지를 오늘 밤에 쓰겠습니다. 그 사람과 지금 당장 화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의 복음은 의지와 양심을 위한 것이지 머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머리로 산상 수훈에 대해 따진다면 당신의 마음을 향하여 호소하는 주님의 메시지를 망쳐 놓는 것입니다.
“나는 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신은 당신의 빚을 청산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언젠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지금 당장 하십시오. 모든 영적인 요구에는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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