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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16 : 10~20🍑하나님의 규례를 가볍게 여기는 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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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6:10. 아하스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아하스 왕이...다메섹에 갔다가 -
아하스는 디글랏 빌레셀이 자기의 요청대로 응해준 것을 감사하기 위하여, 그리고 디글랏 빌레셀이 유다로 침공해 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Thenius) 그를 찾아 다메섹으로 갔다. 그런데 당시 앗수르 왕들은 이웃의 왕들로부터 뇌물을 받기 위하여 따로 접견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Rawlinson). 그래서 아하스는 그곳에서 앗수르 왕을 만났던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 있는 단을 보고 -
구약 성경에서는 '보는 것'(Seeing)으로 말미암아 범죄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창 3:6 ; 6:2 ; 12:15 ; 34:2 ; 38:2 ; 삼하11:2). 아하스도 그에 대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앗수르 왕들은 자기 제단을 따로 가지고 다녀서 쉽게 옮겨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은 흔히 그들의 진영에 두는 습관이 있었다(Rawlinson). 그렇기 때문에 디글랏 빌레셀을 방문하러 갔던 아하스는 그 단을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아하스가 앗수르의 제단을 보고 그대로 똑같이 만들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그레이(Gray)는 이것을 아하스가 앗수르에 대한 전적인 복종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대하 28:23에서는 그 단을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드리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어 제단을 본떠서 만든 이유를 더욱 불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가 앗수르의 제단을 본떠 만든 것이 앗수르 왕에게 아부하기 위해 자원해서 그렇게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Pulpit Commentary).
제사장 우리야 -
'여호와의 빛이시다'라는 의미는 '우리야'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우리'(*) 또는 '우리야'(*)로 나타난다. 사 8:2에서 이사야는 그를 '진실한 증인'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본장에서 그의 역할을 볼 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왕의 배교적인 명령에 대해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로 한 마디의 비판도 없이 그대로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였기 때문이다(11, 16절).
11.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
본절에서는 아하스가 무슨 목적으로 그 단을 만들게 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아하스가 이 단을 만들라고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했을 때 우리야는 제사장으로서 이일에 대하여 아무런 칭찬도 정죄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하스가 여호와 숭배를 디글랏 빌레셀처럼 개인적인 안위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 우리야는 이 일에 대한 평을 회피한 것 같다. 그러나 온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규례의 법도를 지키도록 교육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제사장이 특정한 왕에게만 복속되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죄범하는 것을 수수 방관했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서 단을 보고 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단을 보고 -
아하스는 다메섹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또 다시 눈으로 단을 보자 곧장 충동에 이끌려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본다'라는 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라아'(*)로서 단순히 보는 것 뿐만 아니라 '즐기다', '준비하다', '나타나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는 아하스가 단을 보고 마음으로 흡족히여겨 제사를 준비해서 행동으로 나타냈음을 시사한다.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야알 알라이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1) NEB는 '그 계단 위에 올라갔다'(mounted the steps)로 번역한다(Luther, De Wette, B hr).
(2) KJV은'그것을 위하여 드렸다'(on its behalf)로 번역한다. 즉 이 말은 새 단의 건축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식을 올렸다는 뜻이다(Gray). 그러나 '오르다'를 뜻하는 '알라'(*)는 전형적인 '번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고려해 볼때 (Davidson) 이는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다. 그래서 본절은 앗수르의 제단을 본뜬 단을 아하스가 개인용으로 삼아 제사드렸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3. 자기의 번제와 소제를 불사르고 또 전제를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단에 뿌리고
불사르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크테르'(*)는 '불태우다'라는 동사 '카타르'(*)의 히필형(Hihpil ; 사역형 능동)이다. 그런데 이 동사가 하필형으로 사용될 때는 '제물을 태우는 것'을 나타내고, 피엘형(Piel : 강조형 능동)으로사용될 때는 '분향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본절에서는 '제물을 불에 태우는 것'을 말한다. 한편 본절에 표현된
자기의 번제와 소제 -
에서 3인칭 단수 소유격 형태인 '자기의'(히, 3인칭 단수접미어)는 일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는 다른 왕 자신을 위한 제사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솔로몬과 같이(왕상 8:63) 왕이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로 이해해서 '자기의'라는 말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Gray). 한편 본절에 나와 있는 제사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를 참조하라.
수은제 -
성경에서는 화목제 혹은 수은제로 나와 있는데 이 제사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감사제(thank - offering), 서원제(vow - offering), 자원제(free - willoffering)가 그것인데 '감사제'는 '지나간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 '서원제'는 '장차 받을 축복의 조건 제사'로 '자원제'는 축복에 대한 조건이라기보다는 '기도에 대한 보조 제사' 형식으로 드렸다. 그리고 제물은 가축 중에서 암수를 가릴것 없이 흠없는 것으로 드렸는데 기름 바른 무교병을 같이 드렸다. 제사 드리는 순서로는 제물에 안수한 후 잡아서 제단에 피를 뿌리고 다음과 같은 3부로 나누어 드렸다.즉
(1) 내장에 덮인 기름, 콩팥, 간에 덮힌 꺼풀과 꼬리를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2)오른쪽 어깨와 가슴은 제사장에게 주고,
(3) 남은 것은 제주(祭主)가 먹되 감사 제물은 그날에, 자원제물이거나 서원 제물이면 다음 날까지 다 먹되 남은 것은 진영 밖에서 불살랐다(레 3:1-17 ; 7:11-21, 28-34 ; 9:18-21).
한편 '수은제'만을 지칭할 때는 '손을 펼친다'란 뜻의 히브리어 '야다'(*)와 '토다'(*)가 쓰여진 듯하다(암 4:5). 그러나 '수은제'는 일반적으로 '감사제'와 같은 의미로 혼용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대부분 감사제를 나타내는 즉 '쉐람'(*)을 사용했다. 그런데 본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쉐람'(*)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감사제'로 하지 않고 왜 '수은제'라고 번역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감사제'와 '수은제'라는 표현을 혼용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레 7:12 ; 22:29). 한편 본제사에 대해 KJV, LB, RSV의 영역판에서는 '화목제'(peaceofferings)로 번역되어 있고 NIV 영역판에서는 '친교제'(fellowship offerings)로 되어 있다.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전 앞에 있던 놋단을 옮기되 새 단과 여호와의 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단 북편에 두니라
놋단 -
이에 대해서는 겔 9:2을 참조하라. 70인역(LXX)에는 '놋'에 해당하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 그래서 혹자는 맛소라 학자들이 아하스의 새 단과 구별하기 위해 이전에 있던 단, 즉 솔로몬이 만든 단 앞에다 '놋'이라는 단어를 적절하게 삽입해 넣은 것이라고 본다(Burney). 그러나 15절 후반부에 나오는 '놋단'이라는 단어와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70인역(LXX)에서 '놋'이라는 단어를 생략했다고 볼 수도 있으므로 버니(Burney)의 제안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제단은 제사를 위해(창 8:20) 분향하는(출 30:1, 7, 8 ; 눅 1:10, 11)기구이다. 그런데 조각목으로 만든 후 놋으로 쌌기 때문에(출 27:2) 일명 '놋단'이라고 불리는 것이다(출 39:39 ; 왕상 8:64).
그 단북편에 두리니 -
즉 다시 말하면 아하스의 명령에 의해 만든 새 단은 성소의 정면 중앙에 위치 하도록 하고 옛 솔로몬이 만든 놋단은 한쪽 구석에 치워져 버렸다는 뜻이다.
15. 아하스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와 왕의 번제와 그 소제와 모든 국민의 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를 다 이 큰 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고 오직 놋단은 나의 물을 일에 쓰게 하라 하매
이 큰 단 위에 불사르고 -
여기서 말하는 '큰 단'이라는 것은 왕상 8:64에서 솔로몬의 놋단이 작았다는 기록과 대조가 된다. 그러나 본절의 '큰단'은 솔로몬의 단보다 규모가 커서 그렇게 불리워진 것은 아니었다(Rawlinson). 그렇게 큰 단이라고 불리워진 것은 아마도 아하스의 새 단이 현관과 성전 바로 정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아하스의 단이 솔로몬의 단보다 컸기 때문에 '큰 단'이라고 불렀다고 생각한다(Keil & Delitzsch, Vol. II, P. 406). 한편 어떤 주석가는 솔로몬의 단이 작아서 그로 인한 불편을 없애기 위해 단을 교체했다고 주장하나(Hobbs) 그것은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아부하기 위해 단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10절) 그 단이 보기에 좋아서 새 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하스가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했던 각종 제사는 겔 46:13-15에 기록된 것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율법적으로도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출 29:38-42 ; 민 28:2-8). 그렇다고 해서 그가 행한 제사가 배교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Hobbs)은 무리다. 왜냐하면 새 단은 앗수르의 양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데 적합한 것이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알맞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물을 일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비케르'(*)의 해석에 관해서학자들 간에는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
(1) 혹자는 이것을 '나의 생각해 볼일'로 해석한다(Keil, Rawlinson). 즉 다시 말하면 '내가 그것에 관해서는 좀더 생각을 해서 앞으로 조치하도록 하겠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2) 혹자는 '비케르'(*)가 '구하다' 또는 '묻다'라는 뜻이 아니라 '주의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B hr).
(3) 또한 다른 학자들은 '비케르'(*)가 '구하다' 또는 '기도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Thenius,Hobbs). 한편 이 '비케르'(*)라는 단어가 레 13:27, 33에서는 병든 사람의 피부를 '살핀다'라는 뜻으로, 시 27:4에서는 '기도'라는 의미로, 잠 20:25에서는 물건을 '주의깊게 살핀다'는 뜻으로, 그리고 겔 34:11, 12에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구하다', '기도하다'라는 용어로도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하스가 한 말은 '내가 그것을 다시 배치 하겠다'이다(Wycliffe). 왜냐하면 본절과 평행구절인 대하 28:23에는아하스가 '다메섹의 신들에게 제사했다'라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하스가 아람 왕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 그 신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새 단'은 번제단으로 사용하고 '놋단'은 기도 제단으로 사용했다는 주장(Hobbs)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새 단'은 번제단으로 사용했을지라도 놋단은 결국 치워버렸기 때문이다(14절, Rawlinson). 한편 본서에서는 '하나님께 구한다'는 말을 '비케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케르'(*)의 동의어로 볼 수 있다(Hobbs, Thenius).
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의 모든 명대로 행하였더라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대로 행하였더라 -
비록 제사장 우리야가 하나님 앞에 진실된 증인이었다 할지라도(사 8:2) 뚜렷이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아하스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한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겔 33:6). 반면에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과감하게 꾸짖었으며(막 6:18), 예수께서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율법사와 서기관들과 같은 자들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책망하셨다(마 23:1-36).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도 매일의 삶 가운데서 종교적인 개혁은 물론 정치적인 개혁까지 신경을 써서 사회가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굳게 설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야 처럼 잠잠하면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서 죽은 자들의 피값을 말씀을 맡은 지도자들에게서 찾으실 것이다(겔 33:6).
17. 아하스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어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두며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어 내고 -
'물두멍'(대야)은 물을 담기 위해 만든 뚜껑없는 원형 물통을 말한다. 이것은 바퀴 달린 받침 위에 놓여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으며, 또한 받침과 분리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 용도는 제사장들의 손발과 희생제물을 씻는 데 사용되었다. 모든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제단에 나아가서 그들의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손발을 씻어야만 했던 것이다(출 30:19-21). 이 물두멍의 용량은 40밧(1밧은 22L로 계산하면 880L), 크기는 직경이 4규빗(약 1.82m)이었다. 그리고 성전에서 그것의 위치는 제사장의 뜰(안뜰) 좌우편에 각각 5개씩 두었다. 한편 성막에서는 그것을 성막과 제단 사이에 두었는데(출 40:30), 성전에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편리를 고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더욱 자세한 물두멍의 구조에 대해서는 왕상 7:27-39을 참조하라. 한편 아하스가 이와같이 성전의 구조를 훼손시킨 목적은 분명치 않다. 혹자는 '앗수르 왕에게 선물로 보내기 위해' 그렇게 했다(Ewald,Thenius)고 하나 전혀 근거가 없다. 그리고 혹자는 아마도 아하스가 성전 운영을 효과적으로, 또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옮겼다고 하나(Hobbs)이에 대한 근거 또한 찾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하스가 이같이 행한 것을 '우상이 있는 신전이나 왕궁 같은 곳에 옮겨 붙이기 위한 것(Keil & Delitzsch, Vol. III, P. 407)으로, 혹은단순히 제단이 바뀐 것과 때를 같이하여 여호와 신앙에 대한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성전안의 구조를 '파괴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Rawlinson). 한편 아하스가 앗수르 왕디글랏 빌레셀(Tiglath - pileser)을 두려워하여, 그가 예루살렘에 올 것을 대비해 그의 탐욕을 자극할 만한 것을 제거했다는 혹자의 주장(Wycliffe)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물두멍에 붙어 있는 옆 판 뿐만 아니라 물두멍과 받침 전체를 없앴어야 하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18.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인하여 여호와의 전에 옮겨 세웠더라
낭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싸크'(*)는 '물건을 덮다', '어떤 장소를 덮다'라는 뜻의 동사 '싸카크'(*)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에 대한 영역본을 살펴보면 NEB는 '구조물'(structure)로, RSV는 '덮은 길'(covered way)로, KJV는'밀실'(covert)로 서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만족스런 번역은 없는 듯하다. 한편 본 낭실은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인데 이는 바닥에 '무엇을 깔아 놓은 곳'으로서 왕의 성전을 방문했을 때 자리 잡던 장소였을 것이다(Keil & Delitzsch). 들어가는 낭실 이것은 위에서 언급된 '낭실'과는 다른 것으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보'(*), 즉 '입구'라는 뜻이다. 이것은 솔로몬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왕상 10:5) '왕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 거치는 계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 번역에서는 '바깥 대문'으로 번역하였고,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입구'(entry)로 번역하였다.
앗수르 왕을 인하여 -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것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 하여'로 번역한다(Keil, Rawlinson). 왜냐하면 아하스는 앗수르 왕 때문에 이 두 낭실을 여호와의 전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주석가는 이것을 '앗수르왕 앞에서'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대하 28:20, 21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하스는 앗수르 왕이 올 것을 대비하여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앗수르 왕이 그것을 보고 달라고 요구할까 걱정해서이기도 하지만(B hr) 속국의 왕으로서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Hobbs).
19. 아하스의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역대기서는 열왕기서에서 발견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첨가해 아하스의 치적에 대한 바른 평가를 할 수 있게 한다. 즉
(1) 남유다의 아하스가 북이스라엘의 베가에 완전한 패배를 당함(대하 28:5).
(2) 아람에게 패함(대하 28:5).
(3) 에돔에게 패배함(대하 28:17).
(4) 통치 기간 중 남쪽의 많은 지역을 블레셋에게 빼앗김(대하 28:18).
(5) 다메섹의 우상을 숭배했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 망한 사실(대하28:23).
(6) 그의 통치 말기의 성전 폐쇄(대하 28:24), 낭실 문을 닫음(대하 29:7), 등불을 끈 것(대하 29:7),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드리지 않고 분향을 하지 아니한 것(대하 29:7).
(7) 마지막으로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지어 우상 숭배를 조장한 것(대하 28:25)등이 있다.
20. 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대하 28:27에 나타난 바와 같이 역대서의 기자는 아하스가 다윗의 성에는 장사 되었으나 열왕들의 묘실에는 안치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본서의 기자보다 역대서의 기자가 매우 아하스에 대해 비평적임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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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계명, 법도, 축복, 말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증인, 여호와의 빛,
순종, 책임, 말씀 가르치기,
감사, 제사,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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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굳게 설 수
있도록 힘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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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모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회복하여 온전한 회개와 함께, 주님께서 부르신 소명에 합당하게 예수님을 담대히 증거하고 말씀 가르치기와 복음 전파에 힘쓰는 열정적인 신앙과 믿음으로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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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아는 방법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7:17)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황금율은 지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어떤 사람이 과학적인 지식을 원한다면 지적 호기심이 그를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을 깨닫고자 한다면 그는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일 주님의 말씀이 내게 어둡다면 이는 분명히 순종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지적 어두움은 무지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영적 어두움은 순종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임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그는 당장 시험대에 놓이게 되어 순종 또는 불순종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순종하면서 왜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지 의아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재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며,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주님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미세한 부분까지 가르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변명을 다 들추어내시며, 전에는 전혀 생각조차 못 하였던 것들에도 더욱 민감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실 때 순종하기를 회피하지 마십시오. 만일 회피하면, 당신은 종교적인 위선자가 됩니다. 변명하려는 자세를 버리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왜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순종하십시오. 광신자로 여겨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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