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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3 : 1~10🍑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에도 회개하지 않는 굳은 마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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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3 : 1~10🍑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에도 회개하지 않는 굳은 마음

credo15229850 2024. 5. 4. 06:06

https://tripol.tistory.com/452

 

히브리어 열왕기상 13장 전체 원어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웨힌네 이쉬 엘로힘 바 미후다 비데발 아도나이 엘 베이트 엘 웨야로브암 오메드 알 함미즈베아흐 레하크티르 개역개정,1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

tripol.tistory.com

열왕기상 13: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 -

'하나님의 사람'(*, 이쉬 하엘로힘)이란 '선지자'(*, 나비)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나비'와 '이쉬 하엘로힘'간에는 약간의 의미 차이가 있으니 곧 전자가 '선지자의 소명'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후자는 선지자가 수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하는 단어라 하겠다(H.Austel, R.D.Patterson). 아무튼 이 '하나님의 사람'이란 용어는 대개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익명(匿名)의 대상을 지칭하는 경우(삼상 2:27; 대하 25:7). (2)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는 경우(신 33:1; 왕상 17:18; 대하 8:14 등).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는 열왕기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특징을 지닌다(12:22; 20:28; 황하 1:9; 4:7; 5:8;6:6; 8:2 등). 한편 이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하여선 유다 출신의 선지자란 사실 이외에는 달리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런데도 학자에 따라선 선지자 잇도(대하9:29)나(Josephus, Antip, VIII) 스마야(대하 12:15)일 것으로 추정한다(Tertullian).그러나 잇도나 스마야가 비교적 오랫동안 활약한 선지자들임에 반해 이 '하나님의 사람'은 본장에 등장, 잠시 활동하다 죽고 말았으니(20-24절) 온당치 못한 주장들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

공동 번역은 이를 '야훼의 말씀을 전할 임무를 띠고'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인하여'에 해당하는 원어 '비'(*)는 '안에'(in)란 뜻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가 있을 때 그 말씀을 받아 대언(代言)하며 선포하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Keil &Delitzsch).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

이처럼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키 위해 벧엘에까지 여행하였다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북왕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참선지자들이 없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벧엘에 살던 늙은 선지자마저 진리를 증거하는 대신 거짓을 일삼았던 점(11-19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여로보암이 ... 분향하는지라 -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절기인 8월 15일을 맞이하여 벧엘에서 친히 제의(祭儀)를 집전한 것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2:32 주석을 참조하라.

 

 

 

 

 

2.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예조(豫兆) -

'예조'(*, 모페트)는 '이적' (출 4:21; 대상 16:12; 시105:5,6)으로도 번역되긴 하나 여기서는 전조(前兆), 즉 앞 일을 미리 나타내 보이는조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이 조짐은 다만 그 앞일을 지시하는 기능으로 한정된다. 즉 본문에서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현상(5절)은 훗날 요시야의 숙정(肅正)을 미리 알리는 조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왕하 23:15-20). 그러므로 이는 예언자의 선포 내용에 권위를 더해 주는 부수 현상(附隧現像)일 따름이다. 즉 '예조'란 어디까나 그 이적 자체의 경이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고(2절) 그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 이처럼 즉각적으로 이적을 보이신 것은, 당시 백성들의 신앙 상태가 매우 퇴락되었음을 시사하는 단적인 예이다(출 4:21; 대상 16:12,13; 시 105:5,6). 특히 여로보암은 자신의 신체에 발생한 경고의 이적을 직접 체험하고서도 잠깐 놀랐을 뿐(4절) 곧 완패(頑悖)한 심령으로 되돌아갔으며, 결국에는 그의 온 집이 멸절당하는 화를 당하고 말았다(33,34절; 15:27-30).

 

이는 여호와의 말씀히신 예조라 -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예조(3,5절)와 예언(2절)의 관계에 있어 그 강조점이 역전(逆轉)된 듯한 느낌이 있다. 즉 예조 자체가 여호와의 말씀 내용이요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동 번역은 본절을 '그 말이 야훼(여호와)께 받은 것임을 보여 주는 한 표적'으로 풀이하여 그 의미 관계를 잘 보여준다(Living Bible, this proof that his message was from the Lord).



 

 

 

 

 

4. 여로보암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여로보암 왕이 ... 들을 때에 -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의 극적 구조는 다음과 같은 요소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즉 여로보암이 자신의 정책적 성공을 도모하기 위한 종교행사를 거행하는 중간에(1절; 12:25-33) 홀연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 임했다는 점이다. 이는 곧 훗날 벨사살 왕의 잔치 자리에 손가락이 나타나 심판의 글자를 쓴 내용과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단 5:1-9, 17-28). 즉 축제, 잔치 등의 요소가 심판, 파멸과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절정의 순간에 돌연 그에 대한 심판이 들려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돌발성(突發性)은 심판 선고가 주는 충격을 훨씬 강하게 만들고 있다. 즉 여로보암은 막 분향하던 참에 들려온 심판 선포에 소스라쳐 놀람과 분노의 당혹한 숨결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

여로보암은 자신의 종교 정책이 순탄하게 진행되어 마침내 거국적인 종교 행사를 가지게 된 마당에 갑작스런 선지자의 출현과 모욕적 발언이 있자 극도로 분노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손을 들어 신복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그순간 손이 말라버렸다. 이는 아마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은 마비 현상이었던 것 같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능의 근원이 당신께 있음을 입중하였으며, 그 권능으로 말미암은 심판을 미리 경고하셨다(욥 12:13; 37:23).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수행하는 자를 늘보호하고 계신다(시 17:8). 따라서 대적들의 어떠한 핍박도 주의 종들을 상하게 할 수없는 것이다(단 6:22; 행 16:26).

 

 말라 -

'말라'에 해당하는 '야베쉬'(*)는 '시들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이는 식물이 수분이 없어 메마르는 모양을 가리킨다(욥 18:16; 시 102:11; 사 19:7; 렘12:4; 겔 17:9). 그러나 이 '야베쉬'는 또한 '심판'을 의미한다. 땅이 마르고 가뭄이 드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심판이다(사 15:6; 19:5-7; 렘 12:4; 50:38).



 

 

 

 

 

 

 

5.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

여기서 '재'는 희생(犧牲) 제물인 짐승을 태우고 난 뒤남은 재를 가리킨다. 그런데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규례에 따르면 이러한 재는 제사장이 긁어모아 제단 동편 진 밖 재버리는 곳으로 가지고 가 그곳에다 버리도록 되어 있다(레 1:16; 6:10,11). 그런데 본절에서 재가 제단에 쏟아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희생 제사를 열납치 않으셨음과 그 제사와 제단이 부정(不淨)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Lahge,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I,P.204).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 -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my God)으로 부르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your God)으로 말한 사실이 주목을 끈다. 이에 대하여선 학자들이 대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불법한 여로보암이 감히 자기 하나님으로 부를 엄두를 못냈다는 주장(Matthew Henry, Wordsworth). (2) 이는 다만 '너를 보내신 그분께'라는 정도의 의미라는 주장 (B hr, Hammond). 그런데 여로보암의 이후 행적과 그 심령의 완악함을 볼 때 첫번째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33,34절). 따라서 위의 견해 중 후자의 설명이 보다 적절하다고 하겠다(Pulpit Commentary).

 

 은혜를 구하여 -

'은혜를 구하여'(*, 힐라 에트페네)는 문자대로는 '얼굴을 어루만지다'는 뜻이다. 즉 이는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시려고 '얼굴'(*, 프네)을 드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려 달라는 간청이다.



 

 

 

 

 

 

 

 

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제의를 하게 된 이유는 회유(懷柔)에 초점을 두고 설명되어야 한다. 즉 자신의 왕권을 수호키위해 여호와 신앙의 규례마저 무시한 여로보암(12:27-33)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한 하나님의 능력은 가슴 섬뜩한 일이었다(3-6절). 즉 이는 그의 왕권에 대한 백성들의 의심을 살만한 것으로서, 자칫 국내적 소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의 소리가 신적 권능이 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그를 뇌물로 회유시키려 했던 것이다(B hr).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찌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왕과 ...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

고대 근동 지방에 있어서 집으로의 초대와 식사는 우호 및 친교의 표시이다(창 13:1-8; 19:1-3). 따라서 본절은 우상 숭배자들과의 여하한 교제도 나누지 않겠다는 뜻으로서,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백성들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으로 우상 숭배자 혹은 불경건한 자들과는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으며(요 4:9),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교제를 금할 대상으로서 탐람하는 자, 우상 숭배자,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討索)하는 자, 분쟁을 조성하는 자 등을 꼽은 바 있다(롬 16:17; 고전 5:11; 살후 3:6,14; 딤후 3:5; 약 4:4; 요이 10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명령이 내려진 까닭은 귀로의 도중에 여하한 이유로든 벧엘 사람들과 더블어 지체됨을 방지하려는 것이다(Keil & Delitzsch).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들어간 것은 오직 경고를 발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하한 사귐이나 지연이라도 이 경고의 심각성에 있어서는 감소되기 마련이다(Matthew Henry). 그런데 이 모든 주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실수한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즉 그는 벧엘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식사 초대에 응하고 만 것이다(18,19절). 한편 본문에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은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벧엘에 들어올 때 취한 길을 나갈 때는 취하지 않는다는 뜻(10절). (2) 일단 진행한 통로를 여하한 이유로든 돌이키지 않는다는 뜻(16,17절).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이에 다른 길로 가고 -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람이 성공적으로 자기 소임을 다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한편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 20km 지점으로 남왕국 유다와의 번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12:29 주석 참조. 이로 보아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벧엘까지 온 것이 그리 먼여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사명은 홀연히 벧엘에 나타나 경고를 던지고는 지체없이 사라지는 데있었다.



성경 말씀:

 

 

22나의 하나님이 자기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하신 것은 나에게 죄가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왕이시여, 나는 또 왕에게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단 6:22

 

26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집터가 흔들리고 감방 문이 모두 열리며 죄수들을 묶었던 쇠고랑이 다 풀어졌다.

행 16:26

 

8주의 눈동자처럼 나를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나를 숨기시며

시 17:8

 

 

🟠🔴
🟢

 

하나님의 사람이..말씀으로..
단을 향하여..제사할..
예조라..여호와의..잡으라..
손이 말라..갈라지며..
재가..은혜를..성하게
기도하라..나와..예물을..
준다 할찌라도..아니하리니..
명하여..가지도..다른 길로..
🟣
하나님의 성품/속성:
심판, 예언, 권능, 보호, 
은혜, 규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명/사명, 희생, 제사,  
기도/간청,
🔵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여로보암에게도 마른
손을 회복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다시 주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온전한
회개를 드려야 겠다.🩸✝️
🌱🌿🌳
우상숭배에 대해 생각해보니, 스스로가 무리하게 세운 계획과 할일을 반드시 달성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삶의 태도가 하나님보다 우선시 하는 또다른 모양의 우상숭배가 아닐까 추측해봤다.
하나님 자리에 있어야 할 마음의 주인이 주님이 아닌 제가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온전한 회개를 드려서 반복되는 이런 내가 주인된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CEaPjdIlqI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9)

다른 사람을 향한 개인적인 동정심을 가지고 주의 보좌로 나아와 그들을 위하여 우리가 청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중보기도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는 것입니다.

영적 완고함은 중보기도의 최대 장애물입니다. 영적 완고함은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좋은 점에 동감하게 되면서 속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속죄가 필요하지 않는 어떤 선하고 덕스러운 것들이 있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발생하는 다른 사람을 향한 영적 무관심과 나태함은 우리로 하여금 중보기도를 할 수 없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우리 자신의 생각을 고집합니다. 이러한 때 중보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는 자신의 인간적 연민을 영광스럽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죄와 일치시키셨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가진 인간들을 향한 모든 공감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리적 중보기도란 마음과 뜻을 다하여, 다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인간적인 연민을 버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으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인간적 연민을 고집합니까? 아니면 주님의 관심으로 대치되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님을 못마땅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습니까? 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으로 충만합니까? 내 방식을 고집합니까? 아니면 주님과 일치하기로 결심했습니까?

 

 

https://m.cafe.daum.net/mercyreformedchurch/ULF8/1381?listURI=%2Fmercyreformedchurch%2FULF8

 

5월 4일 주님은 나의 최고봉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9) 다른 사람을 향한 개인적인 동정심을 가지고 주의 보좌로 나아와 그들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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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못온다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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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온다느이 속상효🐻🤍

 

 

 

 

https://i.pinimg.com/564x/a0/52/8a/a0528a14297271f26bda1c39032cf5e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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