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

생명의 삶 QT👼열왕기하 9 : 27~37🍑하나님을 대적한 자의 심판과 죽음 본문

카테고리 없음

생명의 삶 QT👼열왕기하 9 : 27~37🍑하나님을 대적한 자의 심판과 죽음

credo15229850 2024. 7. 11. 11:11

https://nocr.net/com_kor_mhw/143298

 

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하 09장 - 메튜 헨리 주석 전체 - HANGL NOCR

9:1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열왕기 하 9:1-10) 여기에서는 예후가 왕이 되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사건을 보게 된다. 그 때 그는 라못 길르앗에서 왕에게 고용된 군대 지휘관(아마 참모장이었을 것이

nocr.net

 

 

열왕기하 9:27.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동산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쫓아가며 이르되 저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저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28. 그 신복들이 저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윗성에서 그 열조와 함께 그 묘실에 장사하니라

 

29. 아합의 아들 요람의 십 일년에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었더라

 

9:27 없음.

 

9:28 없음.

 

9:29 없음.

 

9:30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가로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가로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가로되 저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 피가 담과 말에게 뛰더라 예후가 그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가로되 가서 이 저주 받은 계집을 찾아 장사하라 저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 돌아와서 고한대 예후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로 말씀하신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찌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밭 면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이세벨의 비극(열왕기 하 9:30-37)

아합의 집안에서 최악의 범죄자는 바로 이세벨이었다. 바알 우상을 끌어들인 것도 바로 이세벨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여호와의 예언자들을 살해했고, 나봇의 살해를 음모했고, 먼저는 자기 남편을 충동질하고 다음에는 자기 아들들을 충동하여 악을 행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저주받는 계집" 이라고 불리우며(34절), 그 저주는 그 나라에 대한 저주이다. 또한 자기 나라가 잘 되길 원하는 모든 사람은 모두 그녀에게 저주를 하게 된다. 그녀의 통치가 3대까지 계속했으나, 마침내 그녀의 날은 끝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세벨과 비교되는 두아디라 교회의 거짓 여예언자에 대하여 읽는다(계 2:20). 그녀의 죄악도 이세벨과 동일했다. 즉 하나님의 종들을 꾀어서 우상을 숭배하게 했고, 그녀에게는 이세벨에서와 같이 "회개할 긴 기간이 주어졌다" (계 2:21). 그리고 여기서 이세벨에게 임한 것처럼 마침내는 무서운 파멸이 그녀에게 임했다(계 2:22, 23). 그래서 이세벨의 파멸은 우상 숭배자들과 성도 박해자들의 파멸을 보여 주는 한 전형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특히 저 큰 음녀, 곧 매춘부의 어미, 자기도 "성도들의 피에 취하고" 열방을 "그녀의 음탕한 포도주로 취하게" 만드는 자의 한 모형이다(계 17:5, 6, 16).

이제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Ⅰ. 이세벨이 심판에 도전한다. 그녀는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과, 그를 죽인 이유는 그녀의 음란과 술수 때문이라는 것, 아들의 시체를 나봇의 땅에 던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따른 것이요, 그가 지금 이스르엘로 오고 있다는 등의 사실을 들었다. 따라서 그녀는 거기서 그의 복수의 칼에 희생될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각오해야만 했었다. 이제 그녀가 자기의 운명을 어떻게 맞이하였는지 보라. 그녀는 성문 입구의 창문에 앉아서 예후를 모욕하고 반항했다.

1. 그녀는 하나님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숨기는 대신, 자신을 드러내며, 도망가는 것을 조소했고, 두려움을 조롱했으며 놀라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굳어진 마음이 얼마나 대담하게 고집을 부리는가 보라. 그녀는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는 지라" (욥 15:26). 그러나 자기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대하여 이처럼 굳게 하지 않는 자들은 번영하리라.

2. 그녀는 자신을 겸비케 하거나 자기 자식에 대한 숨막힐 듯한 슬픔에 잠기지도 않고 오히려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를 꾸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위대하고 위엄 있는 것처럼 나타내려 했다. 그러면 예후가 위압되어 용기를 잃고 그의 진로를 멈추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단조함과 굵은 베를 띠라 하셨다." 그러나 화장하고 분장하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을 거슬러 행하는 것이다(사 22:12, 13).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오만한 마음보다 더 명백한 명망의 길은 없다. 화장한 얼굴을 이세벨의 얼굴에 비추어 보라. 그리고 그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알아보라. 그녀는 하나님의 보복의 도구인 예후 앞에서 두려워 떠는 대신에 오히려 위협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그를 두렵게 하려고 생각했다. "주인을 죽인 시모리여 평안하냐?" 하고 물었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그녀는 자기 집안을 치기 위해 나온 하나님의 손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들린 칼에 불과한 예후 앞에서는 화를 냈다. 우리가 고난을 받고 있을 때는, 우리는 하나님께 굴복하고,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만 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때인 데도 우리의 고난의 도구에 대해서 화를 내기 쉽다.

(2) 그녀는, 예후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분명히 그 자신의 멸망으로 끝날 것이며, 그 일로 예후가 평안을 얻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즐거워 했다. 예후는 그녀에게서 평안의 모든 허식을 제거해 버렸다(22절). 그런데 이제 그녀는 자기가 그를 죽이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평화의 길에서 떠난 자로 간주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님을 명심하자. 적극적인 개혁자들, 곧 신실한 견책자들은 고통을 당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말라(빌 1:28).

(3) 그녀는 예후에게 이 기도의 실행을 단념시키게 하기 위해서 한 선례를 인용했다. "시므리여 평안이뇨? 아니, 그는 평안하지 않았다. 그 유혈과 반역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7일 만에 부득이 궁전을 불살랐고, 그 속에서 자신도 불탔다. 그런데 너는 그 보다 더 나은 운명을 기대할 수 있겠느뇨?" 라고 한 것이다. 그 사건과 유사한 경우라면, 예후에게 그런 메모를 들려 주는 것은 아주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앞서 간 죄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도 그들의 발자취를 밟을까 조심하게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므리의 실례를 예후에게 적용시킨 것은 잘못이었다. 시므리는 그가 한 일에 대한 아무런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야심과 잔인성 때문에 그 일을 하게끔 저주 받았었다. 반면에 예후는 예언자의 생도 중의 하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고, 하늘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이것을 행했다. 그리고 하늘도 그를 지지해 줄 수 있었다. 사람이나 사물을 비교함에 있어서 우리는 값진 것과 비루한 것 사이를 주의 깊게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죄인들의 운명과 유용한 사람들의 운명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Ⅱ. 예후는 그녀를 치려고 도움을 청한다. 그는 창을 올려다 보고, 무례하지만 무력한 그녀의 분노의 위협에 위압되지 않고,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고 소리쳤다(32절).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즉 그 땅을 개혁하고, 그 땅을 더럽힌 자들을 처벌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그 일을 하기 위해 도움을 구하고 있다. 도울 만한 사람, 이 일을 지지해 줄만한 자를 찾는 것이다(사 43:5). 모세와 같이, 그는 깃발을 들고 선언한다(출 32:26). "누가 여호와의 편이냐?" 그리고 시편 기자는(시편 94:16) "누가 나를 위하여 저 행악하는 자들에게 올라갈꼬?" 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개혁사업이 일단 착수되었을 때는, "누가 그것에 편들 것인가?" 하고 물어야 할 때이다.

Ⅲ. 그녀의 수종자들이 그의 정당한 보복에 그녀를 넘겨 준다. 두세 사람의 시종들이 자기들은 예후의 편임을 믿도록 그를 격려하는 얼굴로 내다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다른 명령을 들을 때까지는 그녀를 사로잡거나 확보하지 말고, 단지 그녀를 아래로 던지라고만 했다. 이것은 행악자에게 돌을 던지는 한 방법이었다. 즉 그들을 어떤 가파른 곳에서 거꾸로 집어던지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봇에게 돌을 던진 그 일은 보복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아래로 던졌다(33절). 만일 하나님이 예후를 옳다고 인정한다면, 그의 명령은 또한 그들을 옳다고 인정해 줄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섬겼지만, 이세벨의 악을 은근히 싫어했고, 그녀를 증오했을 것이다. 혹은 그녀는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대하였고 난폭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에게 복수 할 기회를 기뻐했다. 혹은 그들은 예후의 성공을 살펴보고서, 그에게 비위를 맞추어 궁전에서의 자기들의 자리를 유지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녀는 아주 수치스럽게 죽음을 당했다. 성벽과 길바닥에 부딪치고 나서 말들에게 짓밟혔다. 그리고 그녀의 피와 뇌수들로 길바닥과 말이 온통 더럽혀졌다. 교만과 잔인성의 종말을 보라. 그리고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로 말하라.

Ⅳ. 예언과 같이 개들이 그녀의 수치와 멸망을 극에 달하게 했다. 예후는 궁전에서 다소 원기를 되찾고 나서, 그는 이세벨이 여자이고 직위를 가지고 있던 자이니 그 점을 생각하여 그녀를 매장해 주는 정도의 존경을 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매우 악했지만, 그녀는 딸이며, 왕의 딸이며, 왕의 부인이며, 왕의 어미였다. 그래서 "가서 그녀를 매장하라" (34절)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예언자가 말한 것(10절 "개가 이세벨을 먹으리라")을 잊어버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잊지 않으셨다. 예후가 마시고 먹는 동안, "마을을 배회하던" 개들(시 59:6)이 그녀의 죽은 시체를 먹어 치웠다. 그리하여 그녀의 화장했던 얼굴은 사라져 버렸고, 뼈만 남은 해골과 다리와 손만이 남았다. 굶주린 개들은 그녀의 혈통이 지니는 위엄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왕의 딸도 개들에게는 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배불리 먹이고, 육체를 유쾌하게 움직일 때도, 그것들은 얼마나 비천한가를 생각하자. 잠시 후 육체들은 지하의 벌레들이나 지상의 짐승들에게 향연을 베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후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다음의 경고를 기억해 냈다(왕상 21:23).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으리라." 불명예스런 기념비 이외에 그녀를 회상할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공적인 날에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었고, 그 때면 "이 사람이 이세벨이다. 그 자태가 얼마나 위엄 있으며,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녀는 얼마나 위대하게 보이는가!" 라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악한 자들도 매장되는 것을 보아 왔다(전 8:10). 그러나 때로는 여기에서처럼 그들은 매장되지 못한다(전 6:3). 이세벨의 이름으로 아무데도 남아 있지 않지만, 성경 속에 오점이 찍힌 채로 남아 있다. "이것이 이세벨의 티끌이다." "이것이 이세벨의 무덤이다." 혹은 "이것이 이세벨의 자손이다" 라는 말조차도 이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악한 자들의 이름은 썩어질 것이다-지상에서 썩어 없어질 것이다.

 

9:31 없음.

 

9:32 없음.

 

9:33 없음.

 

9:34 없음.

 

9:35 없음.

 

9:36 없음.

 

9:37 없음.

 

 

 

 

 

🟠🔴
🟢

 

 

🟣
하나님의 속성/성품:
말씀, 번영, 능력의 손,
경고, 심판, 명령,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 부드러운 마음, 겸비함,
애통하는, 경외, 순종, 조심하기,
사명, 돕는 자, 여호와의 편,
🔵 
하나님께 대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말아야 겠다.🩸✝️
🌱🌿🌳 
오늘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모두 성취하셨듯이 말씀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죄와 악을 피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는 믿음의 여정길을 감당해내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d9A9rtfKjk

💖🎶

 

 

 

영적인 성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립보서 3:10)

성도의 삶의 동기는 자신의 뜻을 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성도는 우연한 상황을 믿지 않으며 또한 자신의 삶을 종교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나누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 어떤 상황 가운데 던져진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내려놓습니다.  

성령의 뜻은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할 때까지 반복하여 같은 장소로 데려다 놓으십니다. 영적인 성도는 자신의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지만,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은 자신의 업적을 영화롭게 합니다. 반면에 성도는 그의 모든 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합니다. 먹든 마시든 다른 사람의 발을 씻던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려는 동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양상은 예수님의 생애에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장 미천한 일을 하실 때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실현하셨습니다. “예수는 …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수건을 가져다가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 13:3-5)

영적인 성도의 목적은 “그분을 알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그곳에서 주님을 알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사는 것은 나를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에서 종종 그 동기가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과 의무감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결단코 영적인 성도의 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언제나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실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https://i.pinimg.com/564x/a8/1d/98/a81d98d1e23e62f6753d83e5f6e2ddb2.jpg

곰님은 주변에 벌이 너무 많아서 힘드시겠어요..꿀을 찾으러 온다는데 honey미가 있어서 그런가봐요🧸💖

 

 

 

 

https://i.pinimg.com/564x/94/ba/e8/94bae8a17d1be811668af9a1c44b2339.jpg

누군가가 옥수수과자를 이마에 숨겨놨어요..! 숨겨왔던 파카님의 꿀송이 아름다움처럼 말이죠..!🦙💖

 

 

 

 

 

 

 

 

https://i.pinimg.com/564x/61/82/d3/6182d395dfdbaa1c4136ceb6df707fb0.jpg

멋짐이라는 이름의 실타래는 끝이 없었다고 하네요~🧸👼💖

 

 

 

 

 

https://i.pinimg.com/564x/6a/16/93/6a1693e64c387522c584d45c6d4e1f13.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