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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12 : 1~8🍑아름다운 성전을 꿈꾸는 선한 의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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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2:1. 예후의 칠년에 요아스가 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사십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히브리 원문에는 11:21이 본장의 1절로 기록 되어 있고 본장의 1절은 2절로 되어있다. 그래서 Lange Commentary(B hr)와 Ward Biblical Commentary (Hobbs)는 본절을 11장 마지막 절로 간주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후의 칠년에. -
이스라엘의 예후(B.C. 841-835)와 남유다의 아달랴(B.C.841-835)는 같은 해에 왕위에 올랐는데 아달랴는 유다를 6년동안 다스렸다(11:3). 따라서 요아스가 7세에 왕위에 오른 해는 예후의 칠년에 해당된다.
요아스. -
'여호와는 강하시다', '여호와는 도와주신다' 라는 의미의 이름인데 성경의 많은 곳에서는 '여호아스'로 혼동되기도 한다. 그래서 KJV과 RSV에서는 이를 Jehoash(여호아스)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 모친의 이름은 시비아라. -
유다에서는 왕들의 통치 약력을 소개할 때 그 어머니가 누구였더라고 언급하는 것이 관례인 듯하다(14:2; 15:2). 한편 '시비아'(*, 치비야)라는 이름은 '가젤'(gazelle)이란 뜻인데 아프리카 영양(羚羊)의 일종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브엘세바 사람. -
이곳은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 산으로 도망가는 도중에 들렀던 지역(왕상 19:3)이다. 그리고 이곳은 헤브론의 서남쪽 약 45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빌에세바'로 불리워지고 있다. 또한 이 성읍은 '맹세의 우물'이란 뜻으로 시므온 지파 땅이며 국경 도시로서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다(삼상 3:20; 삼하 24:7;대하 30:5). 한편 '시비아'라는 이름은 브엘세바 출신인 사람들에게 주로 붙여지는 것같다(Gibson).
2.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
이 구절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혹자는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했으므로 그의 전 생애 기간 동안...정직히 행하였으되"라고 번역한다(Ewald, Thenius). 그러나 대하 24:2을 근거로 볼 때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그가 죽고난 이후에는 하나님께 범죄하였음이 틀림없다. 즉 그는 여호야다가 죽자 바알 숭배에 관심이 있는 새로운 측근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 타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대하 24:15-25). 한편 여호야다는 1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대하 24:15) 그가 죽은 시기는 요아스 왕 23년 이후인것 같다(6절).
3.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
산당에 드린 제사가 우상 숭배였다는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Hobbs). 그러나 이곳이 비합리적인 여호와 숭배 장소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Wycliffe). 아사(왕상 15:14)나 여호사밧(왕상 22:43)과 같은 선한 왕의 경우에도 이 산당은 제거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산당 제사는 히스기야 시대(18:4)에서야 비로소 제거 되면서 요시야 왕 때에 예배의 중앙화를 이루게 되었다(23:8). 한편 이러한 산당 예배는 당시 예배의 중앙화를 이루지 못한 유다의 일반적인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결과는 나라의 쇠망을 촉진시키는 일이 되었다(Wycliffe).
4.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무릇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곧 사람의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
본절에서 성전 보수의 주체가 요아스 왕임을 본서의 저자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포로 시대 이전에는 제사장보다 왕의 권위가 더 존중되었음을 의미한다(H. Ringgren, Israelite Religion, p.211). 한편, 본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24:4에서도 동일하게 요아스 왕의 주도권이 강하게 나타나 있어 이를 더욱 뒷바침한다(Rawilnson).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
요아스 왕은 성전 수리를 위하여 한 때 모세가 법막(法幕)을 위해 거두었던 세금을 다시 바치게 하였다(대하 24:6). 이때 거두어 들인 세금의 종류는 다음 세 가지로 분류된다.
1) 사람의 통용하는 은(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각 사람이 위로 지나갈 때에 드는 돈'이다. 이것은 일종의 인두세나 주민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인구 조사에 의해 계수된 20세이상의 장정들로부터 받는 돈인데 이는 출 30:13, 14에 근거한 세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어떤 사건에 의해 수입으로 들어오는 돈도 아니고(Ewald) 세상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돈(Luther)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포로 시대 이후에도 이러한 종류의 세금이 해마다 징수되었던 것 같다(느 10:32).
2) 각 사람의 몸 값으로 드리는 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각자의 평가에 대한 사람의 돈'이란 뜻이다(Keil & Delitzsch). 그래서 이것은 서원하는 자들에 대한 제사장의 평가에 따라 징수되는 세금으로서 연령이나 남녀의 성별의 차이에 따라 그 징수액이 각각 달라졌다(레 27:2-8). 그리고 사람이나 생물의 첫태생을 여호와께 바칠 때 드리는 세금도 여기에 포함된다(민 18:15,16).
3)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은. -
자발적인 헌물로서 성소에 바치는 은을 말한다. 이것은 성막에 관련된 경우와 같이(출35:21) 자원하는 예물이었다. 그런데 이 돈들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각각 자기가살던 성읍에 가서 잘 아는 사람들에게 받아와서 성전의 퇴락한 곳을 고치는데 사용하였다(B hr, Keil & Delitzsch, Vol. 3, p. 366). 한편 역대기에서는 이 세가지의 종류의 세금을 전체적으로 통칭하여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라고만 표현하였다(대하 24:6). 그런데 이것은 성전 건축을 위한 반 세겔의 헌납(출 30:12, 13)까지도 포함한 것이다.
5.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 들여서 전의 어느 곳이든지 퇴락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하였더니
각각 하는 자에게서 받아들여서. -
위에서 언급한 세금들은 유다의 각 고을에 있는 제사장들이 거두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전 수리도 성전에 종사하는 레위인들이나제사장들에게 맡겨진 것 같다. 즉 이것은 성전 복구를 위한 요아스 왕의 큰 뜻과는 달리 성전 수리가 전 국민적 운동이 되지 못하고 매우 소극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포로 시대 이후에 성전을 복구하기 위한 제사장들의 열의와 비교해 보면 당시 성직자들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대하 24:5). 한편 본절에 나타난 '아는 자'란 히브리어 '마카르'(*)로서 '친족'에서 유래한 말인데 '상인'(merchant), 또는 '매매자'라는 의미도 지닌다. 아마도 이들은 후일 성전에서 직업적으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마 21:12)의 효시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퇴락한 것. -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왕 때(B.C. 959년; 왕상 6:38) 지어진 것으로 당시를 요아스 왕 때(B.C. 835-796)의 초기로 보더라도 그것은 약 130년, 혹은 140년 정도가 된 것이다(Keil & Delitzsch). 그 뿐만 아니라 성전은 아달랴의 아들들에 의해 심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보수할 곳은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대하 24:7).
6. 요아스왕 이십 삼년에 이르도록 제사장들이 오히려 전의 퇴락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는지라
이십 삼 년에 이르도록...수리하지 아니하였는지라. -
이토록 성전 수축이 지연된 원인은 에 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
1) 헌금이 너무 적게 들어왔다. 그러나 이 원인은 제 2성전 수축안에 의해 성전이 쉽게 수리된 것으로 보아 헌금의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2) 제사장들이 헌금을 거두는 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도 타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4절에 언급된 헌금은 제사장들이 힘들여 거두어 들인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왕이 바뀌어 성중이 평온해졌으므로 백성들이 자발적인 헌금이 많았을 것이다.
3) 바쳐진 헌금을 제사장들이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이 원인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즉 제 2성전 수축 명령을 받은 제사장들이 '성전에 드려진 그 은으로 전의 은대접이나 불집개나 주발이나 나팔이나 아무 금 그릇이나 은 그릇이나 만들지 않았다'는(13절) 말은 그것들이 첫 성전 수축 명령때에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4) 지금까지 우상 숭배로 피폐해진 제사장들이 그 헌금을 자신의 생계 수단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B hr, Rawilnson). 그래서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해 먼저 배려를 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떤 책망도 하지 않고 성전 수리를 위하여 일꾼을 쓰게 하고 새롭게 헌금을 하도록 종용한 것이다. 어쨌든 제사장들이 성전 수축을 지연시킨 것은 그 일에 대한 사명감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데 근본 원인이 있다 하겠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명감이 결여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바로 수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일할 자를 뽑을 때에는 반드시 확고한 사명감을 가진 자를 선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딤전 3:1; 4:15).한편, 13:1을 보면 요아스 왕 23년은 이스라엘 왕조가 바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그런데 요아스 왕이 성전 수리를 명령한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그 일을 지지부진 했고 또 왕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같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에 변화가 일어나던 그 해에 요아스 왕은 다시 어떤 영적인 각성을 촉구할 만한 책임을 직감하고 성전 수리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7. 요아스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전의 퇴락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저희로 전 퇴락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8.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 은을 받지도 아니하고 전 퇴락한 것을 수리하지도 아니하기로 응락하니라
대제사장 여호야다. -
여호야다 당시에는 '대제사장'이라는 직명이 없었으며 제사(祭司)와 제사장 구별만 있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이 용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저희로...드리게 하라. -
헌금하는 사람이 직접, 지금으로 말한다면 성전 수리 위원회 같은 데 드리도록 하고 제사장은 이에 관여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너희 아는 사람들 -
은 제사장들이 수금하는 지역에 해당하는 수금 대상자들을 가리킨다. 왕은 성전 수축 계획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제 2의 성전 수축 계획을 수정 발표하고 이를 강행했다. 재원은 이전과 같으나 재정 관리 방법과 책임자를 달리했다.
1) 성전 수리와 관계된 헌금은 제사장들이 받지 못한다.
2) 성전 수리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지우지 않는다.
3) 성전을 수리하는 자들에게 직접 지불하도록 명령했다(11절).
한편 8절의 '응락하니라'라는 말의 원어는 '오다', '나타난다'라는 의미로서 '동의하다'는 뜻이 파생된 말이다. 즉 이는 입술로 만의 승락이 아니라 지적인 판단에 이해 행동으로서 동의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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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강하신, 도움, 선하신,
거룩,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직하게 행하는, 예배의
중앙화, 영적인 각성,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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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일할 때는
확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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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은 비합리적인 여호와 숭배 장소인데 오랫동안 제거시키지 못하다가 히스기야 시대에서야 제거됐다.
산당제사와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의 중심을 방해하는 요소는 없는지 점검하고 온전한 회개와 순종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와 헌신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bxfTBXbVyo
믿음의 기적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고린도 전서 2:1-5)
바울은 최고의 학자요 언변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울이 겸손한 척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그의 “말솜씨”로 사람들을 감명시키면 하나님의 능력이 가려질까 하여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오직 구속의 효능에 의해 발생하는 기적이지 말솜씨나 간곡한 호소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순전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구속의 창조적인 능력은 복음의 선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지 복음을 선포하는 자의 개성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 증거자의 진정한 금식은 (금해야 할 것은) 음식이 아니라 자신을 멋지게 드러내려는 언변이나 인상, 우아함 등, 하나님의 복음만이 제시되는 것에서부터 주위를 빼앗는 모든 것이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대언자로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서 있습니다.(고후 5:20) 설교자는 하나님의 복음을 제시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변으로 사람들을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는 예수님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설교자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설교자는 결국 예수님을 향한 반역자로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자신을 드러내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주님의 창조적인 구속의 능력을 막는 것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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