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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9 : 1~13🍑공의의 심판 도구로 택하신 사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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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9:1.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2. 거기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3. 기름병을 가지고 그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치 말찌니라
4. 그 소년 곧 소년 선지자가 드디어 길르앗 라못으로 가니라
5. 저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았는지라 소년이 가로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씀이 있나이다 예후가 가로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뉘게 하려느냐 가로되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
6.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소년이 그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니
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
8.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선지자 엘리사가 -
성경에서 본절과 같이 '선지자'와 '엘리사'를 함께 묶어서 표현한 곳은 극히 드물다. 즉 지금까지는 엘리사라는 이름만 언급되거나(3:13;4:1;6:1)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별칭(4:7;5:14;6:10;7:2)이 따로 따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선지자 엘리사라고 기술함으로 '선지자'의 신분과 엘리사의 이름을 강조한 것은 새 왕의 옹립(擁立)과 관련된 것이다. 즉 선지자 엘리사라고 표현함으로 인해 예후를 왕으로 세우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일의 완성을 위해 엘리사가 사역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
랍비들의 전승에 따르면 엘리사에게서 사명을 받은 생도가 아밋대의 아들 요나 선지자일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없다(14:254). 좀 더 자세한 것은 2장 주제 강해, '선지자의 생도들'을 보다 참조하라.
너는 허리를 동이고 -
'동이다'란 말은 히브리어 '하고르'(*)를 번역한 것으로 '허리띠로 조르라'는 명령어이다. 히브리인들은 통으로 된 옷을 입었기 때문에 활동에 용이하도록 허리에 띠를 둘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여행 차림은 어떤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임을 나타낸다(4:29).
길르앗 라뭇으로 가라 -
본절의 표현 양식으로 보아 당시에 엘리사가 거주하고 있었던 곳은 사마리아가 틀림없다(B hr). 그리고 사마리아와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동서로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는 꽤 먼 편이었다. 즉 사마리아와 길르앗 라못의 사이는 약 65km 정도 되는 거리이다. 한편 이때에 예후는 길르앗 라못을 지키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왕 요람은 하사엘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하여 이스르엘에서 치료를 하고 있었다(15절). 전투중인 길르앗 라못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8 :28 주석을 참고하라.
9.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찌라
10.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저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린 네 왕가는 (1) 여로 보암 왕가(B.C. 930-909 ), (2) 바아사 왕가(B.C. 909-885), (3) 오므리 왕가(B.C. 885-841), (4) 예후 왕가(B.C. 841-752)이다. 그런데 여로보암 왕가는 여호와의 노를 격동시킨 일로 안하여(왕상 15:30) 바아사에 의한 멸망을 당했고(왕상 15:29), 바아사 왕가는 7일 동안 왕노릇한 시므리에 의해서(왕상 16:15) 아합과 같이 그 일족이 몰살됨으로 멸망했다(왕상 16:11, 12). 그리고 시므리도 바아사와 동일하게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범죄함으로(왕상 16:19) 왕궁에 불을 놓고 그속에서 타죽었다(왕상 16:18). 그와 더불어 아합의 왕가 또는 오므리 왕가는 예후에 의해서 멸절하게 된다. 한편 이들의 공통점은 '여호아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점이다. 특히 본절에 언급된 앞의 세 왕조는 금송아지 우상과 바알 및 여러 우상들을 섬겨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 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로 통칭되었다(왕상 12:28;15:26;16:2, 19, 26,31;22:52).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상 숭배죄를 어느 왕조보다도 많이 범한 아합 왕조에 대해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 시키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벌은 자신의 배만 위하는 탐욕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탐욕은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엡 5:5). 그 대표적인 예로 아간과(수 7:1-26) 그리스도를 팔아 넘긴 유다가 있다(행 1:18). 그러므로 재물과 명예, 그리고 방탕한 일에 욕심을 내는 모든 사람도 본절에 기록된 아합 왕가가 받은 심판 뿐 아니라 아간과 가룟 유다가 받은 심판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그 길을 돌이켜야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겔 39:9, 11, 18, 19).
11. 예후가 나와서 그 주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묻되 평안이뇨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 대답하되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한 것을 알리라
그 미친 자 -
여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메슈가'(*)는 대단히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즉 신 28:34에서는 그것을 의학적인 정신적 질병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다윗은 이와 비슷한 정신적 질병이 걸린 것처럼 눈속임을 한적이 있던 것이다(삼상21:13). 또 호 9:7과 렘 29:26에서는 악한 선지자들을 경멸하는 용어로 즉, 선포적이고 질타적인 의미의 말로 본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미 3:5-8). 한편 혹자는 이것을 선지자가 무아경에 빠졌을 때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Montgomery). 그래서 삼상 10장에 나오는 선지자의 무리들의 이상한 행위도 이와 같은 유로 간주한다. 그 뿐만 아니라 본절에서도 예후의 군대 장관들은 무아 경지에서 예언하는 선지자를 조롱하는 말로 '그 미친 자'라고 표현했던 것이다(Keil). 이것은 당시 선지자들에 대한 평판이 대체적으로 경멸하는 풍조였음을 반영하는 말이다.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 -
군대 장관들이 예후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선지자의 생도가 갑작스럽게 출현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나 하는 궁금한 마음과 함께(Pulpit Commentary) 어떤 중대한 소식을 갖고 왔을지 모른다는 추측 때문일 것이다(Keil & Delitzsch).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함 것을 알리라 -
본 구절에 대해 학자들 간에 주장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혹자는 이 말을 예후는 그 사건을 이미 사전에 계획된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 알지 않느냐고 군대 장관들에게 반문했다고 본다(G.Rawlinson). 즉, 군대 장관들이 그 선지자 생도와 함께 계획적로 자신을 왕위에 앉히려고 꾸민 연극이기 때문에 질문한 바를 자신들이 더 잘 알지 않느냐는 의미로 본다. 또 한편 혹자는 그대들이 그 선지자 생도가 미쳤을 뿐 아니라 정신없이 말한 것을 알리라. 그래서 선지자가 들어올 때 아무와도 이야기한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나갈때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B hr, Keil & Delitzsch). 이와 달리 어떤 학자는 예후의 대답은 그들도 장차 그 젊은 선지자의 신분과 그가 말한 내용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했다고 주장한다.
12. 무리가 가로되 당치 않은 말이라 그대는 우리에게 이르라 대답하되 저가 이리 이리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는다 하셨다 하더라
당치 않은 말이라 -
이것은 예후의 반문에 대한 그들의 분명한 의사 표시이다. 즉, 예후의 추측이 옳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11절에서 '평안이뇨'라고 물었을 때 예후는 군대 장관들의 심중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심중을 간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예후는 자신의 왕위에 관한 문제였음을 그들에게 밝히고 있다.
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
겉옷은 수치를 가릴 뿐 아니라(창 3:10,11) 정숙을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에(벧전 3:3) 인격과 권위를 상징한다. 따라서 군대장관들이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은 평소에 예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마음이 간절했음을 나타낸다. 심지어 그 선지자의 생도를 미친 자라고 경멸했던 그들이 선뜻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 바로 그러한 마음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겉옷을 취하여 바닥에 펴는 군대 장관들의 행위와 마 21:8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에 대해 무리들이 옷을 펴는 행위는 왕에 대한 백성들의 예우(禮遇)일 뿐만 아니라 왕으로 인정한다는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후가 서 있던 맨바닥 위에 그들이 옷을 깔고 그를 거기에 세운 후 왕으로 선포한 것(Keil, Kimchi)은 왕의 보좌가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임시로 행한 조치였다.
나팔을 불며 -
'나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파르'(*)는 '양각'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수양이나 수염소의 뿔로 만든 '신호용 나팔'로서 두 가지 음계 밖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 나팔이 쓰인 용도는 안식일때 시작(레 23:24). 개전(開戰, 수 6:4;삿 3:27;7:18), 왕의 즉위(11:24), 각종 위험에 대한 경고(겔 7:14;33:3-6;호 8:1;욜 2:1)등이 있다. 그러나 왕상 1:34과 여기서나 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왕의 대관식 때 나팔을 불었던 것과 같이 나팔을 분 것이다(E. Werner, "Musical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Vol. 3, p. 469-476). 즉 예후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음과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예후는 왕이라 -
앗수르 왕 살만에셀 3세(B. C. 859-824)의 비문을 보면 예후의 이름이 두 번 언급되어 있다. 이 비문에 따르면 예후는 하사엘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공물을 바쳤다는 것이다(Ancient Near Eastern Texts, p.280; AncientNear East in Pictures, p. 351-355). 그리고 이 비문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옳지 않다. 그러나 그 비문에서 그렇게 기록한 것은 오므리 왕조가 이스라엘 왕조 중에서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사르곤 2세(B. C. 722-705)의 시대까지 이스라엘은 오므리 왕조로 알려져 있었다(C. C.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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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왕으로 세우시는, 완성,
주체, 심판, 진노하시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지자, 하나님의 사람,
사역, 사명, 회개, 예우,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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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예언하신 대로 말씀을
성취하심을 믿고
온전한 회개와 순종을
주님께 드려야 겠다.🩸✝️
🌱🌿🌳
하나님의 말씀에 큰 능력이 있음을 기억하며 회개와 순종을 드림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IQKwxqKsLI
위대한 성찰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수 24:19)
조금이라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합니까? 자연적인 인간의 본성 및 환경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두신 새로운 도전 가운데 여전히 당신 자신을 의지합니까? 이렇게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성찰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도록 결정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당신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놓을 수는 있습니다.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 안에 있는 주의 놀라운 생명을 나타내실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습니까?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이것은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중한 헌신입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을 이런 일로 부르실 리가 없어. 나는 너무나 무가치해. 나 일리가 없어.” 아닙니다. 맞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이 연약하고 무능할수록 더 적합합니다. 아직 뭔가를 의지할 것이 있는 사람은 끝까지 “내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 “나도 정말로 믿을 수만 있다면!” 문제는 내가 진정으로 믿으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신앙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강조하신 것은 당연합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진정으로 믿었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겠습니까! 나는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모든 것이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허락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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