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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9 : 14~26🍑죄악의 장소에서 이루어진 심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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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9:14. 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아람 왕 하사엘을 인하여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
본절은 앞절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즉, 선지자의 생도가 왔다 간 이후에 발생한 일련의 공개적인 행위를 통해 요람에 대한 배반이 공식화되었다는 의미이다(G Rawlinson). 그렇기 때문에 요람이 부상을 입기 전, 다시 말해서 선지자의 생도가 이곳에 오기 전에 비밀의 약정이 있었다는 견해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Koster, Lange Commentary).
아람 왕 하사엘을 인하여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
요람이 하사엘과 싸운 것은 길르앗 라못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이었음이 여기서 판명된다(8:28 주석 참고, LangeCommentary, Keil & Delitzsch). 그리고 본절의 기사는 예후가 요람을 배반한 사실이 하사엘과의 전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이 전투에서 요람은 능력을 재대로 발휘하지 못해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된 반면 예후는 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여 모든 군대 장관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B hr). 더군다나 21절을 보면 요람이 거의 완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시달린 병사들을 위로하러 길르앗 라못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스르엘에서 병 문안을 온 유다의 아하시야 왕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장관의 원망을 산 것으로 생각된다(Lange Commentary). 실로 요람에 대한 선임이 이와 같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예후가 배반하여 요람을 치러 갈 때에 모든 병사들이 그의 말에 절대 순종하였던 것이다.
15. 아람 왕 하사엘로 더불어 싸울 때에 아람 사람에게 상한 것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던 때라 예후가 이르되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서 도망하여 이스르엘에 전하러 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라
본절이 8:28, 29절의 말씀과 중복된 것은 이 두 가지가 동일 저자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단순한 반복(Thenius)이 아니다. 앞의 기사는 온전한 역사적 기술이며 여기서는 1-14절과의 연관성을 보여 주기 위한 추가적 설명인 것이다(B hr).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
예후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혁명의 정당함을 물음과 동시에 자신의 거사 도모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16. 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요람이 거기 누웠음이라 유다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
유다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 -
요람의 조카였던 아하시야는 정치적인 면으로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 요람을 원조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도 요람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8:29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7. 이스르엘 망대에 파숫군 하나가 섰더니 예후의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가로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요람이 가로되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어 맞아 평안이냐 묻게 하라
망대에 파숫군 하나가 섰더니 -
여기서 파숫꾼은 단순한 성문지기가 아니라 멀리서 다가오는 위험을 미리 알리는 직무를 맡은 병사를 가리킨다(T.R. Hobbs, 삼상 14:16;삼하 18:24-27). 한편 본 망대는 이스르엘 망대 중에서 길르앗 라못을 향하고 있는 동남편의 망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예후의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
여기서 '무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프아'(*)는 '풍부함', '넘쳐 흐르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신 33:19). 즉 그렇기 때문에 본절은 예후가 무리들을 이끌고 올 때에 요람을 암살하기에 넉넉한 규모의 군사들을 동반했다는 말이다.
평안이냐 묻게 하라 -
요람 왕은 파숫꾼의 보고를 듣고 즉시 사자(使者) 한 명을 그 무리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요람 왕이 사자를 보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두가지 주장이 있다. 이러한 상반되는 이견(異見)은 '평안이냐'라는 말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른다. 공동 번역과 Living Bible은 이 말을 '그 무리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아 보라'는 명령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지나친 의역이다. 왜냐하면 본절에 쓰인 '평화'라는 말은 '샬롬'으로서 일상적인 인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창 33:1-11 강해, 구약 시대의 인사법 참조>. 즉 당시 요람 왕은 다가 오는 무리들을 아군으로 확신하고 그들로 하여금 빨리 전황에 대한 보고를 듣기 원했던 것이다. 요람은 부상으로 인하여 오랫 동안 전쟁터에서 떠나 있었으므로 전황에 대해 무척 궁금했을 것이다(8:28, 29). 전황을 알아 보기 위해 나갔던 사자들이 돌아오지 않자 직접 나간 요람이 예후를 보고 동일하게 '평안이냐'라고 물었던 것도(22절) 마찬가지로 이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되느냐'는 영역 성경(ModernLnaguage Bible)의 번역도 이러한 해석을 지지한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파수꾼'은 히브리어 '초페'(*)를 번여한 것이다. 이는 '먼 곳을 응시하다', '몸을 굽힌다'라는 의미의 '차파'(*)에서 온 말로 성 지키는 자의 행동과 시선에 긴장감이 돌 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리게 한다.
18. 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파숫군이 고하여 가로되 사자가 저희에게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하는지라
요람은 두번씩이나 똑같이 한 명의 사자만을 보내어 평안을 묻게 했다. 이것은 요람이 분명 그 무리들을 아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요람이 위험을 감지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둔감한 인물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한편 요람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는데 더욱 순조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진노를 더욱 가속화시켰다(Wycliffe).
19. 다시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었더니 저희에게 가서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20. 파숫군이 또 고하여 가로되 저도 저희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의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
그 병거 모는 것이 ...미치게 모나이다 -
여기서 '미치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11절의 '미친 자'와 동일한 어근, 즉 '미친듯이 날뛰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다'를 의미하는 '솨가'(*)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런데 예후의 용맹함이 바로 이와같은 어구로 수식되고 있다는 것은 요람과는 달리 그가 얼마나 정력적인 사람이었던가를 말해준다. 한편 요람은 무리들이 미친듯이 급히 말을 몰아쳐 온다는 파수꾼의 보고를 받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를 맞으러 나간다. 그런데 이때에도 요람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22절에서도 역시 요람은 평안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미치게 모는' 예후의 모습을 통해 평소에 그가 과격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예후의 혁명이 그처럼 광적이었으며 잔인했음을 암시해준다.
21. 요람이 가로되 메우라 하매 그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요람과 아하시야가 예후를 맞은 것은 그와 접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람과 싸우던 그에게서 전시의 상황을 듣고자 함이었던 것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쉽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아합 왕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수 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
'나봇의 토지'는 아합의 탐욕과 배교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테 우연히 예후와 요람이 이 곳에서 상봉하게 된 것은 아합의 죄값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주권적인 섭리 의해 이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간적으로 볼 때는 마치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예언의 말씀에 따라(7-10절) 정확히 성취 되는 것이다.
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예후야 평안이냐 -
혹자는 이 말을 '길르앗의 완정은 성공적인가?'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고(Wycilffe) 다른 학자는 이것을 '군대에 이상은 없는가?', '어떤 재난이 발생했는가'라는 뜻으로 이해한다(Rawlinson). 그러나 예후는 이와는 달리 그 질문의 의미를 '너와 나 사이에 문제될 것이 없지 ?'라고 받아 들여 부정적인 답변을 한 것이다.
네 어미 이세벧의 음행과 술수 -
여기서 '이세벧의 음행'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B hr).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이세벨이 직접적으로 음행을 범했다는 기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빼문이다. 그러나 '음행'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우상 숭배'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레 20:5;렘 3:2, 9;겔 23:27;호 2:2), 그녀가 지은 수많은 범죄, 즉 바알을 숭배한 우상 섬김의 배도(背道)는 음행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술수'는 우상숭배에 따르는 일종의 마술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세 율법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출22:18;신 18:10, 11). 한편 여기서 특별히 이세벧의 죄악을 언급하고 있는 첫째 이유는 그녀가 아합이 지은 범죄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그녀의 악행과 반대 행위인 예후의 반란의 정당성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7절).
23.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
여기서 '손올 돌이켜'라는 표현은 손으로 병거를 되돌렸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상황인 왕상 22:34에서는 아합이 병거 모는 자에게 손을 돌이킬 것을 명령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요람이 직접 자신의 손을 돌이켜 병거를 몰아 도망하고 있다. 즉 요람은 다른 병사의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병거를 몰았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요람은 예후의 대답을 통해 어떤 모반(謀反)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 갈다(Keil & Deltizch, Vol. III, p. 342). 그러나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내린 심판이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Wycliffe).
아하시아여 반역(叛逆)이로다 -
'반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르마'(*)는 모든 종류의 '속임' 또는 '박역'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것을'반역'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으나 원문의 본래의 뜻은 반역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것을 가리켰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후의 행위가 요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의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후는 요람을 주인으로 섬기는 위치에 있었고(7절)요람은 그에게 큰 직권을 맡길만큼 그를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 순간 전까지도 요람은 예후의 반란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후의 행위는 그에게 '속임'으로 받아들여질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도적이 오는것 같이 순식간에 임하는 것이다(마 24:43;눅 12:39).
24.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살이 그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저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
이 구절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예후가 자기 손에 활을 채웠다'이다. 이것은 활을 쏘기 위해 시위에 화살을 장전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삼하 23:7). 한편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긴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 일부 영역본(KJV, RSV, Living Bible)과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해 상황 어구를 첨가한 것이다.
두 팔 사이를 쏘니 -
KJV가 이를 '두 팔 사이'(between his arms)로 번역한 것과는 달리 RSV, NIV, Living Bible에서는 '어깨 사이'(between the shoulders)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몸통 부분'을 가리킨다. 또 공동 번역에서는 이를 '등'이라고 의역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요람이 도망갈 때 등을 보이고 갔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편 Vulgate역에서도 예후가 요람의 '어깨 사이'를 쏨으로 인해 화살 요람의 심장을 비스듬이 관통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bahr, Keil & Delitzsch).
25.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찌니라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
여기서 '장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솰라쇼'(*)는 '세번째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세번째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본래 병거에 타는 세 사람 가운데서 세번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카일(Keil)은 빗갈이 예후와 함께 병거에 탄 부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특수한 군사적인 용어로서 본래의 이와 같은 의미는 사라지고 하나의 직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였던 같다(T. R. Hobbs). 따라서 이것이 5절에 기록된 군대 장관, 즉 소부대의 지휘자(leader)와 같이 예후보다 직급이 낮은 부하를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10:25;15:25;대상 12:18) 한편 예후와 행동을 같이한 이 빗갈이라는 장교는 아합 시대에도 예후와 함께 아합의 부하였다.
네가 기억하려니와 -
대부분의 고대 사본들과 70인여(LXX)은 이를'내가 기억하거니와' 혹은 '내가 기억하노니'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어 '재콜'(*)을 다음에 이어지는 낱말 '아니'(*)라는 1인칭 때문에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해 본절은 '기억하라'라는 명령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Rawlinson:NIV, "Remember how you").
너와 내가...아합을 좇았을 때에 -
본절은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왕에게 예언할 때 그 자리에 예후도 함께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왕상 21:19).
저의 일을 예언 하셨느니라 -
'예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샤'(*)는 '올리다', '짐을 지다'를 뜻하는 동사 '나샤'(*)로부터 파생된 명사이다. 이것은 1차적으로는 '짐', '올림'을 의미하나 2차적으로는 '선지자들의 선포나 경고' 혹은 '위험을 내포하는 예언'(사13:1;14:28;15:1;나 1:1;겔 12:10)등을 뜻한다. 본절의 내용에 기인해 볼 때 예후는 아합에 대한 엘리야의 선고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예후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10:16). 또한 만일 예후가 믿음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을 진멸하기 위해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기름부으라고 명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왕상 19:16). 더욱 확실한 사실은 예후가 왕이 되어 바알의 당을 헐고 그곳에 변소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후를 칭찬하신 것에서도 잘나타나 있다(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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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심판, 주권적 섭리, 예언,
말씀, 성취하시는, 칭찬하심,
명령,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이해,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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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은 예언하신 대로
철저하게 성취하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자.🩸✝️
🌱🌿🌳
하나님 앞에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깨닫는 은혜를 받아 온전한 회개를 드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을 가지고 열심을 다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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