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삶 QT👼열왕기하 8 : 7~15🍑하나님 통치 아래 있는 열방의 왕들 본문
https://tripol.tistory.com/469
열왕기하 8:7.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대에 -
엘리사가 다메섹으로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6:13-19에서 아람 왕이 엘리살를 잡으려 했던 사건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매우 뜻밖의 일인 듯이 보인다. 한편 카일(Keil)은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하사엘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다고 본다(왕상 19:15). 즉, 이것은 본래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여호와께 받은 사명이었으나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왕상 19:16)과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이 엘리사에게 전가되어 그를 통해 성취됨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엘리사가 간 곳은 다메섹의 성 안이 아니라 그 성의 근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성 안으로 들어 갔다면 하사엘이 낙타를 타고 그를 맞이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9절). 그러나 엘리사가 간 곳을 단순히 다메섹이라고만 기록한 것은 추측컨대 그 지방 일대를 가리키는 의미로 그렇게 했던 것 같다(K. W. B hr).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
요세푸스는 벤하닷이 병든 사실에 대해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가 6장에서 자기의 욕심에 의해(6:8-14) 이스라엘을 침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치심으로 병을 얻었다는 것이다(Antiquities of the Jews. ix 87) 그러나 벤하닷은 아합과 동시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왕상 20:1) 노년에 이르러 병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다(G. Rawlinson).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에 이르렀나이다 -
당시에 엘리사는 아람 땅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나아만에 의한 영향, 즉 문둥병이 고침을 받은 사실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암시해 준다(5:17). 그래서 나아만의 치유 사건을 잘 알고 있던 어떤 사람이 엘리사를 아람 왕에게 소개한 것이다.
8. 왕이 하사엘에게 이르되 너는 손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맞고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나의 이 병이 낫겠나 물으라
왕이 하사엘에게 이르되 -
요세푸스는 하사엘을 '그 집의 충성된 자'(*, 호 피쉬토타토스 톤 오이케톤)라고 불렀다. 그러나 하사엘의 족보나 궁중에서의 그의 관직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 진 것이 없다. 다만 '문벌도 없는 하사엘이 왕위를 차지했다'는 앗수르의 비문을 보면 그가 비천한 데서 왕위에까지 오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왕이 자신의 병에 판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엘리사에게 하사엘을 보낸 것으로 보아 그는 나아만과 같은 군대 장관이었던듯 하다(K. W. B hr).
여호와께 나의 이 병이 낫겠나 물으라 -
왕은 나아만이 취했던 방법(5:5), 즉 선물을 각고 가서 하나님의 엘리사를 만난 동일한 방법으로 선지자를 맞이하게 하고 자신의 병에 관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묻도록 했다. 그리고 1:2의 아하시야 왕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란 이름을 부각시킴으로써 오직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확신과 그에 따른 의식((意識)을 나타내고 있다(Pulpit Commentary).
9. 하사엘이 드디어 맞으러 갈쌔 다메섹 모든 아름다운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가지고 약대 사십에 싣고 나아가서 저의 앞에 서서 가로되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어 가로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예물을 삼아 가지고 -
하나님의 사람에게 무엇을 물으려 할 때에는 예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규례로 되어 있다(삼상9:7;왕상 14:3). 이는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출 23:15)는 규례가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아람 왕 벤하닷은 일찍이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군대까지 동원했었다(6:13-15). 그러나 이제는 병중에 있으므로 엘리사의 도움을 받고자 사자를 보낸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개종(改宗)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그가 겸손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하사엘은 자기 왕 벤하닷을 가리켜서 엘리사의 아들이라고 하며 겸손히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
이것은 아람 왕과 엘리사 선지자의 관계가 크게 변화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관계가 호전되었다기 보다는 병에 대한 치유 때문에 벤하닷이 이렇게 겸손해진 듯하다. 한편 하사엘도 벤하닷의 치유를 위하여 자신의 왕을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엘리사에게 존경을 나타낸 것이다(G.Rawlinson). 한편 7절에서 엘리사가 다메섹을 방문한 것과 이러한 우호적 관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가 없다. 다만 6:8-23의 1차 침입 사건에서 실패한 이후 아람 왕이 엘리사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10.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가 정녕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 -
본절은 히브리 본문상의 해석을 두고 많은 논란이 되고있다. 왜냐하면 원문에서 히브리어 '로'(*)의 성격과 그 위치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을 살펴보면 (1) '그에게 말하라 당신을 살리려고'(Theodort, Josehpus). 이것은 '로'(*)를 부정사로 보지 않고 대명사(*)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선지자가 하사엘에게 고의로 거짓말을 시킨 경우가 되어 선지자의 권위나 성격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배격된다. (2) '당신은 살지 못하리라고 말하라'(Keil). 이 해석은 '로'(*)를 그대로 부정사로 본 것이다. 이것은 2절에서 하사엘이 왕에게 "왕이 정녕 살리이다"라고 거짓말한 것에 대한 책임을 하사엘에게 돌릴 수 있고 선지자의 권위도 유지할 수 있는 유익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하사엘이 벤하닷을 죽일 것이라는 말은 되지만 왕의 병에 관한 본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그리고 또 히브리어 어법상 부정사(negative)의 위치가 한 정동사 앞에 올 수 없기 때문에 이 해석은 문법적인 지지도 얻지 못한다. (3) '네가 정녕 살리라'(Gesnius, G. Rawlinson). 이것은 부정사(negative) '로'(*)를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부정법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해석에는 '당신은 병으로 인해서는 결코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에 의해서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라는 뜻이 있다고 본다(Clericus, gerlach, B hr). 이러한 것들 가운데서 세번째의 해석이 가장 옳은 것 같다. 왜냐하면 이 해석은 문법상의 오류를 꾀할 뿐만 아니라 왕의 병에 관한 본래의 질문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해석은 왕의병에 대한 대답이 됨과 동시에 하사엘이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예언도 된다.
11. 하나님의 사람이 저가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니
12. 하사엘이 가로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13. 하사엘이 가로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 일을 행하오리이까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개 같은 종 -
이스라엘 지방에서 개(*, 켈렙)는 시체나 각종 썩은 고기를먹으면서 온각 전염병을 옮기기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사 66:3;신 23:18;삼상 17:43). 그리고 구약 시대에는 시체에 닿기만 해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레 11:39;민 19:11, 13, 16) 그 시체를 먹는 개를 부정한 것으로 취급했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극도로 비하시켜 표현할 때는, '죽은 개' 또는 '개 같은'이란 표현을 사용했다(삼하 9:8;16:9). 하사엘이 엘리사 앞에서 자신을 '개 같은 종'이라 한 것은 베를린 비문에 기록된 대로 '문벌도 없는' 그의 신분에 대한 겸손한 표현임과 동시에 역모할 마음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부정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구약 시대에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던 이 개는 오늘날 죄악에 빠져 죄를 짓기 위해 이리 저리 찾아 다니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과 사귄다는 것은 곧 부정한 개를 만지듯 죄에 빠지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빌 3:2)고 경고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과가 끝나면 세상에서 오염된 손발을 씻는 의식을 행하듯(레 14:8;삿 19:21;마15:20;막 7:2, 3) 우리들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았는지를 살펴보고 항상 주님 앞에 회개함으로 깨끗함을 유지해야 하겠다(고후 7:1;히 9:14;약4:8;벧전 1:22;요일 3:3).
알게 하셨느니라 -
이 말은 '보여 주다', '인식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라아'(*)에서 온 '히르아니'(*)를 번역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용어는주께서 엘리사에게 속환을 통해 예언했음을 암시한다.
14. 저가 엘리사를 떠나가서 그 주인에게 나아가니 왕이 묻되 엘리사가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대답하되 저가 내게 이르기를 왕이 정녕 나으시리라 하더이다
하사엘은 선지자가 일러준 대로 왕의 쾌유(快癒)를 전했다. 그러나 그는 앨리사의 말을 반 밖에 전하지 않았다. 즉 하사엘은 벤하닷이 살 것이라는 사실만 말했을 뿐 그가 죽으리라는 것은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왕위에 오를 계획을 다 꾸며놓고 있던 하사엘의 입장에서 볼 때 왕이 병에서 회복된다면 하사엘의 계획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왕을 죽일 다른 방도를 간구했던 것이다.
15. 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은지라 저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
🟣
하나님의 속성/성품:
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충성, 존경, 회개,
🔵
거짓은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죄다.
거짓을 멀리하고
항상 하나님께서
감찰하고 계심을 인식하고
깨어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
🌱🌿🌳
거짓과 속임으로 서로를 상처주고 상처받는 세상 가운데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Fate5RbTzM
모든 고귀한 것들은 어렵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모든 고귀한 것들은 어렵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광스럽지만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낙망하거나 주눅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극복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구원에 감사하여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당신의 최선의 것을 드립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우리로 주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순종하게 하십니다.(빌 2:13)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그 구원을 실현해야 합니다.(빌 2:12) 주님의 구속을 의지하여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구원을 실현할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이는 우리가 실천해 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삶의 위기는 우리가 구원을 실현해 봤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드러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께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 안에 넣으신 것을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실현한다면, 위기를 당할 때 우리의 전인격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우리를 지탱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할 일들을 겪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이 주신 구원은 너무나 기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담력과 거룩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일들은 우리가 그 모든 영광을 누릴 자격이 되는지 시험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십니다.(히 2:10) 이때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데 필요한 어떤 필수 여건들을 절대로 회피하도록 돕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례하고 버릇없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든든한 가족들을 만들어냅니다. 실제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고귀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숭고하기 위해서는 항상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https://reformedkjy.tistory.com/9695
https://i.pinimg.com/564x/8e/64/77/8e6477ce1fe3ec36405151e714489b71.jpg
https://i.pinimg.com/564x/20/62/c3/2062c3b6b88a30f60bc8db948196c526.jpg
https://i.pinimg.com/564x/24/fd/be/24fdbeb74993547cecfc44b0b6943766.jpg
https://i.pinimg.com/564x/55/62/fa/5562fa6b0ee2d80d9691ff110df6daee.jpg
https://i.pinimg.com/736x/09/e5/6d/09e56d451bc9515a11716c32a61299ea.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