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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3 : 25~34🍑회개를 외치지 않는 선지자, 악을 버리지 않는 지도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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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3:25.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지나가는 사람들이...보고 -
이스라엘의 행인들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유다 선지자의 시체와 그 특이한 죽음 현장을 목격하고서, 늙은 선지자의 성읍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것을 화제 거리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된 원인을 알고 그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 벧엘인과 더불어 음식을 저버리고 가증한 우상 숭배를 일삼는 자신들에게 임할 징벌은 실로 엄청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선지자가 듣고 -
행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벤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21,22절)이 실현된 데 대한 경의감과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한 동정심과 죄책감 등으로 말미암아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부랴부랴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는 그 일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듯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선포된 말씀 또한 그대로 성취되리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32절).
어긴 -
'어긴'(*, 마라)은 '쓰게 하다', '반역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곧불순종과 배반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정을 쓰리게 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동사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귀환 도중에 겪은 불행(24절)을 확연히 조명해 주는 의미 해석이 들어 있다. 즉 그는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같은 불행을 만난 것이다. 이에 관한보다 자세한 내용은 20,21절 주석을 참조하라.
붙이시매 -
'붙이시매'(*, 나탄)는 '위임하다', '허락하다'는 뜻이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 목적을 위해서 어떤 대리물의 행동을 허용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동사 사용에서 사자 습격 사건(24,25절)을 바라보는 늙은 선지자의 관점을 볼 수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시각이다.
27. 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
이는 13절과 동일한 표현이며 동일한 신속함이다. 그러나 이제 늙은 선지자의 내심은 그때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즉 앞서와는 달리 이제 그는 전체사건에 일정하게 작용하는 한 의지(意志)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노련한 종교가로서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술수로서는 도저히 가리울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 거기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벧엘 제단의 어용 신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벧엘 제단에 대하여 절대적인 부정(absolutey No!)의 선고(1-5절)를 내리셨다는 것이다. 한편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발람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Montgomery, 민 22:1-24:25).
28.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시체(屍體) -
'시체'(*, 네벧라)는 '시들다'(*, 나벧)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이 동사에는 시들은 잎사귀나 말라버린 초목의 이미지가 실려 있다. 이처럼 생명의 시듦이나 말라버림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하는데 사용되거니와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심판이다. 4절 주석 참조.
길에 버린 바 되었고 -
여타 민족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도 시체가 제대로 매장되지 않고 방치되는 것은 큰 수치의 표시이다(삼하 2:10이하; 삼상31:11-13 등). 그리고 이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신 28:62;렘 7:23; 26:23; 사 5:25).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이 길에 널브러져 있음은 그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심판받은 시체가 벧엘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은 그 성읍에 수치와 부정(不淨)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하다(신 21: 1-9). 한편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해진 이러한 징벌은 일견 너무 가혹한 처사인 것같다. 그러나 그 일은 개별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벧엘 제단에 대한 하나님의 극한 분노와 혐오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1-5절).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혐오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저지른 실수는 결코 경미(輕微)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있다. 즉 비록 동정의 여지는 있지만, 그가 벧엘로 되돌아와 식사를 함께 한 것(15-19절)은 그 성읍에 내린 경고의 엄중함을 격감시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체가 벧엘에 버리우는 죽임을 당하게 하셔서라도 경고의 준엄함을 손상받지 않게 하신 것이다.
나귀와 사자는...찢지도 아니하였더라 -
나귀와 사자가 이때까지 기인한 연출을 계속하고 있었던 까닭이 분명해진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이를 보전(保全)해 줄 인물의 도착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벧엘의 노선지자가 도착하자 이것으로 그 동물들의 소임은 끝난 것이다. 24절 주석 참조.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떠들어 -
'떠들어'(*, 나사)는 '들다', '메다'는 뜻이다. 즉 늙은 선지자는시신을 들쳐 메어 나귀에 실은 것이다.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연로한 선지자가 손수 치루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사죄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반영한다. 26절 주석 참조.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
늙은 선지자가 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벧엘로 들였는지 까닭이 분명치 않다. 가장 가능성있는 추측은 하나님의 사람의 묘를 벧엘에 둠으로써 그 성읍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와 교훈의 표시로 남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벧엘의 노(老) 종교가는 회오(悔悟)를 통해 전체 사건의 의미를 깊이 자각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선 하나님 편에 선 적극적인 봉사를 한 셈이다.
30.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그 시체를...나의 형제여 하니라 -
본절에는 세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 즉 (1)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늙은 선지자 자신의 묘에 장사한 것, (2) 애곡, (3) '오호라 나의 형제여'라는 호칭 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일단 히브리인들의 장례식에 관습적으로 따르는 요소로서 볼 수 있다(렘 22:18). 그러나 관습적이라 해서 이 일을 무덤덤히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혹자는 시신을 남의 땅, 남의 무덤에 묻은 것은 잔인한 처사라고 주장한다(Hall). 그러나 실상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을 자기 무덤에 안장한 늙은 선지자의 행동은 거꾸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존경의 표시이다(Hammond, 창 23:6; 룻 1:17). 그러기에 신약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예수님을 자신의 묘에 장사했다(마 27:57-60).
오호라 나의 형제여 -
히브리인들의 장례 절차에 있어서도 애곡(哀哭)은 필수요소이다. 그런데 이때 애곡할 의무가 있는 자는 가까운 친척들이었으며(창 23:2; 삼하11:26), 여기에 구경꾼들이 가담하여 같이 울거나(삼상 25:1; 삼하 1:11) 직업적으로 만가를 부르며 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대하 35:25; 렘 9:16-19; 암 5:16). 한편 벧엘 선지자는 사자(死者)에 대한 깊은 조의(弔意)의 표시로서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을 포함하여 모을 수 있는 인원을 총동원하여 애곡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KJV, RSV,그리고 NIV는 본절의 '슬피울며'를 '그들이 애곡하여'(they mourned)로 번역하였던 것이다.
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내가 죽거든...장사하되 -
앞절과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친척'으로 예우하여 장례지낸 것이라 한다(B hr). 그러나 본절은 친척 이상의 무엇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늙은 선지자의 유언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과 한 묘실에 '합장'(合葬)해 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부부 사이에나 볼 수 있는 일이다(창조 25:7-10).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
이 역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 표시'에 다름 아니다(B hr 등). 그리고 이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참선지자임을 벧엘 선지자가 시인하고 또 이념적 동의를 표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이 유언 덕분에 결과적으로 훗날 벧엘 선지자 자신의 주검도 안전하게 보존되었다. 즉 약 300년 후 요시야 왕이 우상 숭배자들의 뼈들을 거두어 불사를 때 하나님의 사람이 묻힌 묘실은 손대지 않았던 것이다(왕하 23:16-18). 이와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이러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유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벧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이 필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음을 볼 때 이는 전혀 타당성 없는 주장만은 아니다(32절).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사마리아 성읍 -
'사마리아'(*)란 지명은 여로보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그때로부터 약 50년 뒤에 새로 생긴 지명이다. 즉 오므리가 사마리아 산을 사 성읍을 건축한 후 그곳을 북왕국의 수도로 결정하면서 새로 정한 명칭인 것이다(16:24). 따라서 이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정확한 말로 보기 어려우며, 후대 기록자가 자기 당대의 용어를 구사한 것으로 봐야 한다(Keil, H.J. Austel, R.D.Patterson). 즉 본절에서 열왕기 기자는 벧엘 선지자의 말을 그대로 언급하지 않고,다만 그 말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 기록 당시의 언어로 표현하였다 하겠다. 다시말해 사마리아는 오므리 왕 이후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으므로 사마리아에 대한 경고는 곧 북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경고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 -
2절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은 본절에서 그 대상 범위가 좀더 넓게 잡혀있다. 이러한 증폭은 후대의 상황이 반영, 첨가된 것이다. 즉 2절은 막연하게 어떠한 산당을 말하고 있으나 본절은 '사마리아 성읍들의 모든 산당'으로 명료하게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의적(自意的) 첨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후대의 상황이 적용된 기록임은 분명하다.
33.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 일 후에도...돌이키지 아니하고 -
본장에서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는 결국 본장 전체의 구도상 여로보암의 완악함을 가일층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즉 그렇게 엄중한 경고를 받고도 여로보암은 타락과 배교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편 분열 왕국 시대의 첫부분에 해당하는 본장이 이처럼 여로보암의 완악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즉 분열 왕국 시대의 남왕국 유다에는 그래도 비교적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들이 나타나곤 했다. 본서 서론 도표, '남왕국 유다의 열왕들' 참조. 그리고 이러한 왕들이 등장할 때마다 여호와 신앙은 주기적으로 부흥했다(Schultz). 그러기에 열강의 틈새에서도 남왕국의 존속 연한은 북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길었다(북왕국 멸망은 B.C. 722년, 남왕국 멸망은 B.C. 568년).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결국 남북 왕국 각각의 신앙 상태와 결부된다. 즉 비록 전체적으로 쇠락해가는 진행 방향이긴 했어도 남왕국의 역사는 간간(間間)이 부흥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의 배후에는 다윗이라는 이상적 군왕이 서 있었던 것이다(11:9-13; 삼하 7:8-16). 하지만 이에 반해 북왕국의 왕들은 예외없이 우상 숭배에 몰두함으로서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모면치 못한다. 그런데 여로보암이야말로 북왕국에 이러한 우상 숭배의 풍조를 뿌리내린 장본인이다. 말하자면 후대의 왕들은 그가 조성한 토양에서 그의 선례를 본받아 우상숭배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 사가(史家)들의 신앙적 관점에서 북왕국 우상 숭배의 원인균(原因菌)인 여로보암의 완악함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본절의 '이 일 후에도...' 부분은 바로 그러한 초점이 모아진 곳이다.
보통 백성 -
비단 레위 지파 출신 뿐 아니라 일반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12:3 주석을 참조하라.
삼았으므로 -
'삼았으므로'에 해당하는 '밀레에트 야도'(*)는 문자대로는 '손을 채우다'이다. 이 말은 제사장직 수여를 의미하는 전문 용어이다(Keil). 한편 아론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규례(출 28:1-4)를 무시한 여로보암의 이러한 정책은 북왕국 내에 진정한 여호와 종교가 발붙일 여유를 없애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신앙의 자유와 참예배를 갈구하는 자들은 부득이 유다를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하 11:13-17). 12:31 주석 참조.
34.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이 일이...죄가 되어 -
'이 일'이란 앞에서 언급된 여로보암의 모든 죄악된 행위를 총칭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즉 이는 (1) 금송아지 숭배(12:28,29) (2)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음(12:31; 13:33) (3)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함(12:32,33)등을 의미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이 그러한 소행을 계속했다는 것이 본절에서 지적하는 요점이다.
멸망케 되니라 -
'멸망케 되니라'(*, 솨마드)는 '끝내다', '완전히 잡아 꺾다'는 뜻이다. 이 말은 완전히 멸망되어 자취도 남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실제로 훗날 여로보암 왕조는 2대로 그치고 멸절되고 만다. 즉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즉위 2년만에 살해당하면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던 것이다(15:25-30).
성경 말씀:
당신은 우리 가운데 사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우리 묘지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아내를 장사하십시오. 당신이 죽은 아내를 장사하겠다는데 자기 묘지를 아낄 사람이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없습니다.
창 23:6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묻힐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에 만일 제가 어머니 곁을 떠나면 여호와께서 저에게 무서운 벌을 내리시기 원합니다."
룻 1:17
57날이 저물었을 때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이 찾아왔는데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58그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자 빌라도는 내어주라고 명령하였다.
59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모시 천으로 싸서
60바위를 쪼아 내어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입구를 막아 놓고 갔다.
마 27:57-60
13-14이때 이스라엘 땅에 있던 모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왔다. 이것은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파면하여 여호와의 제사장 일을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15또 여로보암은 자기가 만든 숫염소와 송아지 우상에게 제사하고 산당에서 섬길 제사장들을 제멋대로 임명하였다.
16이스라엘 모든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심으로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자유로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레위 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으며
17이것은 유다의 국력 신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마찬가지로 르호보암왕을 섬기며 3년 동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냈다.
대하 11: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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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사람들이..여호와의
말씀을 어긴..안장을 지우라..
본즉..시체를..아니하였더라..
실어가지고..장사하되..나의
형제여..내 뼈를..곁에..말한..
반드시 이룰..여로보암이..
악한..돌이키지x..죄가..멸망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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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속성:
명령하시는, 초자연적 역사를
일으키시는, 말씀을 성취의,
징계, 권능, 심판의, 경고/교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외/경의, 확신, 의지, 사죄,
봉사, 존경,
🔵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간 노 선지자와 여전히
하나님의 경고를 보고서도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은
여로보암의 일화를 통해
진심을 다한 회개,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 마지막 길은
멸망에 이르는 두려운
하나님의 징벌의 손길을
보게 된다.🩸✝️
🌱🌿🌳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깨달아 회개를 미루지 않고 즉시로 순종할 수 있도록 주님의 지혜와 도우심이 항상 함께 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QppjVXpbbA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영에 속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것저것을 믿어야 한다”라고 요구하면서 당신에게 다가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으라고 요청을 받지 않고 성경이 계시하는 주님을 믿도록 요청받습니다.(요 5:39-40)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견해가 아니라 양심의 자유함을 제시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자유함을 누린다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자유함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자유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통치를 깨달음으로 인한 자유함입니다.
언제나 당신의 삶을 예수님의 기준으로 평가하십시오. 다른 멍에는 지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멍에만을 메십시오. 다른 사람의 목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라고 하신 멍에 외에 다른 멍에를 지우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하십시오. 우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을 보면 무조건 틀렸다고 하는 그러한 습성에서 벗어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악한 습성에서 끄집어내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러한 자세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 자유함은 우리의 양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자유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옳은 것을 행하도록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오래 참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인내와 온유로 당신을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희석하지 마십시오. 진리는 진리로 서게 하고 절대로 진리를 위하여 변론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고 하셨지(마 28:19) “사람들로 네 사상과 의견에 따르도록 하여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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