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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1 : 26~43🍑배교와 불순종에 대한 심판, 분열되는 나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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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1 : 26~43🍑배교와 불순종에 대한 심판, 분열되는 나라

credo15229850 2024. 4. 30. 10:41

https://tripol.tistory.com/450

 

히브리어 열왕기상 11장 전체 원어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웨함메렠 쉐로모 아합 나쉼 노케리요트 랍보트 웨엩 바트 파르오 모아비요트 암모니요트 아도미요트 체데니요트 히티요트 개역개정,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

tripol.tistory.com

열왕기상 11:26.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저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 어미의 이름은 스루아니 과부더라

여로보암이 또한....대적하였으니 -

이스라엘 남북 분열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인 여로보암아(Jeroboam)에 대하여 드디어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그는 북쪽 10지파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12:16-19), 그 같은 반란은 속국(屬國)들의 독립 운동이었던 하닷과 르손의 반역과는 달리 혁명적 성격을 띠었으므로 이스라엘 왕국에 더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밖에도 여로보암이 끼친 해악은 상당히 큰데, 특히 그는 열왕기가 민감하게 주목하는 우상 숭배에 관한 한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북왕국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금송아지 숭배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12:27-30; 출 32:1-5; 수 24:14이하). 그리하여 이후 열왕기기자가 북왕국의 악한 왕들을 평가할 때면 언제나 여로보암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 공식문이 될 지경이었다(16:19, 26; 22:52; 왕하 3:3; 10:29; 13:2 등). 즉 여로보암은 다윗과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열왕의 표준이 된 것이다.

에브라임 족속 -

에브라임 족속(Ephrathite)은 수효 면에서나 이스라엘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나 늘 유다 지파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에브라임은 서편 진지의 주도 세력이었다(민 2:18-24). 또한 가나안 정복 전쟁의 영웅 여호수아도 이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다(민 13:8; 신 31:7). 그 뿐 아니라 왕정 시대에 들어와 예루살렘이 종교적 수도가 되기 이전에는 에브라임 영토의 실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사실 역시 매우 중요하다(수 18:1; 22:12; 삿 18:31; 21:19; 삼상 1:3, 9; 2:14; 3:21). 이처럼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분열 이면에는 그러한 반목을 낳을 만한 뿌리깊은 경쟁 관계가 일찍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때문에 솔로몬 사후(死後) 에브라임과 유다의 반목은 강렬하게 표면화되었으며 대다수의 지파들은 여로보암을 후원하였던 것이다(12:12, 16-19). 그러나 훗날 에스겔은 이러한 지파간의 반목과 질시를 근원적으로 종식시키고 참된 단합과 화해의 왕국을 건설할 왕이 다윗 가계로부터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겔 37:15-28)

 스레다 -

스레다(Zereda)의 뜻은 '찌르기' 또는 '서늘함'이다. 그러나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진 바 없다. 대하 4:17절에 동일 지명이 나오긴 하나 그곳은 요단 골짜기의 성읍이란 점에서 본절의 스레다와는 다르다. 혹자는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세리라'(Zerira)가 곧 본절의 '스레다'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는데 분명치 않다(Lange)

 



 

27. 저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 부친 다윗의 성의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

 손을 들어 -

여기서 '손을 들다'(*, 헤림 야드)는 말은 '복종하기를 거부하다'는 뜻이다. 특히 '들다'(*, 룸)는 그 자체로 '교만하다', '높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신 8:14; 시 131:1; 사 2:12). 이와 반대로 성경에서 '누구에게 복종하다'는 말은 원문상 '손을 (어떤 사람의) 밑에 주다'는 어구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

9:15 주석 참조.

 다윗의 성의....수축(修築)하였는데 -

솔로몬은 유다 지파의 성읍이라 할 수 있는 다윗 성의 보수 공사를 유다지파가 아닌 에브라임 지파에게 떠맡겼다. 28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렇잖아도 유다 지파와 경쟁의식이 있던 에브라임 지파로서는 이에 불만이 없올 수 없었다(B hr). 26절 주석 참조.






 

28.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큰 용사 -

'큰 용사'(*, 깁보르 하일)는 문자 그대로 '강한 힘을 가진 전사(戰士)'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상류 계급의 남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상류 계급의 남자는 그 공동체 내에서 군사 행동의 의무와 책임을 가지게 된다(Gray). 사울은 베냐민 지파 내의 바로 그러한 가문 출신이었고,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 내에서 그러하였던 것 같다(삼상 9:1).

 요셉 족속 - 

요셉 족속은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말한다.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두 아들이다(창 48:5). 그래서 '요셉 족속'이라고 할 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 중 어느 하나를 말하거나 아니면 모두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 두지파는 북쪽의 가장 강한 지파들이기 때문에 '요셉 족속'은 곧 북왕국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Wintermute). 한편 야곱과 모세의 축복을 살펴보게 되면, 우리는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있어서의 요셉 족속의 중요성과 그 지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창 49:1-27; 신 33:1-29).

 감독하게 하였더니 -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예루살렘에서 일하게 된 요셉 족속의 부역 총 책임자로 임명한 것을 가리킨다.






 

29.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 -

아히야(Ahijah)는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인 실로(Shiloh)의 제사장 가문의 예언자이다. 때문에 혹자는 아히야가 에브라임 지파의 주도권 쟁취를 위해 여로보암을 충동질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은 그 근거가 지극히 희박하다. 물론 여로보암의 반역 과정에는 지파간의 반목 질시가 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히야 자신은 솔로몬의 우상 숭배를 여호와 신앙에 위배된 상황으로 보고 이를 타개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으므로 이를 대언했을 뿐이다(31-39절).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로보암의 집권 후에 아히야가 여로보암에게 대항한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14:1-16). 아무튼 이러한 선지자 아히야는 나단(Nathan) 선지자(1:8, 11-14) 이후로 부터 솔로몬과 르호보암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14:1-13; 대하 9:29).

 새 의복 -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다는 사실이 본절과 다음절에 걸쳐 두 번이나 언급된 것은 다음과 같은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는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아직 신생 제국에 불과한 시점에서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 것임을 상징한 표현인 것이다. 여호와 신앙이 배척된 상황에서는 다윗의 천신 만고의 노력과 솔로몬의 다방면의 치적(治績)등도 이렇듯 물거품에 불과하다 하겠다.






 

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

옷을 찢는 것이 곧 왕권 분열의 상징이 되었던 전례는 사울의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삼상 15:27-29). 한편 여기서 열 두 조각의 옷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나타낸다.






 

 



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열 조각 -

혹자(Keil)는 완전수로서의 '열'에 착안하여 '열 조각'의 의미를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온전한 왕권올 갖게 되리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즉 솔로몬에게 돌아간 '하나'(32절)에 대비시켜 온전한 왕권은 여로보암이 차지하고 솔로몬의 후손에게는 한 부분만이 돌아감을 말하려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열 조각'은 바로 '열 지파'를 비유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새삼 다른 해석을 부가할 필요가 없다.






 

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뺀 성 예루살렘 -

13절 주석 참조.

 한 지파 -

실제로는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가 남왕국 유다에 속하였다(12:21; 대하 11:3). 그럼에도 블구하고 본절은 유다와 베냐민을 통틀어 한 지파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로 대개 다음의 두 가지가 지적된다(B hr, Hammond, Schmidt). 유다와 베냐민 지경(地境)은 서로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경계에 위치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15:21-62 지도 참조. 사사 시대 때의 내란으로 인해 인구가 격감(激減)된 베냐민(삿 20:46-48)을 따라 한 지파로 치지 않았거나 유다에 의존되어 등장했기 때문이다.

 




 

33.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저희가 나를 버리고 -

여기서 '버리다'에 해당하는 '나타쉬'(*)는 마음으로부터 상대방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이는 강경한 관계 단절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8:57 주석을 참조하라.

 정직한 -

정직한'에 해당하는 '야솨르'(*)는 물론 도덕적 품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야솨르'가 가리키는 정직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말한다(신 6:18).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 요소에 거리낄 것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승인을 얻기에 부족하다면, 아직 야솨르에 못미치는 것이다. 이 야솨르의 구체적 표현은 하나님의 법과 약속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신 6:1-9).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약속을 충실하게 실행해 나가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정직을 증명해 주는 셈이다.






 

34.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

다윗도 전에 하나님의 법도를 어겨 범죄한 적이 있었다(삼하 11:1-27; 24:1-9).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인간적 욕정과 성결된 생활 간의 괴리로 인하여 큰 고뇌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고로 다윗은 나단의 책망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진실한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간절히 구했으며(삼하 12:13; 24:10; 시편 51편), 하나님께서는 이를 어여삐 보시고 죄과를 도말해 주셨던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엄격하신 계명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허다한 과오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죄의 은총을 힘입어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수행을 위해 끝까지 매진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늘 함께 할 것이다(히 3:6, 14).

솔로몬의 생전에는...빼앗지 아니하고 -

이처럼 이스라엘에 저주를 부른 장본인 솔로몬(1-13절)이 그의 생전에 이렇다 할 보응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일견 불합리하게 보인다. 사실 예고된 심판으로서의 왕국 분열은 정작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치루게 된다(35정마; 12장). 그런데 아비의 죄가 후손에게 씌위지는 것은 만족할 만한 합리적 해답(렘 31:29, 30)이 없는 수수께끼이다(Davison). 여하튼 다윗의 덕분으로 심판을 면하는 솔로몬이나 솔로몬의 죄를 뒤집어 쓰는 르호보암에게서 우리는 아비의 선악을 후손에게까지 응보한다는 신명기적 주제를 보게 된다(신 5:9, 10)

주관하게 -

원문에는 '나시(*)기 도;게'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시'는 '군주',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종종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출 16:22; 22:28; 수 9:15).






 

35.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

'손'(*, 야드)은 힘과 능력을 나타내며, 어떤 사물에 대한 고유한 책임과 권한을 의미하기도 한다. 8:15 주석 참조.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아들이 갖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주요 책임과 권한을 박탈하겠다는 말이다.






 

36.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

본절의 문맥상 '한 등불'은 '한 지파에 상응(相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 등불이 항상 있다'는 말은, 결코 부강과 번영은 아니지만 어쨌든 명맥은 계속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본절은 비록 한 지파만이라도 다윗 왕조를 계승토록 하겠다는 뜻이다. 한편 이와 반대로 '등불이 꺼지는 것'은 죽음, 파국 등을 의미한다(삼하 21:17).

 



 

37.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내가 너를 취(取)하리니 -

여기서 '취하다'는 '손에 넣다', '붙잡다'는 뜻의 '라카호'(*)에서 온 말이다. 이러한 용어 사용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도가 개재되었다고 본다. 여로보암이 왕이 된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의 결과(12:24)임을 밝히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이 북왕국의 왕이 된 것은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려는 것.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솔로몬을 왕으로 취하셨을 때에는 '라카흐'가 아닌 '선택받음'의 뜻이 뚜렷한 '바하르'(*)가 사용되었음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8:16; 삼하 6:21; 대상 28:5).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다스려 -

이 말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1)왕노릇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즉 절대 권력을 의미한다고 보는 입장(Keil, Living Bible등) 2)여로보암의 평소 소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라는 입장(B hr, 공동 번역 등). 그런데 이 두 입장은 어느 쪽이나 일면의 타당성을 제시하므로 선뜻 선택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의 입장을 취할 경우 이어지는 38절의 권면이 무색하게 돤다. 따라서 2)의 입장이 비교적 무난하리라 본다.







 

38.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모든 일에 순종하고...지키면...네게 주리라 -

비록 이스라엘 왕국의 정통성은 다윗의 후손들에 의해 계승되었던 남왕국 유다에게 있었지만(3:14; 6:12; 9:4; 삼하 7:11-16) 북왕국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신령한 자태를 드러내어야 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북왕국을 대표할 여로보암에게도 당신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축복을 보장하겠다는 언약을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와 같은 조건적 축복의 공식(신 28:1-14)은 모든 왕들에게 열려 있는 셈이다(Gates).

내가 너와 함께 있어 -

8:57 주석 참조.

 견고한 집을 세우고 -

여기서 '집'(*, 바아트)은 '왕조'(王朝)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즉 여로보암의 가문이 계속해서 왕위에 오르도록 한다는 의미이다(9:4, 5). 그러나 정작 여로보암 왕조는 그 아들 나답 대에 이르러 종말을 고하고 말았는데, 그 까닭은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행악(行惡)하였기 때문이다(15:25-30).

 



 

39.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40.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의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이러므로...죽이려 하매 -

39절과 본절 사이에는 생략 및 비약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29-39절의 내용은 여로보암과 아히야의 단 둘만의 대담(對談)인데 솔로몬이 당시에 그 사실을 알았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의 역심(逆心)을 알아차리게 된 경위가 본문에서 생략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여하튼 여로보암은 아히야와의 대담 이후 그의 역심(逆心)이 노출되는 어떤 행동을 보였을 것이다.

애굽왕 시삭 - 

애굽 22대 왕조의 창시자로서 르호보암 때 예루살렘을 약탈한 왕이다(14:25, 26). 그런데 이 시삭(Shishak)이 솔로몬의 장인인 애굽의 바로(3:1)는 아닌 듯하다. 솔로몬의 장인이 솔로몬의 대적에게 피신처를 마련해 주었을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3:1 주석을 참조하라.






 

41. 솔로몬의 남은 사적과 무릇 저의 행한 일과 그 지혜는 솔로몬의 행장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사적(事蹟) -

'사적'에 해당하는 '다바르'(*)는 '말하다', '정돈하다', '다스리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리고 관련된 의미들을 살펴보건대 '사적'은 한 사람의 개인적 행적이 아닌, 공적 활동에 대한 정리된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솔로몬의 행장 -

이 기록(the acts of Solomon)은 14:19, 29에 등장하는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역대 지략' 중 솔로몬에 해당하는 부분일 것이다. 즉 이는 역대왕의 실록 중 솔로몬의 치세사에 해당하는 부분일 것이다(Helmbold). 한편 본서 기자는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이 실록을 주된 자료로 참조하였음에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대하 35:26, 27 주석 및 도표를 참조하라.






 

42.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날 수가 사십년이라

다스린 날 수가 사십 년 -

대개의 학자들은 솔로몬이 즉위했을 때(2:12)를 20세 전후로 본다(Keil, Lange). 따라서 솔로몬은 대략 60세 정도까지 통치했던 셈이다. 3:7 주석 참조. 한편 솔로몬의 통치 기간은 부친 다윗의 통치 기간과 마찬가지로 40년간이다(2:11). 그런데 혹자에 의하면, 솔로몬이 왕위에 있은 기간은 다윗 생존시의 섭정 기간을 포함해야 하므로 40년 이상이라고 한다(Gates).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결정짓기 어렵다. 왜냐하면 다윗의 40년 통치 기간에 과연 섭정 기간이 포함 되었는지의 여부 조차 모호하기 때문이다.






 

 

43. 솔로몬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부친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솔로몬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

비록 열왕기가 솔로몬 치세에 관해 많은 부분을 할당하였지만, 소개된 내용이 충실하게 연대기적 기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기록에는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여러 독럽적인 단편들이 서로 엇갈려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시간적으로 후에 속한 궁전 건축을 언급한 다음 (7:13-51), 다시 성전의 기물을 소개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7:1-12). 그러므로 열왕기의 기록만 가지고 솔로몬의 치세를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기란 매우 어렵다(Myers). 그리고 41절이 암시하듯 열왕기는 솔로몬에 관한 기록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더구나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그에게 어떤 내적 변화가 있었는지 일체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솔로몬이 말년에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였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시적(通視的)으로 살펴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대하 11:17은 '다윗과 솔로몬의 길'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솔로몬의 생애에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전도서는 솔로몬 자신의 인생을 총결산한 책으로 간주되는데, 이 전도서의 결론은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이다(전12:13) 2)삼하7:12-17절은 다윗의 후손에게 징계를 내릴지라도 끝내 버리지는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다.

신 6:18
신 6:1-9
히 3:6, 14
삼하 12:13; 24:10; 시편 51편
신 5:9,10
열왕기상 12:24

 

 

 

🟠🔴
🟢

 

여로보암이..대적하였으니..
손을..용사라..아히야가..
의복을..12조각..여호와의
말씀이..솔로몬에게..나의
법도와..지켰으므로..
주관하게..빼앗아..등불이..
왕이..순종하고..주리라..
괴롭게..죽이려..도망하여..
기록되지..사십년이라..
🟣
하나님의 성품/속성:
진실, 정직, 옳은, 
언약/약속의, 보응하시는, 
사죄, 은총, 사랑, 위로, 
지도자, 번영, 왕, 주권자, 
신령한, 축복, 다스리시는,
징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종, 책임, 충실하게 실행
하는, 회개, 경외, 순종,
🔵
자비의 하나님께서 
불순종에 대한 징계를
영원히 주시기 보다
괴로움의 끝을 정하여
주심으로 주님께 돌아갈
기회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
오랜 시간 동안 정리하지 못한 복잡한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온갖 거짓말과 속임수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과 걱정의 마음들로 해야될 일들도 미루게 되고 사방에 담이 있는 듯한 답답함입니다.. 하나님 보다 우선시 하는 마음들..주님에 대한 생각보다 세상과 여러 일들에 대한 마음들로 어지러워져 있었어요..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계속 기도를 드렸었는데 제가 생각한 응답과 방향이 달라서 이상하다고 계속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를 괴롭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온전한 회개를 통해 주님을 따르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에 주님의 크신 긍휼과 인자하심이 보였습니다..!
부족하고 흠이 많아서 늘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복의 날을 기다리고 기도하며 인내의 열매를 맺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PQq39r-rlA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미리 생각해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특이한 방법으로 터집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특성에는 수학적인 확실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장담할 수 없습니다. – “나는 지금부터 악한 생각을 하지 않으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믿을 거예요.” 사랑의 특성은 자발성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앞에 표준으로 세워 놓지 않아도 주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아 주관하시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표준에 따라 살게 됩니다.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면 어떤 특별한 감정에 끌린 것도 아닌데 주를 따르고 있는 자신을 보며 놀라게 됩니다. 이는 내 안에 자발적인 참된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행한 모든 일은 과거로 지난 후에야 그 본질이 판명됩니다.

사랑의 샘은 하나님 안에 있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넓게 부어진 바 될 때 그때야 그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있게 됩니다.(롬 5:5)

만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주께 증거하려고 노력한다면 이는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저절로 우러나는 사랑이야말로 주를 향한 참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뒤돌아보면 왜 우리가 어떤 일들을 행하였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이같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그 이유는 사랑의 샘이 성령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https://m.cafe.daum.net/mercyreformedchurch/ULF8/1377?listURI=%2Fmercyreformedchurch%2FULF8

 

4월 30일 주님은 나의 최고봉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미리 생각해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특이한 방법으로 터집니다.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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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이 너무 뜸하면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연약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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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참고 참았는데 이제 한계다..놓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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