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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2 : 13~25🍑숨길 수 없는 야망, 단호한 처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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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13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밧세바가 이르되 네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뇨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
1:11의 밧세바는 왕비였으나 지금 그녀는 태후(太后)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국에서 태후의 위치는 대단히 유력한 위치였다(J. Hammond). 그러므로 실제 열왕기에는 왕들의 모친들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14:31;15:10,13;왕하11:1;12:1;14:2;15:2 등). 그중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의 전횡(專橫)은 특기할 만하다(왕하 11:1-3). 분명 이런 맥락하에서 아도니야 역시 밧세바를 움직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밧세바에게 접근한 것이다.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뇨 -
화평에 해당하는 '샬롬'(*)은 보통 인사말로서 주로 사용된다(창 43:27;출 18:7). 그러나 궁금증이나 의혹을 담은 물음에서도 종종 사용된다(삼상 16:4;왕하 5:21;9:11,17). 의당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방문이 의아했을 것이다(Keil, Hammond). 왜냐하면 아도니야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들 솔로몬과 왕위를 놓고 다투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아도니야가 이제 다윗이 죽고난 후 솔로몬이 본격 통치를 시작할 즈음에 갑자기 밧세바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밧세바는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므로 경계심을 품은 질문을 한 것이다.
14또 가로되 내가 말씀할 일이 있나이다 밧세바가 가로되 말하라
내가 말씀할 일이 있나이다 -
원문은 "내가 말씀을 드려도 괜찮은지?"하는 은근함이 담긴 의문문의 형태이다. 이처럼 비교적 상세하게 그들의 대화 내용이 보도되는 것은 그 자리의 분위기를 전달함으로써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납득시키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도니야에게 호의를 가질 리 만무한 밧세바가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18절).
15저가 가로되 당신도 아시는바여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왕위는 내 것이었고 -
원문상 '내 것이다'(*, 리)란 말이 앞서 나오기 때문에 문법상 '내 것'이란 말이 강조적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Burney). 아무튼 아도니야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시 다윗의 생존한 아들들 중 그가 최연장자였기 때문이다<1:6>.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
이것은 분명히 상황 판단 착오로서, 사실 자체의 반대되는 곡해이다(1:20,40). 물론 아도니야의 유력한 추종 세력이 있었지만(1:7,9), 온 이스라엘의 지지가 자신에게 있었다는 주장은 아도니야의 교만한 성품과 왕위에 대한 미련이 빚은 착각이다<1:5>. 여하튼 교활하게도 아도니야는 본래 왕위가 자신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지 못한 사실을 과장하여 상기시킴으로써, 은근히 밧세바의 마음에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돌이켜 -
영역본 KJV는 'turned about'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본래의 원칙에서 벗어난 변칙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도니야가 이 말 다음에 그러한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다는 말로 돌리고는 있지만(Keil), 역시 내심으로는 왕위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떨치지 않고 있음과 아울러 솔로몬의 왕위를 인정치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J. Hammond, Patterson).
16이제 내가 한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옵소서 밧세바가 가로되 말하라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옵소서 -
원문은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Do notturn away your face)란 뜻이다. 즉 외면하여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간청이다.
17가로되 청컨대 솔로몬왕에게 말씀하여 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얼굴을 괄시치 아니하리이다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
아도니야의 이 간청은 다만 아비삭의 미모를 탐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아도니야의 이러한 요구는 궁극적으로 왕위를 노리는 행동으로 해석한다(Keil, B hr,Smith 등). 왜냐하면 아비삭은 다윗과 동침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그의 첩(후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Patterson). 그런데 파사 제국을 비롯한 고대 근동에서늘 선왕(先王)의 첩을 아내로 삼음으로써 후왕(後王)이 자신의 왕위를 널리 인정받는 관습이 있었다(Herodotus). 이런 맥락하에서 압살롬도 백성들의 목전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함으로써 왕권 쟁취를 널리 선언한 바 있있다(삼하 16:20-23). 따라서 비록 밧세바는 이러한 아도니야의 숨은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하고 쉽사리 그의 청을 들어 중재자의 자격으로 나섰지만, 지혜로운 솔로몬은 밧세바의 말을 통해 아도니야의 숨은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아도니야를 처형시키고 만다(25절). 그 이유는 솔로몬이 아도니야에게 일찍이 주지시켰던 바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1:52)라는 말대로 아도니야의 아비삭 요구 속에는 다시금 왕위를 노리는 '악한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18밧세바가 가로되 좋다 내가 너를 위하여 왕께 말하리라
좋다 내가...왕께 말하리라 -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까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대두된다. 즉 밧세바는 별 생각 없이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견해, 즉 사사로운 애정 문제가 정치적 연관을 가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뜻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해석(Wycliffe, B hr), 왕위 경쟁에서 탈락한 아도니야에 대한 일종의 위로와 동정의 대가로 쉽사리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견해 (C. Dentan), 밧세바는 자신이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은근히 과시하기 위해서 아도니야의 청을 수락했다는 견해(J. Hammond) 등이 논의된다. 그러나 아마도 이 모든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9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위에 앉고 그 모친을 위하여 자리를 베풀게 하고 그 우편에 앉게 하는지라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
솔로몬이 모친 밧세바를 태후(太后)로 존중하여 최대의 예우와 존경으로 맞이하는 모습이다. 70인역에는 왕이 입맞추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스라엘 왕국에서 태후의 지위는 매우 유력했던 것 같다(J.Hammond, Exell). 그런데 성경 기록상 밧세바는 최초의 공식적인 태후인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즉위에 큰 공헌을 한 밧세바(1:15-21)에 대향 예우가 이후 왕실의 태후에 대한 예우 확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우편에 앉게 하는지라 -
우편(右便)의 자리는 특히 고대 근동 사회에서 존대와 영광을 나타내는 자리였다(Keil). 그리고 그러한 관례는 성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시 110:1;ak 20:21;25:33;행 7:56;롬 8:34 등). 한편 본문이 이처럼 솔로몬의 극진한 예절을 소상히 기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솔로몬은 효성이 지극한 왕이었음을 알리고, 동시에 그러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모친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결코 괄시가 아니라 아도니야의 요청이 역모에 관련된 탓임을 나타내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시옵소서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괄시하지 아니하리이다
한 가지 작은 일로 -
아도니야의 "한 가지 소원"(16절)이 밧세바에게 이르러 "한가지 작은 일"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부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었었음을 나타낸다. 분명 밧세바는 그러한 부탁을 단순한 '애정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B hr, Hammond)
21가로되 청컨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
분명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이 부탁을 단순한 남녀간의 애정 문제로 인식하고, 이처럼 솔로몬에게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밧세바의 생각으로는, 수넴 여자 아비삭은 다윗과 동침하지 않았으므로(1:4), 그녀는 한낱 수종드는 시종에 블과할 뿐이라고 간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Keil). 여기에 덧붙여 밧세바는 왕위 경쟁에서 실패한 아도니야에 대한 일종의 동정심도 작용하여 이 문제를 '한 가지 작은 일'로 보았던 것이다(20절). 그러나 당시 일반 백성들은 분명 아비삭을 다윗의 첩(후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Patterson). 그리고 당시의 관례상 선왕(先王)의 후궁을 계승하여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 왕좌를 계승한다는 하나의 상징적 행위였다(삼하 3:7;12:8;16:20-22;Herodotus, -68). 그러므로 만일 아도니야의 뜻대로만 된다면, 그는 왕권회복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되고(Rawlinson), 또한 아도니야의 추종 세력들은 크게힘을 얻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삼하 16:21). 이러한 모든 배경하에서 밧세바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솔로몬은 이전에 아도니야의 반역죄를 용서해 주면서 한 말, 곧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고 경고했던 일이 떠올랐을 것이다(1:52).
22솔로몬왕이 그 모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 하고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
처음의 다정했던 분위기가 일순간 깨어지는 순간이다. 이때 솔로몬은 분명히 격노했을 것이다. 현명했던 그는 아도니야의 '한 가지 소원'(16절)의 저변(底邊)에 깔려 있던 역모의 흉계를 곧 간파했다. 그리고 그 흉계를 모르고 중개 역할을 한 모친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저를 위하여 왕위를 구하옵소서 -
결과적으로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요구한 것이 솔로몬에게 있어서는 왕위를 요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밧세바의 '한가지 작은 일'이 사실은 아도니야의 역모(逆謀)임을 단정하는 부분이다. 한편 본절 전체에서는 '위하여'에 해당하는 '로'(*)가 세번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거듭될 때마다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면서 하찮게 보이던 작은 부탁이 결국은 왕위를 노리는 의도였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즉 선왕의 후궁과 다름없는 아비삭을 요구하는 것은<17절> 원래 장자권을 가졌던 아도니야가<15절> 애초 자신의 1차 거사 세력과 재차 역모를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따라서 21절의 밧세바의 말과 본절의 솔로몬의 대답은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지만, 사건을 보는 시각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아비아달과...요압도 위하여 -
여기서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 장관 요압의 이름이 거론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1차 거사 실패 이후(1:7,49)에도 이들 핵심 세력 3인은 왕권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 암중 모색해 왔던 것 같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과거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들을 취하라고 권면한 자가 아히도벨이었던 것처럼(삼하 16:21), 이번에 아도니야에게 아비삭을 요구하라고 권면한 자가 혹 아비아달 또는 요압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Theodoret).
23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별울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
이것은 맹세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반드시 맹세의 내용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다. 즉 변경할 수 없는 결심을 나타내는 맹세의 관용적 용법이다(룻 1:!7;삼상 3:17;14:44 등).
24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나를 세워...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다윗의 맹세(1:29)에서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일반적인 맹세의 형식에다 자신의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신앙 고백을 결합시켜 결연히 맹세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 것은 곧 여호와의 살아계심이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자신의 맹세 내용 역시 결코변하시 않을 확고 부동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허락하신 말씀대로...집을 세우신 -
여기서 '집'에 해당하는 '바이트'(*)는 때때로 '가족'을 의미하기도 한다(창 50:22;수 2:18;렘 38:17). 따라서 혹자들은 '자손'을 주신 것으로 보고, 곧 솔로몬은 여기서 자신의 왕위를 이을 아들 르호보암을 낳은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Keil, Wordswoth). 그러나 솔로몬의 결혼은 이 일 뒤에 있었으므로(3:1). 그러한 견해는 따르기 곤란하다(B hr). 오히려 솔로몬의 이 말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견고한 왕위'를 허락해 주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12절;삼하 7:11-16). 즉 일찍이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허락하신 말씀대로(삼하 7:11-16;12:@4,25;대상22:6-10), 왕위가 다윗에 이어 솔로몬에게 주어짐으로써 그 왕위를 더욱 견고케 하셨다는 뜻이다.
25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저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브나야를 보내매...쳐서 죽였더라 -
원문상 '브나야의 손으로 쳐서 죽였다'란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왕의 친위 대장인 브나야 자신이 직접 행동한 것인지 아니면 그렛사람과 블렛사람<1:38>의 우두머리인 브나야의 감독하에 사형을 집행한 것인지 확실치않다. 아무튼 당시 왕의 친위(경호) 대장은 사형 집행관의 역할도 겸하였기 때문에, 솔로몬 왕의 명을 받은 브나야의 책임하에 아도니야에 대한 처형이 공식 집행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혹자들은 이유야 어떻든 솔로몬이 자신의 이복 형인 아도니야를 처형시킨 것은 당대히 세속적인 왕권 쟁탈 싸움과 다를 바 없는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비난한다. 사실 얼핏 보면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구태여 처형시킨 일은 가혹한 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혈연 관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대권을 위임받은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공의를 구현하는 데 주력해야만 했다. 따라서 1차 경고(1:52)에도 불구하고 재차 반역을 시도함으로써, 신정(神政) 왕국 이스라엘의 근간 질서를 문란케 한 아도니야의 죄는 엄중히 다스려져야 마땅하였다(Keil, Hammond, Patterson). 즉 솔로몬의 아도니야 처형 사건은단순히 '왕권 도전 세력의 제거'라는 정치적 차원에서 평가될 것이 아니라, '신정 왕국의 확립 및 강화'라는 신적 공의 실현의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솔로몬이 자기 형 아도니야를 처형시킨 사건은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그러나 정당했고,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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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속성:
화평, 지혜, 영광, 왕, 맹세,
진리, 약속, 견고한, 뜻, 공의,
힘, 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의도,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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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처럼 사람의 의도가
선한지 악한지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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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빛의 천사로 가장한, 거짓과 속임으로 옷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겉으로 보여지는 것들이 진리라고 할 수 없다..확실하지 못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밖에 없다..그래서 확실한 하나님이 계셔서 다행이다..약점이 보이는 사람을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약함이라고 볼 수 있다..앞에서는 칭찬하지만 뒤에서는 안좋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배신을 당한 경험을 토대로 사람들을 바라본다..저 사람도 언젠가 나를 버릴 거야..사람은 원래 그런 거야..라는 생각들..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마음인지 모르겠다..
불안감이 많이 사라진 것은 인간을 신뢰하는 마음의 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런 마음이 옳은지 모르겠다..나는 버려진 인생같아 보이지만..그 가시를..가시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쓰여지도록..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축복의 그릇으로 쓰여지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0W7nT0GLuo
(주님은 나의 최고봉 )
4월 6일 하나님과 죄의 충돌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일종의 순교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지옥의 권세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최고의 승리였습니다. 시간의 세계에서나 영원의 세계에 있어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 이루신 일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로 주님은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사람들의 생명의 근본이 되게 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에게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십니다. 성육신의 모든 의미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인류의 죄를 지신 인자로부터 분리시키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 즉 성육신은 구속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성육신하신 것이지 하나님 자신을 실현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시간과 영원의 중심이며 그 둘 간의 수수께끼들을 푸시는 해답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결코 깨달아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합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다다를 때 우리는 그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십자가라는 통로를 지나 새로운 생명에 거하게 됩니다.
구원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그렇게도 쉬운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만큼 엄청난 지불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이 충돌하여 만나는 지점이요 생명을 향하는 길이 열리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충돌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서 발생합니다. (역자 주 - 인간의 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쪽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의 죄로 인하여 신음하시고 고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를 푸셔야 하는 하나님의 대책은 십자가였습니다.)
https://m.cafe.daum.net/mercyreformedchurch/ULF8/1352?listURI=%2Fmercyreformedchurch%2FUL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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