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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19:29-37❄️하룻밤에 성취된 심판과 구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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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명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본절에서부터는 히스기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사 환난 가운데서 유다 백성을 지켜 주실 것이니 그들이 안연(晏然)히 거하게 되리라는 약속이다.
스스로 자라난것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파아흐'(*)는 '넘쳐흐르다'라는 뜻의 기본형 동사 '사파흐'(*)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이는 다름아니라 씨를 뿌리거나 경작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식물의 씨주머니에서 씨가 터져나와 땅에 떨어져 자라나는 곡식을 가리킨다.
그것에서 난 것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히쉬'(*)는 위에서 언급된 '스스로 자라난 것'이라는 뜻의 '사파아흐'(*)와 동의어이다. 한편 유다 백성들이 첫 해와 그 다음 해는 자연적으로 자라난 식물을 먹고 제 3년에 가서야 비로소 경작한 식물을 먹게 될 것이라는 본절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견해가 다양하다.
(1)제 1년과 2년은 각각 안식년과 회년(레25:5)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 그렇게 명령했다는 것이다(Rawlinson).
(2)앗수르 군대가 패망한 것(35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해에 일어난 일이 아니며 2년이 지난 후에 앗수르가 퇴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예언했다고 보는 견해이다(Keil).
(3)앗수르는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그 해에 바로 물러났으나 그동안 땅이 황무하게 되었고 또한 많은 백성들이 잡혀갔거나 죽거나 도망갔기 때문에 정상적인 회복을 하는데 약 2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B hr).
우리는 이 세 가지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이 꼭 옳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제 3년 되는 해에 포도나무를 심고 그열매를 먹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볼 때 이는 분명 제 3년 되는 해에는 전쟁의 상흔(傷痕)이 자취를 감추고 이전과 같은 풍요함을 누리게 된다는 예언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러한 회복의 예언은 확실히 히스기야에게 큰 기쁨이되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을 것이다.
30. 유다 족속의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가 서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찌라
유다 족속의 피하고 남은 자 -
앗수르의 침입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의 예루살렘 침입과 마찬가지로(16:5;사 7장) 유다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런데 이제 본절에서는 그 같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건짐을 받은 '남은 자'가 다시 하나님 앞에서 견고히 서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4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뿌리가 서리고...열매를 맺을지라 -
이는 곧 유다가 앗수르의 침입에 의해 멸절되지 않고 다시 번영할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은 요시야 왕 치세 때 실제로 성취되었다(23:1-25).
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
본절은 반복법을 사용하면서 유다의 구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즉 산헤립의 침입으로 인하여 시온 산과 예루살렘 성안으로 피신했던 유다 백성들이 이제 다시 성에서 나와 각기 처소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
동일한 표현이 사9:7과 사37:32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구절들은 유다 백성의 구원의 근거가 여호와의 열심에 있음을 단적으로 증거해 준다. 그런데 그 같은 열심은 당신 백성들과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련된다(슥1:14).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저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본절에서 마지막 절까지는 알에서 언급된 모든 내용의 결론 부분이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을 지키시고 앗수르를 징벌할 깃이기 때문에 그들은 유다 백성들이 있는 그 성에 대하여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살...방패...토성 -
당시 성을 포위하고 함락시키는 3단계의 과정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당시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첫 단계는 공병(工兵)을 엄호하며 화살을 쏘는 일이었다. 그 다음으로 방패를 앞세운 공병대가 접근 사다리를 세우며 마지막으로 성을 공략하기 위해 성벽에 마주 대하여 토성을 쌓고 공성추를 설치하였다(Rawlinson).
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오던 길로 돌아가고 -
7절과 28절 주석 참조.
이는 여호와의 맡쏨이시라. -
이사야의 이러한 강조적인 선언은 18:19의 '대왕 앗수르 왕의'과 본장 10-13절에 언급된 산헤립 왕의 말과 잘 대조가 된다.
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구원하리라 -
본절은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믈론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킨다.
(1)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
예루살렘의 구원은 유다 백성이나 히스기야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제 1의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에게 영광 돌리기를 바라신다(고전10:31).
(2)다윗을 위하여 :
이것은 다윗의 개인적인 신앙을 기리는 말이기 이전에 그와 맺은 언약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미하는 말이다(상하7:12,16).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성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 관계를 맺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마26:28;히13:21).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본절에서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본장의 클라이막스 부분으로서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7절)이 성취되는 장면이다. 이와 관련 헤로도투스(Herodotus)와 요세푸스(Josephus)도 산헤립이 유다에서 퇴각한 것은 분명히 어떤 극심한 재난 때문이었다고 천명(闡明)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angle of the Lord)는 애굽에서 장자를 쳤던(출12장) 천사이자 다윗의 인구 조사때 이스라엘에 온역을 내렸던 바로 그 천사(삼하24:15,16)이다(B hr). 하나님께서 이제 앗수르를 징계하시기 위해 앗수르 군대에 그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한편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서는 1:3주석을 참조하라.
십 팔만 오천을 친지라 -
이 수치로 볼 때 당시 앗수르 군대의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처럼 앗수르의 군인들이 일시에 십 팔만 오천이나 죽은 데 대해서는 역병, 광야의 돌풍, 구스 왕 디르하가(9절)의 기습 등 여러 가지 까닭 때문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추측에 불과할 뿐이고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결과였다는 점이다(Pulpit Commentary).
36.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니느웨에 거하더니 -
니느웨(Nineveh)는 티그리스 강 건너편 동쪽 언덕에 위치한 성읍이다. 이곳은 B.C. 12세기부터 주목을 받긴했으나 그곳이 일약 앗수르의 수도(首都)로 발전한 것은 산헤립 때부터였다. 한편 산헤립은 귀국후 이곳에서 상당한 기간을 지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거하더니'(*, 야솨브)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바로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산헤립이 죽을때까지 다시는 유다에 대하여 어떠한 새로운 원정(遠征)도 획책하지 않았음을 암시해준다.
37. 그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저를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그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
여기 '니스록'(Nisroch)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혹자는 이것을 독수리 신으로 보고 있으나(Keil) '니스록'(*)과 '독수리'(*, 네쉐르)는 어원학상 너무 거리가 멀어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났다(Rawlinson). 요세푸스는 '니스록'을 신명(神名)이 아닌 신전 이름으로 보고 있는데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헬라어로 옮기기를 '아라스케스'(*)라고 하였다(Keil &Delitzsch).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저를 칼로 쳐죽이고 -
아드람멜렉(Adrammelech)과 사레셀(Sharezer)은 에살핫돈(Esarhaddon)과 더불어 산헤립의 아들들이다(사37:38). 그런데 산헤립이 자기 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니 참으로 비극적이다. 한편 일반적으로 산헤립의 죽음을 B.C.681년경으로 보고 있으나 분명치 않다. 산헤립이 암살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의 손자인 앗술바니팔(Asshurbanipal)의 비문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기는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이에 따르면 에살핫돈은 산헤립이 죽은 후 후계자 계승 문제를 놓고 암투를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에살핫돈은 산헤립의 가장 어린 아들로서 아버지를 죽인 다른 형제들과 싸운 것이다.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매 -
아라랏(Ararat)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상단에 위치한 아르메니아(Armenia) 지역이다. 이곳과 관련해서는 과거 노아 홍수시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문 사건을 상기할 수 있다(창8:4). 그런데 산헤립을 시해한 그 아들들은 결국 아라랏에서 에살핫돈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 것 같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에살핫돈(B.C.681-669)은 자기 아버지 산헤립이 다하지 못한 정복 전쟁을 계속하여 애굽의 멤피스까지 함락시켰다. 유다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지독히 악랄한 통치자로 여겨졌다. 그 이유는 그가 므낫세의 통치기간 중 유다를 침공하여 므낫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대하33:11). 니느웨에서 발견된 B.C. 8세기 무렵의 한 편지에는 '유대인들이 은 10마나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바, 여기에는 므낫세의 이름도 나온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다와 베냐민 족속의 상당수를 포로로 잡아가거나 강제 이주시켰다(스4:2).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던 그는 애굽 내지(內地)에서 얼어난 반란을 진압하던 중 병사했으며, 앗술바니팔이 그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간단하게 기도로 마치는 큐티로 끝낼게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큐티를 안하려고 했고 앞으로도 안하려고 했지만 그 이유는 아무래도 많은 분량을 해야 되는 부담감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이 심했습니다. 요새는 마음 조각모음도 잘 되는 것 같고 새로운 사람은 아직 안 생겼지만 별로 간절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금 성급하긴 했지만 어제와 오늘 한 성도님께 권고의 말씀을 드렸고 어쩌다 보니 갈라지게 됐습니다..다시 들어올 수 있는 기회는 있지만 아예 떠나실 건지 소식이 없네요.. 저는 진실한 대답을 원했고 끝내 진실하지 못한 대답을 들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이야기 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두리뭉실하게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추측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 속에 그리는 사람을 여전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좋아하는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분이 현재 만나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도 싫고 추측하기 싫은 더 않좋은 상황은 아무래도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난다는 것이겠죠..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일부로 세게 제가 글을 전달했던 것 같습니다..그래도 제일 잘한 건 끝까지 의심하고 있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겠죠..그래서 충격을 덜 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드립니다.. 아버지 저는 많이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또 저에게 두 마음을 품어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보내주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해도 저는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그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을 선물로 주실지 아니면 아예 미래의 사람 자체를 보내주시지 않을 것인지는 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지금은 그냥 하고 있는 일 잘 준비하고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세상적으로 많이 성공은 못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순종도 잘 하고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자녀로 성장하기를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합니다 선하신 주님의 뜻에 따라 응답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https://www.youtube.com/watch?v=aHAG8J2uMGY
기도의 십자가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요한복음 16:26)
십자가는 통과해야 하는 어떤 과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통해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단 한 가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완벽하고 절대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이러한 하나 됨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그렇다면 왜 구합니까? 기도의 개념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응답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온전하고 철저하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응답을 원하여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허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응답은 언제나 옵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가 원하는 데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허탈감은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살아있는 증거품으로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날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6-27)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로 인하여 당신이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하나님과 친밀합니까? 주님의 대속의 삶 때문에 당신의 삶이 생동력으로 넘치고 있습니까? ‘그날에’ 당신은 예수님과 너무나 일치가 되어 주님과 당신 사이에 구별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을 때, 다른 사람에게 구실을 찾아 비난하려는 자세를 주의하십시오. 그것이 언제나 사탄의 올무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깊은 교훈을 주시려는 이유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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