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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10 : 12~27🍑과격한 개혁, 자비심 없는 심판 도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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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0:12. 예후가 일어나서 사마리아로 가더니 노중에 목자가 양털 깎는 집에 이르러
13.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14. 가로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 이인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는 예후가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 42명을 죽인 사실에 대해 말한다. "아하시야의 형제들"이란 말(* )이 여자적(如字的)으로 바로 번역되기는 하였으나 실상은 아하시야의 형제들의 아들들을 가리킨다(대하 22:8). 예후로 말미암아 이들이 죽임이 된 이유는 그들이 아합 왕실의 친속(親屬)들로서 이세벨의 우상주위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찍부터 아합 왕실과 깊이 교통한 것이 마침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로 더불어 친근히 지내는 자들은 마침내 그 악인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런 악인과 가까이 하지 말아야 된다. 요 1:10-11 참조.
15. 예후가 거기서 떠나가다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맞으러 오는 것을 만난지라 그 안부를 묻고 가로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가로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16. 가로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17.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남아 있는바 아합에게 속한 자를 죽여 진멸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레갑"은 겐 족속에 속하였는데(대상 2:55), 모세의 장인이 이 족속에 속하였다(민 10:29). 이 족속은 사치와 방종을 피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데 엄격한 경건(敬虔)을 유지하려고 유목 생활을 택하였다. 삿 1:16, 4:11 참조.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경건의 모본으로 들어 타락한 유대인들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렘 35장 참조.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15-16) -
예후가 "레갑의 아들"(레갑의 자손이란 뜻) "여호나답"을 이렇게 높인 것은 자기의 혁명이 경건을 위한 다는 인상을 민중에게 주려는 정치적 목적이다.
18. 예후가 뭇백성을 모으고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여기서 예후는 자신이 아합보다 바알을 더 많이 섬기리라는 말로 뭇 백성들을 쉽게 눈속임한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바아사와 시므리의 경우를 비교해 보며 설명할 수 있다. 즉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군사 혁명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만을 충족시키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개혁의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이세벨이 예후를 시므리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9:31) 백성들 가운데서도 예후의 혁명을 시므리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와같이 백성들의 생각을 미리 짐작하고 그것를 역이용하여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예후의 기발함이 본장의 전반에 잘 나타난다(9,16절). 본절에 나타난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는 선포는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그의 계략이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많이'라는 말은 '증가하는', '능가하는', '철저한'이란 의미의 히브리어 '라바'(*)에서 온 '하르베'(*)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양 뿐만 아니사 질에서 매우 철저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19.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치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오게 하라 무릇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궤계를 씀이라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오니 -
여기서 '제사'( ,제바흐)라는 말은 예후의 편에서 볼 때 재미있는 언어의 유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바흐'(*)는 수소나 양, 그리고 염소같은 동물들을 죽여서 드리는 '희생제'를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교자들에 대한 '살륙'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왕상 13:2;왕하 23:20).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선지자와 제사장이 서로 구분되는 계급이었다. 즉 제사장은 '아브'(*)라 하여 마치 백성의 아버지인 것처럼 존대되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이라 하여 특별한 계급으로 생각되었다. 한편 베니게 지방에서는 선지자가 제사장보다 더 우대된 것 같으며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다(왕상 18:19-40). 그리고 여기서 '섬기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드'(*)와 '멸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드'(*)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인데 이것이 본절 전체에 대해 풍자성을 더 가미하고 있는 듯하다.
20. 예후가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 하매 드디어 공포하였더라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 -
여기서 '대회를 거룩히 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드슈 아차라'(*)는 예배 준비를 가리키는 공식적인 용어이다(욜 1:14;2:15). 그리고 본절에 언급된 '아차라'(*)가 '거룩한 대회'(solemn assembly)로 번역된 경우는 성경에서 빈번한데(민 29:35;신 16:8;대하 7:9;느 8:18;사 1:13)이 대회라는 말은 신 16:8과 레 23:36에 기록된 '성회'또는 '거룩한 대회'에서와 같이 절기 마지막 날에 폐회를 위한 성대한 제전을 의미한다. 한편 암5:21에서는 이 말이 이스라엘 회중이 지키는 '여호와외 성회'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것은 본래 세상일에 대한 금욕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바알 숭배가 횡행하던 그 당시에는 바알을 높이기 위한 모임으로 자주 열렸던 것 같다. 그래서 예후가 이러한 모임을 선포해도 백성들로부터 의심을 사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21. 예후가 온 이스라엘에 두루 보내었더니 무릇 바알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도 빠진 자가 없이 다 이르렀고 무리가 바알의 당에 들어가매 이편부터 저편까지 가득하였더라
바알의 당 -
사마리아에 있는 바알의 산당은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한 직후에 세운 것이다(왕상 16:32). 이 산당은 바알의 제사장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수용했던 장소인 것으로 보아 대단히 큰 전(殿)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B hr).
이편부터 저편까지 -
이 표현에 대한 히브리 원문은 '페라페'(*)이다. 그런데 이 말은 '훅불다', '불어 날리다'란 의미의 '파아'(*) 온 '페'(*)가 전치사로 연결된 용어다. 여기에서 '페'는 '입', '가장자리', '부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본절의 뜻은 '입에서 입으로', 혹은 '열고 또 연다'란 것이다(B hr). 즉 이것은 최대한으로 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은 '바알의 우상이 있는 성소'에 사람이 가득차 있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흑자는 본 표현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라고 해석하는 것이다(Keil & Delzsch, Vol. III, p. 350-351; KJV, from oneend to another; NIV, Living Bible, RSV, from one end to other; NEB, from end toend).
22. 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어다가 무릇 바알 섬기는 자에게 주라 하매 저희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
예복 맡은 자 -
여기서 '예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멜르타하'(*)는 구약 전체 중 이곳에서 단 한번밖에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소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 의미는 분명한 것 같다. 이 단어가 '시험', '증거'(proof)라는 뜻을 가진 아카드어 '말타크루'(maltaktu)와 관계가 있다는 주장(W.Von Soden)은 전후 문맥에서 볼 때 옳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동족어인 에디오피아어에서는 예복을 '알타'(*)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포로 만든 옷이기 때문에 히브리어의 의미가 정확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이방의 신전에는 거의 옷을 보관하는 방을 따로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옷을 관리하는 관리자도 있어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예복을 입었다. 한편 바알 제사장들이 그렇게 예복을 입었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용이해 그들 모두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23.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으로 더불어 바알의 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에게 이르되 너희는 살펴보아 바알을 섬기는 자만 여기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
본절에 사용된 '여호와의 종'은 '바알을 섬기는 자'와 대응되는 말이다. 이 단어가 비록 히브리어로는 똑같이 '에벧'(*), 즉 '종'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는 '여호와에 대한 열렬한 예배자'와 '바알에 대한 예배자'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예후가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예후나 여호나답을 따르던 여호와의 종들이 영문도 모르고 그들 중에 섞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Rawlinson). 또한 바알 숭배자들도 자신들의 선성한 예식에 이교도가 섞여있다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므로 예후의 처사를 옳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예후가 이 일을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으로 하여금 지켜보게 한 것은 여호아의 종들을 보호해 줌으로써 여호와에 대한 자신의 열심(16절)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24. 무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려고 들어간 때에 예후가 팔십인을 밖에 두며 이르되 내가 너희 손에 붙이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도망하게 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리라 하니라
무리가...들어간 때에 -
여기에 '무리'로 번역된 말이 70인역(LXX)에는 '그'로 되어 있고 히브리 성경에는 '그들'로 되어 있다. 25절과 비교할 때 '그' 즉, 예후 자신이 혼자서 번제드린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들어간 때에'로 번역한 본절은 '들어가니라'로 되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고 그가 제물과 번제를 드리려고 들어가니라'가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25.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장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장관들이 칼로 저희를 죽여 밖에 던지고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
이 구절의 주어가 3인칭 단수 접미어인 '오'(*)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혹자는 예후가 친히 번제를 드림으로써 자신이 열렬한 바알 숭배자인 것처럼 가장했다고 한다(Ewald).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3연칭 단수 접미어 '오'(*)는 종종 부정적 주어로서 영어의 it나 They와 같은 용법으로 쓰인다(B hr). 그래서 70인역(LXX)과 벌게이트(Volgate)역에서는 본절의 주어를 3인칭 남성 복수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예후와 여호나답은 바알 신당 주위에 80인의 호위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예배를 다 드릴 때까지 기다린 것 같다. 그러나 만약에 예후가 이방의 제사 의식에 참여했더라면, 예후에게는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즉, 그 행위가 본심에 의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의 신실한 지도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앞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뭉쳐진 신실한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Wycliffe). 그래서 그는 이방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위병과 장관들에게 이르되 -
호위병의 문자적인 뜻은 '달리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왕을 보호하는 것을 최고 임무로 하는 정예 부대였다(삼상 22:7;왕상 14:27,28). '장관들'에 관해서는 9:25의 주석을 참고하라.
바알의 당 있는 성 -
여기서 '성'이란 뜻의 히브리어 '이르'(*)는 '높은 요새'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바알 숭배자들이 들어가 있는 '제단' 또는 '내전'(內殿)을 가리키는 듯하다(Rawlison, Keil). 왜냐하면 바알의 신상이 있는 이 전은 높은 담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서 그 모양이 마치 요새와 같았기 때문이다(B hr). 이것과는 달리 바알의 주상(主像)은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주상을 중심으로 작은 바알의 상들이 빙둘러 놓여져 있는데 그것들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한편 예후가 바알을 예배하는 모든 자를 죽이라고 그의 군사들에게 명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교훈을 준다.
(1) 이것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의아스럽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다는 의미에서는 충분히 정당화된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복하는 곳의 모든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는데(신 3:1-3;수 8:18-25),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범죄자들에 내려진 심판으로 볼 수 있다(창 15:16). 이처럼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드시사,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듯 죄에 빠진 자들을 전멸시키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조금의 불의도 용납 될 수 없다는 공의의 속성에 기인한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이러한 공의의 하나님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더욱 강조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양 속성을 잘 조화시겨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참 지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2) 이는 예후의 과감한 실천의 표현이었다. 즉 그는 여호나답에게 여호와께 대한 열심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약속했다(16절). 그래서 그는 여호나답이 보는 가운데(23절) 바알에게 제사하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 이러한 예후의 행동은 죄의 길에 서서 후회만하고 행동으로는 돌이키지 않는 우유 부단한 사람들에게 경고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지근한 상태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계 3:15,16).
26. 바알의 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본절에서 '목상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츠보트'(*)는 '기둥들'이란 뜻인데 왕상 14:23에 의하면 이것이 아세라 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로 태워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알 주상은 원추형의 돌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조각 조각으로 훼파하였을 것이다(B hr ; Keil &Delitzscf, Vol, III, p. 351-352). 한편 가나안 인들이 섬기던 우상은 바알의 신상뿐 아니라 여러 가지가 더 많이 있었는데 신명기 기자는 이 모든 것을 불사르고 훼파하라고 기록하고 있다(신 7:5,25;12:2, 3).
27.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당을 훼파하여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변소를 만들었더니 -
변소는 '성읍의 모든 불결한 것을 두는 저장소'이다(Rawlinson). 그런데 바알 신당을 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도록 했다는 것은 바알 신에 대한 모독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당시 근동지방에서 유행하던 최대의 모욕이었다(Keil & Delitzsch). 한편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에는 '변소'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모하라오트'(*)를 '하수구'라는 뜻의 '모차오토'(*)로 변형하고 있어 그 의미가 매우 완곡하게 표현 되었다(스 6:11;단2:5;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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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심판, 보호, 명령, 공의,
사랑, 지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 경건, 공경, 철저한,
신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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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여호와에 대한 열심.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의
양 속성을 잘 조화시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참 지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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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 때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자로서 명령 받은 특정 사람들을 멸절시키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 없이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중동의 계속된 전쟁이 생각이 났다..
성경말씀의 진리대로의 참하나님인지 내가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인지 분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온전히 귀기울이고 바르게 깨닫는 은혜를 받아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히 주님께로 돌아오는 순종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yVkcfPFum8
비전의 대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1)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걷다 보면 주님께서 종종 우리의 “영웅들을 사라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웅들의 자리에 주께서 친히 계시기 위하여 그들을 데려가십니다. 이때 우리는 실족하고 쓰러지고 낙심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마치 하나님처럼 전부였던 사람이 지난해에 돌아갔다고 합시다.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까? 아파 누웠습니까? 마음이 낙심되었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나의 비전은 내 성품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성품은 내가 깨닫게 될 계시를 결정합니다. “내가 주님을 또한 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전에 내 성품 안에는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시작할 때까지는 나는 일반적으로 내 편견에 따라서만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보기 전에 나는 외적인 사건을 통한 수술이 필요하고 내면은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첫째도 하나님이요 둘째도 하나님이며 셋째도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뵈며 아무것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을 때까지 그래야 합니다. “이 온 세상에서 나의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이 없습니다. 오직 당신밖에 없습니다.” 계속 대가를 지불하십시오. 당신이 정녕 하나님의 주신 비전에 따라 사는 것을 주님께서 보실 수 있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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