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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15 : 27~38🍑하나님의 떠나심과 보호하심의 차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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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5:27. 유다 왕 아사랴 오십 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년을 치리하며
2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베가가...이십 년을 치리하며 -
디글랏 빌레셀(Tiglath Pileser III)의 비문을 보면 앗수르가 B.C. 732년에 베가를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9절). 그리고 이 앗수르왕은 B.C. 745년부터 727년까지 약 18년간 통치했기 때문에 이 중에서 므나헴의 통치기간 10년과 브가히야의 통치 기간 2년을 제외하면 베가에 해당되는 통치 연수는 불과 6년 남짓하다(Thiele). 그러므로 베가가 20년간 북왕국을 통치했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딜리(Thiele)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말하는 20년이 북왕국 내의 지파 간에 전쟁이 일어난 햇수를 가리킨다고 본다. 한편 이러한 국내 분쟁이 발생한 기간은 유다 왕 아사랴 38년 즉, 북이스라엘 왕 스가랴(B.C. 753-752) 때부터(8절) 남왕국 아사랴 52년까지 약 14년 정도 된다. 그러므로 베가가 왕으로 단독 통치한 햇수는 6년에서 8년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달리(Thiele)는 요담 12년까지 약 8년 정도를 베가의 단독 통치 기간으로 보고 있다. 또한 본절에 나타난 베가의 20년간의 톤자치 기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의심을 품는 학자들도 있다. 즉 이 연대는 30절, 16:1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17:1에 의하면 베가의 후임 왕 호세아의 통치 기간은 9년인데, 이렇게 되면 베가의즉위 연도인 B.C. 740년부터 '사마리아 함락'까지의 기간은 29년이 되는 셈이고, 사마리아 함락의 시기도 B.C. 711년경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사마리아 함락은 B.C. 722년에 이루어졌으므로 베가가 20년간 왕위에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인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연대 문제는 본문을 수정하지 않고도 해결될 수 있다. 즉 베가는 B.C. 740-732년까지 9년 동안 정식으로 왕으로서 통치했으나, 그 이전에도 길르앗 지방을 11년간 다스렸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25절). 다시 말해서 그는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나서 B.C. 752년경 길르앗 지방을 장악했으며,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통치권을 잡고자 기회를 넘보다가, B.C. 740년경 앗수르의 후원에 힘입어 쿠데타에 성공했고 이스라엘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길르앗 통치 기간까지 합한다면 그의 통치 기간은 B.C. 752-732의 20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절을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을 치리했다'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치리했고 또한 이십 년을 다스렸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과 맞는다. 그러므로 전자에대한 의심의 해결 방법과 후반부에 언급된 회의에 대한 해결책을 종합하면 비교적 정확한 해답이 나온다. 즉 베가가 북왕국을 통치한 정확한 기간과 그에 대한 확실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이 이끄는 이 전쟁은 B.C. 739-732년에 일어났다. 앗시리아 침략의 직접적인 이유는 유다왕이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에 대항하기 위해서 앗시리아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16:17). 침략의 구실을 찾고있던 디글랏 빌레셀은 이스라엘로 진군하여 갈릴리와 갈르앗 주변의 모든 성읍들을 파괴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는 마침내 디메섹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아람왕 르신을 처형시켰다(16:9).
디글랏 빌레셀이 -
이 이름은 19절에 나타난 '불'이라는 바벨론식 이름과 동일한 앗수르 왕으로서의 정식 왕명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앗수르 왕이 정복을 목적으로 원정한 해가 B.C. 733년 경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B.C. 743년 경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B.C. 743년 1차 출정(29절)과 B.C. 735년 2차 출정(사 7:1-9)이후 세번째 출정이다. 그리고 이때에 디글랏 빌레셀은 팔레스틴 전역을 공격하여 이스라엘 도시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시 B.C. 732년경 다메섹을 주목표로 재침공 했다(Jerusalem Bible).
이욘 -
'폐허'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이욘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벨벳마아가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리고 이곳은 벤하닷의 침략을 받은 납달리 자손의 마을(왕상 15:20)로서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한다.
아벨벳마아가 -
'압제하는 집의 초원'이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기럇 세모나(Qirvat Shemona)의 북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아빌'(Tel Abil)과 동일한 곳이다. 한편 이곳은 팔레스틴 북부 갈릴리 상부의 훌레 계곡에 위치했던 성읍(삼하 20:14, 15)으로 정치 선동가 세바가 요압의 추격을 피해 숨어 있던 장소이다(삼하 20:14-22). 또한 이곳은 아람 왕 벤하닷에게 점령당했던 곳이기도 하다(왕상 15:20).
야노아 -
'나머지'란 뜻을 지닌 이 도시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대개 (1) 세겜의 남동쪽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길벱 야눈(KhirbetYanum)이거나 (2) 악고의 북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야노아(Janoah)로 보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견해가 있으나 최근에는 (2)의 견해가 큰 지지를 받고 있다. 한편 이곳은 납달리에게 배당된 성읍인데 에브라임의 경계 지역으로도 알려진 곳이다(수16:6,7).
게데스 -
'성소'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아벧벱마아가와 하솔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두로 동쪽 약 36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텔 게데스'(TelKedesh), 혹은 '가데스'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은 납달리 지파에 속한 레위인들의 도피성(수 19:37 ; 21:32)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락의 고향이며(삿 4:6) 그가 드보라를 돕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킨 장소이기도 하다(삿 4:1-10).
하솔 -
'울타리 마을'이란 뜻을 지닌 이곳은 고대 훌레(Hulh)호수의 남쪽 약 8km지점에 위치한 큰성읍이다. 이곳은 가나안의 수도로서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당했다(수11:1-13). 그후 재건되어 납달리 지파에게 할당된 후(수 19:32, 36) 솔로몬에 의해 요새화되었다(왕상 9:15). 한편 이 지역은 1950년 야딘(Yadin)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 큰 건물들이 불타 파괴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아마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 -
이 지명들은 성경에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요단 동편의 중부 고원지역에 위치한 길르앗 지방과 갈릴리 지역이 첨가된 것은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에 미친 재난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디글랏 빌레셀은 이 지역들을 장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북쪽과 갈릴리 방향인 서부지역을 쉽게 얻을 수 있었은 뿐만 아니라 하솔을 장악함으로 인해 다메섹까지의 진출이 용이하게 되었다.
앗수르로 옮겼더라 -
앗수르의 공식적인 기록들에는 포로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복자로서 포로들을 납치해 가는 것은 앗수르의 정책상 정당한 것이었다(M. Cagan). 아마도 앗수르는 대외적인 명예를 생각해서 포로에 대한 기록을 생략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본 구절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주는 역대서에는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속한 지명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어 이 사실을 확인시켜준다(대상 5:26). 또한 그후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7-722)에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번째로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는 모두 신 28:36의 성취이다(Wycliffe).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요담 이십 년에 -
사 7:1-8:8을 보면 베가와 아람, 즉 소위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하여 남왕국 왕 요담의 후계자인 아하스와 싸웠다(16:5). 그런데 본절에서 베가가 요담 20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리고 요담이 예루살렘에서 16년을 통치했다는 33절의 기록과도 이 연대는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딜리(Thiele)는 베가 17년부터 아하스와 요담이 섭정한 것으로 본다(16:1). 그렇게 되면 요담과 아하스는 4년을 넘게 섭정을 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는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간접적인 증거로 아람 왕 르신(B.C. 750-732)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친 전쟁이 마치 요담과 아하스 때 두 번 있었기 때문에(15:37 ;16:5) 두 왕의 섭정 기간 동안에 치루어진 전쟁이라 보면 된다. 한편 본절에는 단순히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앗수르의 비문에 나타난 내용과 공식 문서들을 참고할 때 당시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디글랏 빌레셀은 북이스라엘의 내정까지 깊이 간여해 베가를 죽이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던 것 같다. 그러므로 디글랏 빌레셀이 호세아의 반역을 승인한 것으로 추측된다(Rawlinson, Wycliffe).
31. 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32.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베가 이 년에...요담이 왕이 되니 -
27절에서 베가가 요담의 아버지 아사랴의 52년즉, 그의 마지막 통치 연도에 왕이 되었다는 기록과 본절의 연대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요담'(*)은 여호와의 이름과 '안전한', '경건한', '순결한'이란 의미의 '타맘'(*)이라는 동사가 합성된 형태로서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그는 웃시야(아사랴, B.C. 791-739)와 공동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아하스(B.C. 735-716)와도 공동으로 섭정했다는 일부의 주장(Thiele, Wycliff)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실제로 므나헴 2년부터 통치한 것이다(17절).
33.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십 육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말하는 16년은 요담이 그의 아버지 아삿랴(혹은 웃시야)와 함께 섭정하기 시작한 해부터를 말한다(Rawlinson, 대하 26:23 ; 27:1). 그리고 요담의 통치 16년은 북이스라엘 왕 베가 17년에 해당한다(16:1).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
여기서 '여루사'(*)라는 이름은 매우 특이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루사'(*)의 여성 능동 분사 형태인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동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레이(Gray)는 '예루살'(*)이 이 말의 본래 형태라고 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Josephus)는 그녀를 '예리사'(Jerasa)라고 불렀고 역대기 기자도 본서와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어(대하 27:1) 그레이의 견해를 의심케 한다.
사독의 딸이더라 -
사독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요담은 제사장 계열과 왕족 계열의 맥을 동시에 이은 자임이 분명하다. 한편 34절을 보면 요담에 대한 평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에 비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나 대하 27:2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제사장의 딸이라고 간주되는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부친보다는 성전의 규례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34절 참조).
34.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
본절과 평행 구절인 대하 27:2에서도 요담의 행위에 대해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서에서는 그가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가하고 있어 불경건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나타내 준다.
35.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여호와의 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
'윗문'은 안마당, 혹은 윗마당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서(대하 27:3 ; 겔 9:2) 제물로 바쳐질 것들을 잡는 곳이다. 그러나 이 문은 북쪽 지방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세워진 듯하다. 그리고 이 문은 예루살렘성전의 북쪽문을 말하는데 일명 '베냐민의 윗문'이라고도 했다(슥 14:10). 한편 대하27:3을 보면 요담이 오벧 성을 많이 증축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성읍을 많이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가 수도를 요새화하고 성읍을 건축한 것은 당시의 혼란한 국제 상황을 반영하는 것임과 동시에 여호와께 대한 그의 신앙의 자세를 반영하는 것이다(대하 27:6). 한편 역대기 기자는 이 뿐만 아니라 요담과 암몬과의 전쟁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대하 27:5).
36.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38. 요담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조상 다윗성에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람 왕 르신과 북왕국 왕 베가와의 동맹은 사 7:1-8:8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암몬과의 전쟁은 언급하면서도(대하 27:5) 본절과 같은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한편 이사야의 기록을 보면 베가와 르신은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위에 앉혀서 유다를 자신들의 동맹에 가담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르신과 베가를 저주했던 것이다(사 7:7-9).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믿음에 대한 예언이 주어졌던 것이다(사 7:10-14). 한편, 아람이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위에 앉히려고 한 것은 그를 유다의 왕위에 세움으로 유다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앗수르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르신과 베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경멸과는 달리 본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유다를 징벌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들의 기록 관점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한편 르신과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한 것이 두 번인지(16:5) 아니면 한 번인지, 그리고 한 번인지(16:5)아니면 한 번인지, 그리고 한 번이라면 왜 같은 사건을 두 번 기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대하 27:5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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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말씀을 성취하시는,
완전하신, 안전, 경건, 순결,
성전, 규례, 예언, 믿음,
임마누엘, 징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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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국제 상황과 비슷하게
여호와께 대한 신앙도 흔들리는
모습들..어떤 환경에서도
주님께서 주신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의 반석 안에서
견고해졌으면 좋겠다.🩸✝️
🌱🌿🌳
불신앙으로 물들인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온전한 신앙으로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fMqmUnU_hk
나는 이처럼 복 있는 자인가?
“… 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3-10)
우리가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 너무나 간단하고 평범하여 자연스럽게 우리의 무의식적인 마음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은 고상한 사람이든 세속적인 사람이든 상관없이 아주 부드럽고 아름다운 교훈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거친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실용성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산상 수훈은 성령의 폭발적 능력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터질만한 상황이 되면 산상수훈의 교훈들은 엄청난 폭발력을 나타냅니다. 성령께서 산상 수훈의 교훈들 중에 하나를 기억나게 하시면 우리는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그 상황 가운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놀라운 영적 변혁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산상수훈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굳이 거듭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입니다. 성령께서 주의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시는 것처럼, 성령에 의하여 주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엄중한 작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놀라울 정도로 불편합니다. 성령께서 주님의 교훈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실 때 우리도 서서히 예수님의 교훈에 합당한 언행을 형성해가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규범이나 율례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진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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