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삶 QT👼열왕기하 17 : 13~23🍑사랑의 경고를 거부한 결과 본문
https://tripol.tistory.com/478
열왕기하 17: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 -
'선지자'와 '선견자'는 근본적으로 같은 말이다. 삼상9:9에는 "지금 선지자라고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굳이 두 단어를 구분하자면 다음과 같다. '선지자'(*, 나비)는 '선포하다', '말하다'라는 뜻의 '나바'(*)에서 파생된 말로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측면을 강조한 명칭이다. 반면 '선견자'(*, 로에 또는 *, 호제)는 '보다'(*, 라아) 또는 '인지하다'(*, 하자)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는 곧 선지자의 신령한 환상을 보는 측면에서 강조점을 둔 명칭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상 9:9 주석을 참조하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
주로 이러한 어투로 예언자 선지자는 예레미야(렘 7:3, 5; 18:11)와 에스겔(겔 33:11)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부분만큼은 적어도 위의 두 사람 중 한명이 기록한 것으로 생각한다(Gray). 그러나 이 다음에 나오는 '명령', '율례', '율법' 등의 단어는 주로 신명기에서 사용하던 어휘이며 신 18:18과 본절의 사상이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위의 주장은 진위(眞僞) 여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 본서 기자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는 본서 서론, '저자'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14.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저희 열조의 목 같이 하여
그 목을 굳게 하기를 -
본절 이하에서는 출애굽 이후 여호와께 불순종하던 이스라엘의 완악한 역사가 지적되고 있다. 사실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께 대한 이스라엘의 완고한 외고집은 성경 전체에서 계속해서 지적되고 있는 사항이다(출 33:3,5 ;대하 36:13; 느 9:16,17,29; 렘 17:23). 한편 여기서 '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래프'(*)는 '얼굴의 뒷면'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바로 서기를 거부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삼하 22:41; 렘 18:17). 그리고 '목을 굳게 하다'는 말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 불순종 하거나 굽힐줄 모르는 인간의 외고집, 교만 등을 나타내는 성경의 관용적인 표현이다(출 34:9; 신 9:6; 대하 30:8; 렘 7:26). 출33:3 주석 참조.
믿지 아니하던 -
'믿는다'에 해당하는 '아만'(*)은 '확신', '신뢰', '진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본절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확신하고 신뢰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5.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 열조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좇아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하사 본받지 말라 하신 사면 이방 사람을 본받아
그 열조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 -
본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언약은 크게 다음 세가지이다.
(1) 11:4, 17에서 요아스에 의해 다시 체결된 다윗의 언약,
(2) 13:23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언약,
(3) 본절에 언급된 시내 산 언약이 그것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언급된 언약을 시내 산 언약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은 전후 문맥이 출애굽 및 광야에서의 사건들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출 19:5-8; 24:3-8). 한편 이 시내 산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주어진 언약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근간(根幹)은 바로 이 시내 산 언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본서 기자는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언약을 떠났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
여기서 '말씀'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에두트'(*)는 '증거'를 뜻하는 것으로 주로 율법이나 십계명 또는 그밖의 성스러운 의식(儀式)들을 가리킨다(신 4:26; 30:19; 31:18).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같은 규례나 법도를 저버렸다 하니 곧 저들의 타락의 첫 관문을 훨씬 넘어섰음을 의미한다(시119:1-11).
허무한 것을 좇아 허망하며 -
여기서 '허무한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벧'(*)은 '바람', '먼지', '무가치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허망하다'는 말 역시 이와 동일한 어근(語根)을 지닌다. 한편 본절과 같은 이러한 표현은 예레미야서와 같은 데서 자주 나타나는데(렘 2:5) 주로 이방의 우상 숭배를 지적하는 표현으로 쓰였다. 또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이러한 어투로 표현했다(롬 1:21). 즉 이것은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모두가 무가치하며 무존재한 자들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서 더 나아가 신 32:21에서는 우상 숭배가 부패하고 사악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케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방 사람을 본받아 -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인들에게 이방 사람들을 본받지 말라고 명령했었다(레 18:3; 신 12:30,31). 왜냐하면 이방 문화는 하나님을 떠난 문화로서 그 문화를 받아들일 경우 최소한 혼합주의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이방 문화에 삼켜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기독교가 토속 종교와 접합되어 여러 가지 이상한 형태의 혼합주의로 나타난 데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문화를 기독교 문화로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자신이 세상문화에 빠져 들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창 4:16-24 강해, '죄와 문화와의 관계'를 보다 참조하라.
16.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
여기서 특별히 '두 송아지'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는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출 32장)이 아닌 여로보암의 두 금송아지 사건(왕상12:28-30)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왕상 12:28-30 주석과 본장 24-41절 강해, '금송아지 숭배'를 보다 참조하라.
하늘의 일월 성신 -
이것은 소위 천체(天體) 숭배라고 하는 것으로서 바벨론이나 아라비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우상 숭배이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이러한 천체 숭배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단지 유다의 므낫세가 일월 성신(日月星辰)을 숭배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21:3). 한편 혹자는 므나헴(Menahem, B.C.752-742) 시대에 바벨론의 성운(星雲) 숭배 사상이 이스라엘에 도입되지 않았는가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Rawlinson). 또 암 5:26에는 이미 B.C. 8세기 중반경에 성운 숭배가 있었다는 암시가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천체를 숭배하는 일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신 4:19; 17:3). 이와 관련해서는 21:1-18 강해,'자연신론의 제형태'를 참조하라.
바알을 섬기고 -
바알(Baal) 숭배가 처음 언급된 때는 기드온 시대이다(삿6:25-32). 그러나 바알을 가장 널리 보급시킴으로써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알 숭배에 빠지게 한 왕은 바로 아합이다. 이에 대해서는 왕상 16:31-33 주석을 참조하라.
17.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노를 격발케 하였으므로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
몰렉(Molech) 종교의 인신 제사(人身祭祀)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가나안 족속들은 자식들 중 한 명을 택하여 몰렉에게 바치면 나머지 자식들에게 축복이 임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몰렉(또는 몰록) 종교의 사악한 풍습에 대해서는 16:3 주석 및 레 18:21 주석을 각기 참조하라. 한편 일월성신 숭배와 마찬가지로 몰렉 종교의 인신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 역시 북왕국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16:3에서 유다 아하스가 이러한 인신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들을 볼때 이스라엘에서도 이러한 행위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할수 있다. 또 이스라엘의 선지자의 글에도 이러한 행위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음을 암시한 곳이 있다(호 4:2; 5:2; 6:8).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
복술(卜術)은 무슨 표적을 보고 점을 치거나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사술(邪術)은 여러 가지 마술로써 사람을 형혹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신18:10에서는 몰렉 숭배와 함께 이러한 복술과 사술행위가 엄히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아합 시대에 이러한 행위들이 있었던 것으로 분명히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9:22). 그리고 에스겔서도 이러한 점술 또는 술수가 행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겔 21:21).
스스로 팔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팔다'라는 뜻의 동사 '마카르'(*)의 재귀형으로서 구약에서는 단 14번 밖에 쓰이지 않았다. 그 중 신 28:68에서는 자신을 종으로 파는 것을 가리키고 있고, 왕상 21:20, 25에서는 아합이 그의 아내 이세벧의 충동에 의해 악행을 행하였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와같이 이 단어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매함이 비유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악의 길에 빠져 든 것은 그들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서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어떤 다른 영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 악행을 한 것이다(약 1:14).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으며(롬 1:20) 어떠한 징벌을 받더라도 할 말이 없다(렘 11:11; 살전 5:3 등). 그런즉 우리들은 죄에 대한 책임이 인간 개개인에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신 24:16). 그리하여 우리 몸을 병기로 드려(롬6:12,13) 우리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과 싸워 이기기에 힘쓰며(롬 6:19; 7:22,23)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삶을 힘쓰자(롬 7:25).
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본절은 7-17에 열거된 죄악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이스라엘 열 지파의 멸망이 남음 유다의 두 지파(유다와 베냐민, 왕상 12:21)에게 경고가 됨을 가리키고 있다. 미가서 1장에서도 이와같이 사마리아의 패망이 예루살렘에 경고가 됨을 지적하고 있다. 또 렘 2-3장과 겔 6장도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 역시 계속 죄악된 길을 걸어갔으니 그들 또한 결국 예루살렘 함락(B.C. 586년)이라는 파국을 맞고 말았다(19,20절; 25:1-17).
19. 유다도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으므로
본절과 다음 절은 삽입절로서 유다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행한 죄악을 따라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유다 왕들 중에 이스라엘 열왕을 따라 행한 왕으로서는 여호람, 아하시야, 아달랴, 아하스, 므낫세, 아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열왕들과 같이 바알을 숭배하며 이방인의 풍습을 따라 행한 왕들이다(8:18; 16:3,4; 21:2-9, 20-22). 본서 서론, '남북 왕국의 열왕들'참조.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군의 손에 붙이시고 심지어 그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여호와께서...그 앞에서 쫓아 내시니리 -
성경에서 이처럼 여호와라는 이름이 직접주어로 등장한 문장은 흔치 않다. 한편 삼상 15:26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리셨고, 23:27에서는 예루살렘을, 렘 2:37,6:30에서는 그 백성들을 버리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들에 대하여 이런 태도를 취하신 것은 그들의 여호와의 율법과 규례와 명령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았던 때문이다(Hobbs).
이스라엘의 온 족속 -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백성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노략군의 손에 붙이시고 -
여기서 '노략군'이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각기 차례로 점령한 앗수르(3-6절)와 바벨론(25:1-17)을 가리킨다. 한편 '손에 붙이다'는 말은의역(意譯)하면 '멸망토록 내버려 두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온 이스라엘이 적군에게 패배당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던 것이다. 대하 28:5 주석 참조.
21. 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나누시매 저희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으로 왕을 삼았더니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몰아 여호와를 떠나고 큰 죄를 범하게 하매
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나누시매 -
이 구절은 과거 선지자 아히야가 여로보암에게 주었던 예언(왕상 11:31)과 일치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죄악으로 인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되리라고 경고하셨는데 여로보암이 다윗 왕조에 등을 돌리고 북 이스라엘 왕국의 세움으로써 온전히 성취되었던 것이다(왕상 12:16-20).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몰아 -
'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가 잠7:21에서는 '꾀다', '유혹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 13:6에서도 우상숭배로 이끄는 것을 '꾀다'로 표현하고 있다. 본절 역시 바로 이와 같은 의미인데 곧 여로보암이 혼합 종교 정책을 펼치므로 결국에는 백성들을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지게 한 것을 가리킨다(왕상 12:26-33).
큰 죄 -
이것은 배교(背敎) 또는 우상 숭배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22.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의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떠나지 아니하므로
여로보암의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력하게 여로보암의 죄에 빠져 들었다. 아마도 그 까닭은 외양적으로 매력적인 모습을 지닌 죄에 미혹되었기 때문일 것이다(창 3:6; 잠 9:17; 딤전 2:14 등). 아무튼 여기서 밝히 드러나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에는 여로보암의 잘못이 컸다. 그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에 우상을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장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열왕들의 죄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처럼 일단 제도화되고 구조화된 악은 쉽게 사라지지 않게 마련이다(왕상 15:26,34; 16:2,19,26,31; 왕하 3:3; 10:29; 13:6,11; 14:24 ;15:9,18,28 등).
23.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심지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제하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미쳤더라
모든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로서는 실로 사람 아히야(왕상 14:15,16)와 아모스(암 7:17)가 있으며 표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나 이외에 호세아, 이사야 선지자 등이 있다(호 1:6; 9:16; 사 28). 더욱이 B.C. 1406년경에 행한 모세의 고별(告別) 설교에도 이러한 경고가 나오니 곧 "여호와께서...너와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라는 구절이다. 신 28:36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 간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성취된 사건이라 하겠다(Pulpit Commentary).
오늘까지 미쳤더라 -
여기서 '오늘까지'라는 것은 본서가 기록된 당시까지를 가리킨다(B.C. 562-536). 본서 서론, '기록 연대' 참조. 여기서 우리는 본서 기자의 교훈적인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됨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치욕이었다. 더군다나 신명기적 역사관에 투철한 본서 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아직까지 계속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와 교훈이라는 측면에서 되씹어야 할 아픔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기에 본서 기자는 '오늘까지 미쳤더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
🟣
하나님의 속성/성품:
신령한, 계시, 명령, 율법,
십계명, 성스러운, 언약,
진노, 경고,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지자, 정성, 순종,
🔵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문화를 기독교 문화로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세상문화에
빠지지 않기. 우리 몸을 병기로 드려
우리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과
싸워 이기기에 힘쓰며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삶을 힘쓰자.🩸✝️
🌱🌿🌳
살면서 어려운 때를 만나게 되면 저도 이스라엘처럼 오랫동안 죄를 쌓아와서 하나님께서 경고와 교훈의 고난을 계속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일상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유를 모두 깨닫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하고 온전한 회개를 드리는 거룩한 삶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lmmm3qnPMo
당신의 구름 속에서 무엇을 봅니까?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요한 계시록 1:7)
성경에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됩니다. 구름은 삶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슬픔, 고통, 궁핍의 상황들로서 하나님의 통치에 어긋나는 것 같이 보이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이 구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떻게 믿음으로 걸을 수 있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 구름이 없다면 우리에게 믿음도 없을 것입니다. “구름은 단지 우리 하늘 아버지의 발의 티끌이로다.”(나 1:3) 구름은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증표입니다. 슬픔과 사별과 고통이 하나님이 함께 오는 구름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귀한 계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구름 없이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청명하게 비치는 가운데 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통해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도리어 주님께서는 모든 구름을 통해 우리가 배웠던 것을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구름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자세가 정확하게 어린아이처럼 될 때까지 우리의 믿음을 단순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희미한 그림자가 되고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만 남게 됩니다. 그때까지 구름과 어두움은 수시로 나를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과거 어느 때 보다 더 단순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수께끼 같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가장 어둡고 암담한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는, 아직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눅 9:34) 당신의 구름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입니까? 그렇다면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결국, 당신은 “오직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막 9:2-8)
https://reformedkjy.tistory.com/9746
https://i.pinimg.com/564x/6c/9a/f1/6c9af13c8956a069f6ba2a3d4c1a43d4.jpg
https://i.pinimg.com/736x/93/d6/f0/93d6f09f8092b4cb24b0f796d541e8fe.jpg
https://i.pinimg.com/564x/05/be/fb/05befb3538d781df06b0ed18f5161f6c.jpg
https://i.pinimg.com/564x/61/5b/6f/615b6f1afca58b1b2d6ae38f6bb0e11a.jpg
https://i.pinimg.com/564x/15/fd/5a/15fd5a691216f6a3c76374372dbdc4f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