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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11 : 13~21🍑언약을 갱신하고 온전한 헌신으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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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1:13. 아달랴가 호위병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백성에게 이르러
호위병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
히브리 원문에는 '호위병'과 '백성'이라는 단어 사이에 '그리고'라는 뜻의 접속사 '와우'(*)가 없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필사자의 오류로 실수하여 빠뜨린 것으로 본다(Keil, B hr, Rawilnson). 그러나 호위병들도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포함된 사람이므로 두 단어를 동격이라고 본다면 접속사'와우'(*)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Ehrlich, Hobbs). 그리고 이것은 14절의 '온 국민'이라는 말과 동일어 일 것이다.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
아달랴는 바알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자였기 때문에 안식일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날에도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 성전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오자 불안한 마음이 생겨 성전으로 달려갔던 것이다(Rawilnson).
14. 보매 왕이 규례대로 대 위에 섰고 장관들과 나팔수가 왕의 곁에 모셨으며 온 국민이 즐거워하여 나팔을 부는지라 아달랴가 옷을 찢으며 외치되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 하매
본절과 13절에서 묘사된 아달랴의 반응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열왕기서 기자는 여기서 요아스 왕의 대관식과 아달랴의 당황함을 대조적으로 묘사하면서 참왕의 당당함과 거짓 통치자의 패망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이 도래함으로 혼비 백산하는 사단의 모습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이 규례대로 대 위에 섰고. -
여기서 '대'로 번역된 '암무드'(*)는 '서다'(stand)라는 뜻의 '아마드'(*)에서 파생된 단어로 집을 떠받치는 '기둥', '두 놋쇠 기둥'등을 뜻한다(삿 16:25, 26, 29; 출 27:10, 11, 17; 왕상 7:15).한편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알'(*)이 '위'쪽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옆'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루터는 이 부분을 '기둥 옆'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을 전통적으로 지정된 어떤 장소로서 왕을 위하여 특별히 만든 '사열대 위' 혹은 '관람석'(suggestus)이라고 생각한다(Keil, B hr, Rawilnson). 그에 대한 실증적인 예로 대하 6:13을 보면 솔로몬이 놋으로 대를 만들어 그 위에 섰다고 한다. 그리고 본절의 '규례대로'라는 말은 이와 같은 해석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왕이 당시의 규례대로, 즉 왕이 성전을 방문 하였을 때 취하는 습관이나 규범대로 그렇게 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아스 왕은 성전 제단 뜰 한가운데 있는 높은 대위에 서서 아달랴가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관들. -
4, 9, 10절에 나타난 호위대의 백부장들, 또는 대장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모여든 그 외의 두령들을 포함해서 지칭하는 말이다.
나팔수. -
이것은 '노래부르는 자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솨림'(*)과는 달리 '하사림'(*)의 번역어이다. 이 말은 벌게이트(Vulgate)역에는 '노래 부르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분명히 나팔을 부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관리들을 가리킨다(9:13; 민 10:2; 삼하 15:10). 즉 이들은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로서 양각 나팔을 불었던 악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B hr).
옷을 찢으며. -
이는 요람과 같이 큰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취한 행동(6:30)이 아니라 분노와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옷을 찢은 것이다.
반역이로다 하매. -
여기서 사용된 '반역'(*, 케쉐르)이라는 단어는 예후가 사용했던 것으로(10:9) 여호야다가 사용한 '언약'(베리트, * )이라는 말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그리고 아달랴의 이러한 외침은 분명한 목적이나 의도가 없이 본능적으로 내뱉은 절규였다(Puipit Commentary). 한편 혹자는 그녀의 이러한 외침으로 살펴볼 때 그녀의 호위대가 곁에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고 주장하나(Wycliffe)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15. 제사장 여호야다가 군대를 거느린 백부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반열 밖으로 몰아내라 무릇 저를 따르는 자는 칼로 죽이라 하니 제사장의 이 말은 여호와의 전에서는 저를 죽이지 말라 함이라
반열 밖으로 몰아내라. -
여호야다가 아달랴와 그녀를 따르는 자들을 반열 밖으로 몰아낸 것은 우상 숭배자요 살인자인 그들의 피로 성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Rawilnson, Keil & Delitzsch). 한편 '몰아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은 '호치우'(*)인데 이는 '튀어 나오다', '도망가다', '실패하다'란 뜻의 '야차'(*)에서 온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곧다시 근접할 수 없도록 패퇴시키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 이에 저의 길을 열어주매 저가 왕궁 말 다니는 길로 통과하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더라
말 다니는 길로 통과하다가. -
성전에서 왕궁으로 통하는 길은 여호야다의 호위병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5, 6절) 아달랴는 왕의 말 마굿간으로 통하는 길로 달아났다. 그런데 이것은 느 3:28에서 말하는 '말문'과는 다른 길이다. 즉, 본절의 '말문'은 성전 내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왕궁으로 들어가기가 쉬웠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길은 말을 타고 동편에서 성으로 들어오는 성의 외곽에 있는 문으로서 궁전의 마굿간으로 통하게 되기 때문에 (렘 31:40) 호위병에 의해 제지를 받을 염려가 없다고 아달랴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아달랴는 말이 다니는 길에서 수치스럽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Hobbs).
17. 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으로 여호와와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하매
여호와와 언약을 세워. -
여기서 언급한 '언약'은 4절에서 언급한 '언약', 즉 인간 사이에서 그 증표로 나타내기 위해 세운 언약과는 내용상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히브리어 원문에는 정관사 '헤'(*)를 동반하여 '그 언약'이리고 기록하고 있어서 본절의 언약이 모세의 언약이나 다윗의 언약에 대한 새로운 갱신임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 기록된 언약은 두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수직적인 언약으로서 여호와의 왕과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둘째는 수평적인 언약으로서 왕과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수직적인 언약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출 24:3-8)을 가리키는 것인데 왕과 백성은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것과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말한다(신 4:20; 27:9, 10). 그리고 수평적인 언약은 왕이 백성을 율법에 따라 다스릴 것와 백성은 하나님이 임명하는 왕을 섬기며 순종해야하는 것을 서약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삼하 5:3).
18.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을 수직하게 하고
온 국민. -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호야다 제사장을 돕기위해 유다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말한다(대하 23:2).
바알의 당. -
유다에도 이스라엘과 같이 바알 신전이 있었다는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그러나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 바알 신전은 여호람과 아달랴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여호람의 악행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역대기서에서(대하 21:1-20)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Rawilnson). 한편 혹자는 이 바알 신전이 모리아 산에 있었다고 주장하나(B hr), 그 정확한 위치를 확정지을 수 있는 분명한 단서는 없다. 그리고 당시 바알의 신전이 여호와의 성전안에 있었다고 하는 견해(Thenius)는 대하 24:7이나 본절을 볼 때 가능치가 않다(Keil &Delitzsch, Vol. 3, p. 363-364). 한편 본절에서 '깨뜨리고'란 말은 히브리어 '쇠바르'(*)를 역한 것인데 그 원뜻은 '산산히 부서지다', '파열하다'란 의미이다. 이는 형체가 없어질 정도로 완전히 으스러뜨림을 가리키는 것이다(레 26:13; 나1:13).
바알의 제사장 맛단. -
'맛단'은 페니키아(두로와 시돈)식 이름으로 그 뜻은 '선물'이라는 의미로 추측된다. 이에 대한 완전한 이름은 '맛단 바알', 즉 '바알의 선물'이란 뜻인데 바알의 제사장에게 아주 걸맞는 이름이다. 한편 이것은 페니키아 비문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며 히브리어로 유다의 마지막 왕인 '맛다니야'(24:17)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을 수직하게 하고. -
여호야다가 성전에 문지기를 세운 것은 1) 율법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는가를 감독하고(Keil & Delitzsch), 2) 부정한 자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대하 23:18, 19; Thenius, Ewald). 이것은 아달랴의 통치기간 동안 정상적인 성전 예배를 드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칫 율법을 범하기 쉬웠기 때문인 듯하다(Rawilnson). 그리고 이 때가 왕의 대관식이 진행되는 중이었으므로(19절) 바알 숭배자들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목적도 함께 있었음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B hr).
19. 또 백부장들과 가리 사람과 호위병과 온 국민을 거느리고 왕을 인도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내려와서 호위병의 문 길로 말미암아 왕궁에 이르매 저가 왕의 보좌에 앉으니
호위병의 문 길. -
이것은 6절에 있는 "호위대 뒤에 있는 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Rawilnson). 당시 성전은 시온 산에 있었으므로 요아스 왕은 시온 산에서부터 다윗 성까지 호위병들이 경호를 받으며 왕궁 보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왕궁에 배치된 3개 부대(5, 6절)는 입궁하는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한편 역대기서에는 본절의 '가리 사람과 호위병' 대신에 '존귀한 자들과 백성의 방백들'이라고 표현해(대하 23:20) 왕을 옹위한 범위를 좀더 구체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Keil & Delitzsch).
20.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었더라
21. 요아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칠세였더라
즐거워하고...평온하더라.-
본절은 아달랴의 학정과 종교적 부패, 그리고 비리 등으로 그 동안 백성들이 많은 고통과 억압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또한 백성들이 이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기쁨과 평온을 얻었음은 새로운 왕권이 상당히 안정되었다는 것을 반영해 준다. 참으로 불안한 지도자, 불안한 정책하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 역시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르는 미래를 두고서 불안에 떨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데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게 마련이다(잠 29:2).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정의가 넘치고 의인이 대접받을 수 있게 되도록 노력하는 보다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소지해야 하겠다. 한편 여기서 '평온'이란 말은 '조용하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싸움이나 전쟁이 없는 안정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수 11:23; 14:15; 대하 14:5).
왕궁에서 칼로 죽였었더라. -
외형상 본절의 의미가 16절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나 둘 다 왕궁 근처에서 무리가 아달랴를 죽였음을 뜻한다. 열왕기서 기자가 다시 한번 아달랴가 왕궁 근처에서 죽임당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성중의 평온함과 대조시켜서 지금까지 유다를 혼란케 한 장본인이 바로 아달랴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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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그리스도, 왕권, 통치,
언약, 축복, 보호, 율법,
다스리는, 성전, 보호,
평온, 안정, 기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준수, 섬김, 순종, 예배,
대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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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정의가 넘치고
의인이 대접받은 수 있게
되도록 노력하는 적극적인
신앙 소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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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안에서 마음의 평온과 함께 개인을 넘어 사회와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싸움과 전쟁을 줄이기 위한 하나님 안에서의 화목과 화평에 힘쓰는 먼저 주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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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11)
예수님은 성령이 있는 자들에게 행동의 규칙을 정하셨습니다. 이 간단한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이 뜻은 주의 제자들은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과 또한 주를 향한 완전한 신뢰를 언제나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생각을 항상 하십시오. 그러면 어려움이 찾아와도 “나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다 알고 계신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은 노력이 아닙니다. 혼돈이 올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과거에는 어려움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찾아갔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의식이 당신 안에 너무나 강하게 만들어져서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바로 가서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있는 자들에게 행동의 규칙을 정하셨습니다. 이 행동 규칙은 이렇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며 그분은 나에 관해 그 어떤 것도 잊고 계시지 않으신다. 따라서 왜 염려하는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어두움을 제거하지 않으시는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전혀 무관한 사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공의롭지 않으신 재판관처럼 느껴질지라도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어려운 일들과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식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없는 사건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확신 속에 참된 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단순히 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되는 마음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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