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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7 : 3~10🍑약자들을 통해 전해진 복된 소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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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7:3.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 문둥이들은 게하시의 아들들이라고 하는데(T.R.Hobbs)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존재라 하여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성 밖에서 살았으며(레 13:46;민 5:3) 친지들이 공급해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당시에는 성 안의 거주자들도 목구멍에 풀칠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음식 공급이 단절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문둥이들이 '성문 앞' 혹은 '통로'(hateway)에 있었다고 한다(Keil & Delitzsch, Vol. ,p.330).
4.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찌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찌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
주리니 -
이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은 '라아브'(*)로서 '시장하다','갈망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표현은 약간의 갈증이나 시장기가 아닌 배가 고파서 속이 쓰리며 기운이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
즉, 네 문둥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적군에게 항복하는 길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 길을 택했다. 여기서 '항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은 '탈주하다', '떨어지다', '눕다'라는 뜻 외에 '넘어가다' 라는 뜻도 지닌다(삼상 29:9;렘 39:9). 이에 따라서 70인역(LXX)에서는 '들어가자'란 뜻이 헬라어 '에이셀데인'(*)으로 번역되어 문둥이 네 사람이 아람에게 항복하러 간것이 아니라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들어간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KJV과 RSV도 70인역(LXX)의 이러한 번역을 지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에 가고자 한 행위를 반드시 항복하러 가는것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단순히 양식을 구하러 들어갔던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듯 싶다.
5.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 진 가에 이르러 본즉 그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황혼에 일어나서 -
본절에서 '황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네쉐프'(*)는 '해뜰 때' 나 '해 질 무렵'의 엷은 태양빛(twilight)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명', '황혼'등을 뜻한다. 그리고 본문의 9절과 12절을 근거로 해서 볼 때 '황혼'으로 번역하는 것이가장 적절하다(Keil & Delitzsch, Lang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6.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이는 주께서...듣게 하셨으므로 -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으로 향해 가는 것과 동시에 병거 소리와 말소리, 그리고 큰 군대의 소리를 아람 군대에게 듣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역사였다. 그 뿐만 아니라 3:22에서도 아람은 이와 유사한 방법에 의해 속임을 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가 되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나아만을 통하여 아람에게 승리를 주시기도 하셨으나(5:1) 또한 이와같이 패하게도 하시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소리의 근원을 산골짜기에 밀어닥친 바람에 기인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K.W. B hr, Wycliffe).그러나 '소리'(soun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로서 '인간의 음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억측에 불과하다(G.Rawlinson).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
여기서 언급된 '헷 사람의 왕들'을 초기 헷(Hittite)제국의 제왕들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B.C.1200년경 오늘날의 터어키(Turkey) 전역을 차지하고 있던 헷 제국은 앗수르와 해안에 퍼져있던 소수 민족들에의해서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왕상 9:21에는 솔로몬이 헷제국이 멸망한 뒤에 남아있던 헷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헷 문화는 아람 북쪽에 남아 소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헷족의 여러 왕들 또는 장군들에 의해 전해져 오다가 후에는 점차적으로 셈 문화에 병합되고 말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헷 사람의 왕들'은 바로 소규모 집단의 우두머리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Gelb,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2:612-615; O.R.Gurney, The Hittites, 39-46). 그리고 당시에 이들은 소규모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여 갈그미스 부근의 북 아람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니느웨 왕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왔었다. 그래서 이들이 이스라엘을 돕기 위하여 왔다고 아람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도망한 것은 당연하였다(G.Rawlinson). 또 본절의'애굽 왕들'이라는 복수 형태의 표현에도 상당한 논란점이 있다. 왜냐하면 애굽은 언제나 단일 왕 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당시 애굽 왕조의 분열로 부바스티스(Bubastis), 타니스(Tanis), 멤피스(Memphis) 지역을 각기 다른 왕들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들'이라는 복수 표현을 썼다는 해석이 있다(G.Rawlinson). (2)히브리 본문에서 '애굽'을 뜻하는 '미츠라임'(*)을 '무스리'(Musri)를 뜻하는 '무츠림'으로 읽을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T.R.Hobbs, Wycliffe). 왜냐하면 당시 무스리는 소아시아의 실리시아(Cilicia)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다수의 왕들이 복수제로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Gurney, The Hittites, p.42-43). 그리고 앗수르의 기록들을 보면 종종 애굽을 무스리라고 칭했는데 이렇게 명칭을 서로 바꾸어 혼용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무리없이 '애굽왕들'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무스리가 애굽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아람은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도와 자신들을 치려고 한다는 소문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으니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Herzog and Gichon, Battles of the Bible, p.233).
7.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황혼에 일어나서 -
5절과 비교해 볼 때 아람 군대가 달아난 시각과 문둥이들이 아람진으로 출발하기 시작한 시간이 거의 일치한다.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
그들이 왜 좋은 말과 나귀를 그대로 버려두고 달아났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들은 너무나 공포에 질려서 군장을 꾸릴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기드온의 300용사의 외침에 놀란 미디안 군사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였던 상황과 유사하다(삿 7:19-23).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은 당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으로 작용한다(시 76:12;요 2:11;습2:11). 그러나 당신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도움이 되시고(시33:20;46:1;121:1;146:5;사 50:7;고후 6:2), 피난처가 되신다(시 14:6;46:1;렘 17:18;욜 3:16). 또 혹자는 작전상 적으로 하여금 그들이 진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G.Rawlinson). 한편 나귀는 고대의 군대에 있어서 짐과 사람을 운반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으로 사용된 동물이었다.
8. 그 문둥이들이 진 가에 이르자 한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9.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본절에는 네 명의 문둥이가 아람 진영에 들어가서 취한 행동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1) 식욕을 채움:
이 식욕은 수면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문둥이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목숨까지 건 위험을 감행했다.
(2) 재물욕을 채움:
일단 식욕이 채워지고 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문둥이들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구를 위해 온 신경을 쏟으나, 그럴수록 탐욕으로 인한 공허감과 불만은 더욱 가중되어 간다(시 39:6;합 2:9;딤전 6:9-11). 이와 관련하여 예수께서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를 말씀하신 바 있다. 즉,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을 듣기는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에 비유된다(마 13:22). 그러나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같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아야 한다(마 6:25,31).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기본적인 것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마 6:32).
(3) 뉘우침:
문둥이들은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소위(所爲)를 뉘우치고 성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기 형제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둥이들의 행위는 엄청난 구원의 복음을 받은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우리들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복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추어 두기만 한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자기가 가지고있는 것까지도 빼앗길 것이다(마 25:29).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9:16). 한편 9절에 표현된 '아름다운 소식'은 히브리어 '베스라'(*)를 번역한 말로서 항상 좋은 소식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삼하 18:20). 그러나 여기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문둥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단순한 조국애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성 안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이때에 자기들만의 욕심을 채운다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벌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91). 그래서 문둥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선치 못하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히브리어 '로켄'(*)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자신들의 행위가' 적절치 못하다'는 뜻으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죄라기 보다는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자기 점검을 의미한다.
10. 드디어 가서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11. 저가 문지기들을 부르매 저희가 왕궁에 있는 자에게 고하니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
여기서 '문지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쇼에르'(*)는 성문을 수비하는 병사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다(Keil). 여기서 문둥이들은 자신들이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당시의 규례(레 13:46;민 5:3) 때문에 성안으로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아람군이 도망했다는 기쁜 소식을 문지기에게 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살리는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여러 단계의 명령 계통을 거치게 됨으로 시간적으로 상당히 지체되었을 것이다(11절). 한편 10절의 '아람진에...있더이다'라는 표현은 문둥이들이 직접 자신들의 결정을 실천에 옮긴 사실을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즉, 그들은 직접 목격한 사실을 조금도 과장하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사실대로 전했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도 귀로 듣고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진 바된 복음을 조금도 변개함이 없이 그대로 전한 것과 같다(요일 1:1-3). 이와 반대로 하와는 뱀의 유혹시에 하나님께 받은 계명을 자신의 생각으로 바꿔 말했다(창2:17;3:3). 그래서 결국 뱀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던 것이다(창 3:16).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사단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위험을 경계하기위해 사도 베드로는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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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이적, 역사, 주관자,
권능, 도움, 피난처,
복음, 구원, 예언, 뜻,
성령, 감동,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지하는 자, 믿음,
양심, 깨달음, 변개함
없이 있는 그대로 말씀
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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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심, 의식주 염려x
탐욕은 공허와 불만을
가중시킨다.
복음을 담대히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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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일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어서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로잡힐 때가 많은 것 같다.. 다른 사람과 형편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보다 영원한 하늘의 가치인 구원을 선물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회복되어 성령의 도우심과 부어주시는 열정을 통해 복음 전파에 힘쓰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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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가장 금하신 것 중에 하나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시편 37:8)
짜증(신경질, 분노, 불평)이라는 것은 정신적 또는 영적으로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짜증을 내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과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있는 기질을 소유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안정된 삶 가운데서 "주 안에서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참고 기다리십시오”(시 37:7) 라고 말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혼란과 역경 속에서 정말로 주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렇게 “하지 마라"는 것이 말대로 되지 않는다면 사실 어떤 것도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 이렇게 “하지 마라" 하는 것이, 평안할 때나 좌절의 상황에서나 돼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말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만일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이렇게 “하지 말라"가 되지 않는다면 다른 경우에도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평안을 얻는 것은 환경에 의한 것이 전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평안은 오직 하나님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짜증을 내며 신경질을 내는 것은 언제나 죄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약간의 걱정과 근심은 지혜로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를 말해 줍니다. 그 이유는 짜증이라는 것은 바로 내 맘대로 하겠다는 의지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한 번도 걱정하시거나 근심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뜻이나 포부를 실현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짜증(걱정, 신경질, 염려 등)을 낸다면 이는 악한 것입니다 .
지금 나의 상황은 하나님께도 벅찰 것이라는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모든 어리석은 생각을 다 접고 전능자의 그늘에 머무십시오.(시 91:1) 그리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십시오.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으며 짜증 내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와 신경질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기에 발생하는 문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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