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삶 QT👼열왕기상 8:1~11 🍑성전에 가득한 영광,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본문
https://tripol.tistory.com/447
열왕기상 8:1.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이에 -
본절 초두에 나오는 '이에'(*, 아즈)란 말은 솔로몬이 장로와 족장들을 소집하는 행동이 7:51의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것을 마친지라"에 이어지는 행동임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문제는 2절에서 보듯, 장로와 족장들이 솔로몬 왕에 의해 소집된 시점이 유대 종교력 '칠월'이라는데서 발생한다. 왜냐하면 6:38은 성전 건축을 마친 시점이 솔로몬 즉위 11년 '불 월' 곧 '팔 월'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팔월'에 끝난 일 다음에 '이에'로 이어지는 사건이 '칠월'일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 즉 성전 봉헌식이 이루어진 시기 문제에 대하여 크게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즉 (1) 성전이 완공된 해(솔로몬 즉위 11년)의 7월이라는 견해(Ewald, Hammond). 이는 8월에 가서야 비로소 성전이 완공되었으나(6:38). 거족적인 대절기인 초막절에 맞추기 위해 한달 앞당겨 봉헌식을 거행했다는 견해이다. (2) 성전 완공 다음 해의 7월이라는 견해(B hr, Patterson). 성전은 솔로몬 즉위 11년, 즉 B.C.959년 8월에 완공되었으나 성전 기구를 만드는 데 근 1년 정도 걸렸을 것이므로(7:13-50), 봉헌식은 건축 후 11개월만에 비로소 거행될 수 있었다는 견해이다. (3) 솔로몬의 궁전 완공(7:1-12) 이후라는 견해(Keil, Thenius). 이들은 9:1-10에 근거하여 성전 봉헌식은 성전 완공 13년 후인 궁전 완공 이후에 거행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전 완공 후 봉헌식까지 13년이나 기다렸다는 이 세번째의 견해는 무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첫번째 견해의 입장에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아즈'(*)는 상당히 폭넓은 말이므로 성전 완성 한달 전도 지시 가능하다. (2) 6:38의 '팔월'은 본장의 봉헌식까지 다 끝난 시점일 수 있다. (3)모든 마무가 팔월에 끝났더라도 성전의 봉헌식은 전통적인 절기, 즉 칠월의 장막절에 맞추는 것이 의의가 깊으므로 앞당겨 했을 가능성이 있다. (4) 오랜 숙원 사업이자 거국적 최대 관심사인 성전 봉헌식을 해를 달리할 정도로 미루었을 까닭이 없다(Pulpit Commentary).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성전 기구 제작(7:13-50) 기간을 고려한다면, 그래서 완전한 끝마무리 이후에 성전의 봉헌식을 치루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두번째의 견해도 일리가 있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
여기서 '시온'(Zion)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릉 이름인데,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아 '다윗 성'(the City of David)이라 명명하였다(삼하5:7). 그리고 다윗은 이곳 다윗 성에다 장막을 설치하고 여호와의 언약궤(법궤)를 임시로 안치하여 놓았었다(삼하 6:1-19).
이스라엘 장로와...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
광야를 유랑하던 시절의 모세 성막에서 이제 영구적 건물인 솔로몬 성전으로 법궤의 자리를 옮기는 봉헌식은 이스라엘 민족의 뜻깊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의 대표자들이 모두 소집된 자리에서 성전 봉헌식은 공시적으로 성대히 거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장로와 족장들'은 중앙 집권적 정부가 임명하는 관료와는 구별되는 존재들이다. 즉 그들은 인격이나 지혜, 무용 등의 탁월함으로 인해 혈연 및 지파 공동체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른바 자연 발생적인 공동체내의 유지나 지도자들이다(Davies). 그런고로 이들은 성전 건축에 관해 의논할 당시에도 다윗에 의해 소집된 바 있으며(대상 28:1-3), 건축 재료를 위해 자신들의 보물들을 기꺼이 바치기도 하였다(대상 29:6-9). 이렇듯 성전은 범민족적 사역에 의해 건축되었으므로,그 봉헌식에 있어서 국민의 대표자인 이들을 소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다윗 역시 궤를 옮겨오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소집하였었다(삼하 6:1).
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칠월 절기에 솔로몬왕에게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모이고 -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로 구성된 민족 전체 구성원들을 호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소집된 사람들, 즉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장로와 족장들)이 모인 것을 전 백성이 모인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Keil). 가장(家長)이 곧 가족 전체를 대표하던 고대의 사고 방식을 기억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에다님월 곧 칠월 -
'에다님'(*, 에타님)은 '시내에 물이 흐른다'는 뜻이다(Gesenius). 유대 종교력으로 7월(오늘날 태양력의 9-10월에 걸쳐 해당)에는 특별히 건기가 끝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Robinson). 곧 이른 비가 내리는 때로서, 이때 시내가 흘러내리기 때문에 명명된 월명(月明)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7월'이란 설명 어구가 첨가된 것은 이 달의 이름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티스리'로 바뀌어졌기 때문이다(Keil).
절기에 -
원래 '절기'에 해당하는 '하그'(*)에 관사를 붙여 '헤하그'(*)가 되면 그 자체로 '초막절'(장막절)을 의미하는 이름이 된다(대하 7:8;느 8:14;사30:29;겔 45:23, 25). '초막절'은 유대 종교력 칠월 15일부터 시작하여 칠일간 거행되는 절기로, 연중 절기 중 가장 크고 즐거울 뿐만 아니라 제일 마지막으로 거행되는 수확의 절기였다. 그리고 본래 이 절기는 광야의 유랑 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출 23:16;34:22;레 23:33-36;민 29:12-32;신 16:13-16). 그런데 이 초막절은 그 순서에 있어 계약 율법이 낭독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초막절'은 계약 갱신의 목적을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Rylaarsdam). 따라서 바로 그러한 절기에 율법의 판이 담긴 법궤를 성전에 안치하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었다. 아울러 초막적(장막절, 수장절) 행사는 광야 생활 동안 지켜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사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절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초막절을 맞이하여 광야 생활 이후 유리 방황하던 언약궤를 영구한 안식의 장소인 솔로몬 성전에 안치시키는 일을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이르매 제사장들이 궤를 메니라
제사장들이 궤를 메니라 -
민수기의 규례에 따르면, 벰궤는 레위인들이 메어야 했다. 그러나 손을 대어 만질 수는 없었다(민 4:15). 그런데도 다윗은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겼던 법궤를 회수할 때 그것을 수레에 싣게 하였고, 게다가 웃사는 손을 대가까지 함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삼하 6:3-7). 이제 솔로몬은 규정대로 궤를 운반하였다. 한편, 병행 구절인 대하 5:4에서는 '레위 사람이 궤를 메니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궤를 멘 자들은 '레위족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이다(대하 5:7). 원래 언약궤의 운반은 레위인 가운데서도 고핫 자손에게 맡겨졌으며(민 3:30, 31), 언약궤(법궤)에 덮개를 씌우거나 벗기는 일 등 언약궤를 실제로 돌보고 감독하는 일은 언제나 고핫 자손 중에서도 제사장 계통인 아론의 자손들에게 속한 일이었다(민 4:5-15). 그런데 여기서 솔로몬이 언약궤의 운반을 고핫 자손에게 맡기지 않고 상위 직위인 제사장들에게 직접 맡긴 것은, 성전 봉헌식을 더욱 경건하고 비중있게 거행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 같다(수 3:6, 15, 17;대상 15:11,12). 그리고 이처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직접 멘 실례는 매우 의의 깊은 역사적 사건, 예를 들면 요단 강 도하시(수 3:6, 17), 여리고 성 포위시(수 6:6)등에 이미 시행된 적이 있었다.
4. 여호와의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을 메고 올라가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여호와의 궤 -
'법궤'(레 16:2), '언약궤'(민 10:33), '증거궤'(출 26:33) 등으로 불리우는 이 궤는 다윗 성, 곧 시온 산 위 '다윗이 친 장막 가운데' 근 40여년간 머물러 있었다(삼하 6:17).
회막 -
보통 '장막' 또는 '성막'으로 불리던 '회막'은 실로와 놉을 거쳐 당시에는 기브온에 있었다(대하 1:3). 따라서 '언약궤'는 다윗 성으로부터, '회막'은 기브온 산당에서부터 각각 솔로몬 성전으로 운반되었다.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 -
이 모세 성막의 옛 기구들은 이제 그것들(놋제단, 향단, 떡상, 촛대 등)을 대신할 솔로몬 성전의 새 기구들이 제작되었으므로(7:23-50), 더이상 사용되지 않고 옮겨져 성전 창고에 보관되었을 것이다(7:51).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
제사장들은 특별히 언약궤를 메고, 레위인들은 성막과 여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광야 여정에서처럼 그 옮기는 방식과 절차를 따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으로 옮겼을 것이다(Keil; 민 4:1-33).
5. 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이 저와 함께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
6.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
성전의 핵심인 그 처소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나타내 주던 것은 법궤였다. 따라서 법궤 자체가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 되기도 하였다(민 10:35, 36). 그러므로 법궤가 성전의 자기 '처소'(*, 마콤) 즉 제 위치에 안치됨으로써,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가장 요긴한 부분의 일이 마무리된 것이다. 아무튼 모세 성막의 다른 모든 기물들은 솔로몬 성전어가 규모에 맞추어 모두 새롭게 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이 언약궤(법궤)만은 시내 산에서 만들어진(출 25:10-22;37:1-5) 바로 그것을 그대로 옮겨와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시켰던 것이다.
내전 -
본절에서 '내전'으로 번역된 '데비르'(*)는 6:16, 17에서 '내소'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
언약궤(법궤)는 금으로 만들어진 그룹들의 펼쳐진 날개 아래 안치되었다. 6:23-28 주석 참조.
7. 그룹들이 궤 처소 위에서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
법궤와 채(pole, 출 25:13), 곧 법궤에 속한 부분은 모두 그룹의 날개 아래 그늘에 있어 설혹 지성소 문을 열었을 때라도 항상 어두운 상태로 있게 하였다(12절).
8. 채가 긴 고로 채 끝이 내전 앞 성소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그 채는 오늘까지 그곳에 있으며
채가 긴 고로 채 끝이...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
본절이 설명하는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본절 수록의 목적이 전래의 성막 규정을 솔론몬 성전 역시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인 듯하다(Keil). 그런데 출 25:15의 규정에 의하면, 채를 법궤의 고리에 꿴 채로 두어야 했다. 어쨌든 본절의 상태를 여러 가지로 추측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다음과 같은 주장이 비교적 타당해 보인다.(1) 동서로 길게 위치한 성전에 대해 법궤는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였을 것이다(B hr,Patterson). 왜냐하면 성전 전면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룹의 날개 그늘에 법궤와 채가온전히 덮일 수 있는 적절한 위치가 남북이기 때문이다. (2) 본절의 기록상 관찰자의위치는 성소의 우편, 즉 지성소 휘장의 왼쪽을 젖혀 볼 수 있는 자리였을 것이다(Hammond, Montgomery). (3) 그리고 이 관찰자는 아마도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을 돕는 제사장 중 하나였을 것이다(Hammond).
그 채는...그곳에 있으며 -
법궤 운반용 '채'(pole)는 법궤의 고리에 꿰어진 상태로 붙어 있었는데(출 25:13, 15),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광야 생활 동안 나그네로 지냈음을 상기시켜 준다(Patterson).
오늘까지 -
본서(열왕기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기록되었다(서론, 기록 연대). 그러므로 본서가 기록될 당시에 솔로몬 성전은 파괴되었고(B.C.586년), 따라서 법궤에 딸린 채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까지'란 말은 솔로몬 성전의 파괴 이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저자가 본서를 기록할 때 이전의 기록물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Keil, Hammond).
9.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
히브리서 9:4에 의하면, 언약궤 안에는 본래 '십계명 두 돌판'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 완공 후(B.C.959년) 법궤를 지성소에 안치시킬 때 십계명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면 나머지 것들은 모세 시대 이후 여호수아 시대와 사사 시대, 그리고 사울과 다윗 시대를 거치는 근 500여년 동안의 어간에 없어진 듯하다. 아마도 엘리 제사장 시절 법궤가 블레셋에게 일시 탈취당했을 때(삼상 4:3-11) 유실된 듯하다(Hammond). 한편, 그러나 혹자들은 본래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만들어있었을 뿐(출 25:16;40:20;신 10:5), 만나 항아리와 싹난 지팡이는 '여호와 앞에'(출 26:33) 곧 '증거궤 앞에'(민 17:10) 두었었다고 본다(Keil, B hr). 그리고 히브리서 9:4의 말은 후대 유대 전승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 역시 완전히 배격할 수는 없다.
호렙 -
시내 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로 추정되는 '호렙 산'(Mt. Hored)은 율법이 주어지고 하나님과의 언약이 맺어진 곳으로(신 4:10-13), 통칭 '시내 산'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이름이다. 출 3:1 주석 참조.
10.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
혹자는 여기서 '구름'을 번제단 위에서 타오른 희생 제물의 연기 구름일 것이라고 보았으나(Bertheau), 전적으로 잘못이다.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영광스러운 '그 구름'(the cloud)이다. 한편, '구름'으로 번역된 '아난'(*)에는 '흐림', '안개'란 뜻도 있다. 그러나 한글 성경에는 언제나 구름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된 구름은 항상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연관되어 등장한다(시 18:11;사 4:5;단 7:13;마 17:5;계1:7). 예를 들면 시내 산과 그리고 출애굽의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실 때는 항상 구름이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출 19:16;24:15-18). 원래 구름은 신의 직접적인 광채를 대면할 때 파생되는 인간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한 신의 옷이라는 사상이 이러한 기록의 배후에 있다(Moor). 그러므로 구름은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표식이된다. 이러한 구름이 이전에 성막 봉헌시에도 나타났고(출 40:34, 35), 지금 성전 봉헌시에도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이전의 모세 성막을 승인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이 솔로몬 성전을 자신의 임재 처소로 승인하셨다는 것이다(Patterson, Hommond, Keil)>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
이 장면 역시 구름 때문에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던 모세와 비교된다(출 40:35). 즉 그때의 일이 지금에도 되풀이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의 모세 성막과 마찬가지로 솔로몬 성전 역시 자신의 영광의 거처로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구별되는 다른 것인가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혹자는 다른 특별한 언급이 없고, 12절은 단지 '캄캄한 곳에 계신 하나님'을 말하므로 본절은 그저 캄캄한 구름을 지칭한다고 본다(B hr).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은 여기서 '영광'은 '구름'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고, 어떤 '밝은 빛', '맹렬한 불'같은 것으로 설명한다(Hammond, Keil). 여기서 우리는 그 구체적 형태는 결정할 수 없더라도 '영광'은 '구름'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밝힐 수 있다. 우선 '구름'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밝힐 수 있다. 우선 '구름'과 '영광'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강렬해서 인간이 직접 대면할 수 없는 것이다(출 33:20).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름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외피(外皮) 구실을 하는 것이다(10절).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구름이 곧 영광 자체일 수 없음도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본절이 전해 주는바 '짙은 구름'은 그만치 강렬한 하나님의 영광을 반증(反證)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영광' 자체와는 구별되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한편,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빽빽한 구름'으로 당신의 임재의 가견적 표식을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써 당신의 임재를 알리사 교회의 시작을 기념하셨다(행 2:2).
성경 말씀:
흑암과 빽빽한 비구름으로 휘장을 삼으셨네.
시편 18:11
여호와께서 심판하고 소멸하는 영으로 예루살렘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고 그 곳에 뿌려진 죄악의 피를 정결하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 4:5
내가 또 밤의 환상 가운데 보니 사람처럼 생긴 분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와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었다.
다니엘 7:13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내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마태복음 17:5
보십시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을 찌른 사람들도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그분으로 인해서 슬피 울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요한계시록 1:7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천둥 소리가 나고 번개가 치며 빽빽한 구름이 산을 뒤덮은 가운데 큰 나팔 소리가 들려오자 야영지에 있는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 떨었다.
출애굽기 19:16
15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여호와의 영광의 광채가 시내산 위에 머물러 있고 구름이 6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7일째 되는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다.
17이때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그 영광스러운 광채가 산꼭대기에서 무섭게 타오르는 불처럼 보였다.
18모세는 구름이 뒤덮인 산으로 계속 올라가서 거기서 40일 동안 밤낮 머물러 있었다.
출애굽기 24:15-18
🟠🔴
🟢
🟣
하나님의 성품/속성:
약속/언약의, 보호, 은총/은혜,
인도, 안식, 성전, 거룩, 임재,
새로운, 율법, 영광, 밝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기념, 절기, 감사, 경건, 감독,
여호와 앞에,
🔵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먼저 찾는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성령의 능력과 임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점이
많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되어야 겠다.🩸✝️
🌱🌿🌳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다스려지는 이 세상 가운데 주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고 따를 수 있도록 성령의 충만하신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 가운데 가득하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하박국 2:14_바다가 물로 가득한 것처럼 세상이 나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Z32HiCoFzlU
(주님은 나의 최고봉)
4월 18일 준비된 사람
출 3:4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들 대부분은 안개 속에 갇힌 사람처럼 되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대답했고, 이는 그가 주님의 부르심에 준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준비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하며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하나님께 말씀 드리느라 바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주의 사역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은 부름이 왔을 때 그 상을 놓치지 않고 낚아챕니다. 우리는 무언가 붐을 일으키는 어떤 큰 기회를 기다리다가 그것이 오면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신속하게 부르짖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기를 누리시는 곳에서는 함께 있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의무에 대하여는 준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준비는 지극히 작은 일이던 큰 일이던 상관없이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든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듯이 우리도 깨어있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가 어떤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지면 주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그 의무를 다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주님과 함께 일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 함께 일하실 것을 기대하십니다. 즐거운 의무이던 궂은 의무이던 주께서 원하시는 곳에 우리를 두실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처럼 우리와 주님도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예비하십시오. 준비된 자는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뒤늦게 준비하느라고 꾸물거려서 되겠습니까? 타는 떨기나무는 준비된 영혼을 둘러싼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타오릅니다.
https://reformedkjy.tistory.com/9427
https://i.pinimg.com/564x/73/de/d5/73ded5e4a9e1808b828583e8519e57a1.jpg
https://i.pinimg.com/564x/6f/65/2e/6f652e68f8248eee0dafef50fedab44a.jpg
https://i.pinimg.com/736x/36/72/cb/3672cbbfda67ec7ac028b346aa189a5c.jpg
https://i.pinimg.com/564x/bb/95/5d/bb955d08a3ab40ad2b4313289429f64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