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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4 : 1~20🍑하나님을 등 뒤로 버리면 두려운 미래를 맞습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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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4:1.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그 때에 -
'그 때에'는 13장 말미의 '여로보암의 범죄 행위'(13:33,34)와 본장의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든 것'을 서로 연관시키는 말이다(Hammaond). 특히 '때'(*,에트)라는 단어는 퍽 광범위한 용법을 지니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어떤 특유한 시점을 각별히 지적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때에'는 여로보암이 범죄 행위를 계속하던 당시를 애써 지적하는 말이다. 즉 이 말을 중심으로 전후 문맥을 살펴 보면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이 난 것은 여로보암의 소행 탓이라는 해석이 은연 중 역력하다.
아비야 -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라' 이다. 일명 아비얌(Abijam)이라고도 하는 유다왕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Abijah, 31절; 대하 11:22)와 혼돈되기 쉬우나 실상은 동명 이인(同名異人)이다. 성경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였다는 사실 외에(13절) 달리 알려진 행적이 없다.
병든지라 -
'병든지라'에 해당하는 '할라'(*)는 '약해지다', '슬픔에 젖다'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병이 들면 육체적으로 약해질 뿐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슬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동사의 외연(外延)에는 병든 심신의 모든 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본절에서 이 동사는 병자 아비야 자신 뿐 아니라 여로보암 가문 전체의 근심과 슬픔까지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Matthew Henry'sCommentary, Vol.II, P. 650).
2. 여로보암이 그 아내에게 이르되 청컨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으로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저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고한 사람이니라
그 아내에게 이르되... -
이로 보아 아들의 병이 여로보암에게 큰 근심거리였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의 해결을 위해 여로보암과 아내가 직접 나서야 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에게 아들의 운명을 묻는 일을 정작 자신이 수행하지 않고 대신 아내에게 떠맡기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읽을 수 있다. (1) 일단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 능력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아히야가 자신의 왕 될 것을 예견했던 바(11:29-40) 있기 때문이다(J.B Payne, Matthew Henry, Lange). (2)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신이 직접 아히야와 대면하기를 꺼렸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히야가 권고한 순종의 길(11:37,38)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R.D. Patterson ,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3) 따라서 그러한 거리낌이 자신의 아내에게도 여로보암의 아내라는 사실을 감추도록 요구하게 했다. (4) 때문에 결국 여로보암의 아내는 평범한 아낙네로 변장하여 아히야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4,5절).
실로 -
'실로'(*)는 벤엘 북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읍이다. 이곳은 여호수아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 동안 법궤와 성막이 머무른 바 있는 종교 중심지이다(삼상 4:3,4). 그런데 이곳은 목초와 물은 많아도 적을 방어하기에는 좋지 않은 지형이라고 한다(Reed). 여로보암이 실로를 제쳐 두고 벧엘을 종교 중심지로 삼은 것은 이러한 군사적 측면도 계산 되었으리라고 본다(12:29 주석 참조). 한편 17절은 당시 여로보암의 집이 '디르사'(Tirzah)에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런데 디르사에서 실로까지는 48km 이상의 거리이다. 따라서 여로보암의 아내는 제법 먼 거리를 여행해야 했던 셈이다.
3. 그대의 손에 떡 열과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 저가 그대에게 이 아이의 어떻게 될 것을 알게 하리라
떡 열과 과자와 꿀 한 병 -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적 일을 하는 사람에게 예물을 주는 것이 상례(常例)였다(13:7; 창 18:4; 19:2; 43:24; 삼상 9:7,8). 그런데 본절에서 여로보암이 지시한 예물의 양은 속임수를 쓰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Lange,Hammond, Keil). 왜냐하면 떡 열과 과자와 꿀 한 병은 평민이 보통 선사할수 있는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이다. 즉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내의 신분을 왕비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 나타내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2절과 본절은 여로보암의 용의 주도한 면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그의 치밀한 머리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즉 그는 자신의 책략에만 눈이 어두워 하늘에서 세상 모든 거민을 하감(下瞰)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동자(시 33:13,14)를 미처 인식치 못했던 것이다(5,6절).
4.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
눈이 어두워 -
여러 학자들은 이를 노령으로 인해 안구(眼球)가 고정되면서 생기는 시력 장애로 풀이한다(B hr, Keil 등). 왜냐하면 '눈이 어두워'(*, 카무 에이나요)의 문자적인 뜻은 '눈이 멈추다'이기 때문이다.
5.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 아들이 병듦을 인하여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리이리 대답하라 저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체 함이니라
너는 이리이리 대답하라 -
여로보암의 계략(2,3절)은 눈먼 아히야를 충분히 속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여로보암의 기만책은 물론 여로보암 집안의 장래(6-16절), 그리고 대답의 방식까지도 일러주는 상세한 것이었다. 사실 건강하고 용의 주도한 인물인 여로보암과 늙고 눈까지 먼 인물인 아히야가 벌인 게임의 승부는 뻔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약자의 편에 하나님께서 가세하시므로 얘기는 달라진다. 즉 여로보암이 아히야의 어두워진 눈은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곧 우수한 인간적 재능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만이 내세워질 때는 오히려 큰 올무로 작용하기도 한다. 반면에 비록 여러 면에서 인간적 결점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려는 자는,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으 부끄럽게 하시는' 당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귀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다(고전 1:27).
6. 저가 문으로 들어올 때에 아히야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처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체 하느뇨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로 네게 고하리니
어찌하여 -
'어찌하여'(*, 라마 제)는 물론 몰라서 묻는 의문이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할 때 '왜 이렇게'에 해당하는 냉소적 어감을 지닌 말이다(사 1:11; 암 5:18). 그러므로 이 말은 마치 세상의 군왕들이 떠들썩하게 나서서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정작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냉소와 비웃음을 흘리시는 광경을 연상케 해준다(시 2:1-4).
다른 사람이 체 하느뇨 -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가 못알아 보도록 의도하였다(2절). 그러면서도 여로보암은 앞일을 내다보는 아히야의 능력만은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곧 일종의 점술가를 대하는 태도에 해당한다. 즉 여로보암은 자신을 감춤으로써 아히야와 인격적 관계 맺기를 거부하면서도 기복(祇福)의 도구로 하나님의 사람인 아히야를 이용하려 든 것이다(Keil & DelitzschCommentary, Vol.II, p.210). 그런데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파악하지 않고 하나의 도구적 사물로 인식하는 왜곡된 형태이다. 그러기에 신약에 이르러는 심지어 돈으로 물건을 사듯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입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인물도 등장한다(행 8:9-24). 한편 이처럼 아내를 변장시켜 선지자를 만나게한 여로보암의 모습은 과거 스스로 변장한 채 신접한 여인을 만난 사울과 비교된다(삼상 28:8-19). 더군다나 이들 모두 심판의 예언을 선고 받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흉한 일 -
'흉한'에 해당하는 '카쉐'(*)는 '엄격하다', '가혹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본문에서 이는 여로보암 가문의 멸절을 선언하는 심판의 가혹함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10,11절).
고(告)하리니 -
여기서 '고하다'(*, 솰루흐)라는 말은 본래 '보내다'(send)는 뜻이다. 이는 곧 선지자들의 메시지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임을 일깨워 준다(사 9:8; 슥 7:12). 한편 이제 아히야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메시지를 다시금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전한다. 그러기에 이 메시지, 즉 심판의 예언은 훗날 반드시 성취되고 말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로서 가능하는 아히야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선지자의 고유한 권한과 한계를 볼 수 있다.
7. 가서 여로보암에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
이러한 표현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의 관계가 불가분리의 각별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본절의 행간에 감추어진 아히야의 심정은 여로보암이 '그러한 각별한 관계를 파기한'데 대한 상처와 분노이다. 한편 본문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조되는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9절의 '다른 신'이다.
주권자가 되게 하고 -
'되게 하고'는 원래 '위임하다'는 뜻의 '나탄'(*)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주권자가 된다는 것은 전횡자(專橫者)가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백성의 주권자는 어디까지나 우주의 참된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위임받은 백성을 겸손히 다스려야 하는 제한된 봉사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여로보암은 저들을 우상 숭배 죄악으로 몰고 간 것이다(12:25-33).
8.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찢어 내어 -
여기서 이 말은 한 왕조에서 왕조의 일부를 분리해 냄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이다(11:30; 삼상 15:28). 한편 성경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인 '옷을 찢는다'함은 비통함과 회개의 표시이기도 하다(창 37:29; 민 14:6; 수 7:6; 호 13:8). 따라서 나라가 찢어졌다는 것은 비통한 현실이기도 하거니와 나라 전체에 회개를 촉구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다윗...같지 아니하고 -
본문은 마치 여로보암의 소행을 놓고 판결을 내리는 법정의 장면과도 같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경쟁 왕조의 다윗인 점이 흥미롭다. 즉 아히야는 이전의 예언에서 여로보암에게 다윗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이미 충고한 바 있거니와(11:38), 여기서는 다윗에 견주어 그를 책망하고 있다. 하지만 여로보암에게 있어서 다윗은 적대(敵對) 가문의 전왕(前王)으로서 증오의 대상이었을지언정 따라야 할 모본(模本)은 아니었다. 한편 본서에서 다윗은 여로보암 뿐만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들의 모본이 될만한 신앙 인물로 제시되고 있는(15:3,11) 반면, 여로보암은 우상 숭배의 대표적 인물로서 언급되고 있다(15:34; 16:26,30).
9.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
여기서 '이전 사람들'이란 말이 지시하는 범위 및 이해 방식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가능하다. (1) 이전의 왕들, 즉 사울, 다윗, 솔로몬과 같은 선왕(先王)들을 지칭하는 걸로 볼 수있다(Living Bible). 그러나 이 경우 비교 대상의 범위가 작으므로 여로보암의 악을 강조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느낌이있다. (2) 이전의 사사(士師)들까지 포함해서 지칭하는 걸로 볼 수 있다(Hammond).그러나 이는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3) 다만 여로보암의 극악 무도함을 표현하는 수사적 관용 어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의 세 견해 중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는 우상 숭배에 빠진 바 있는 선대(先代)의 인물이 결코 여로보암보다는 악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시사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실 과거 솔로몬 같은 성군(聖君)도 한때 혼미하여 우상 숭배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여로보암처럼 체계적이고 정책적으로 우상 숭배를 전국에 확산시키지는 않았었다(11:1-8).
너를 위하여 -
비록 여로보암이 자신의 종교 정책을 전통적 신앙으로의 복귀로 홍보했을지라도 본심은 참된 신앙적 동기에 있지 않았다(12:25-33). 즉 여로보암은 단지 유다와의 체제 경쟁의 맥락에서 자신의 정권 안보를 위해 종교 정책을 펼쳤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본문에서 그러한 여로보암의 불순함을 간단한 한 마디, '너를 위하여'로 통렬히 지적해 내신다. 사실 겉치레와 간판이 무엇이든 '하나님을 위하여' 참동기가 결여된 제사는 불법이다. 그리고 그런 제사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즉 우상을 향한 제사이기 십상이다.
네 등 뒤에 버렸도다 -
이 표현(겔 23:35)은 하나님을 최대한으로 경멸하고 무시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B hr, Keil, Pulpit Commentary). 즉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태도를 가리켜 종종 '눈을 하나님을 향하여 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시 25:15; 119:37; 123:2; 141:8). 그런데 여로보암의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돌렸을 뿐 아니라, 아예 등을 돌려 버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등 뒤에'(*, 아하레 가예카)라는 표현이 갖는 모욕과 경멸의 정도를 짐작할수 있다. 더군다나 여기에 '버리다'(*, 솰라크)라는 말이 추가됨으로서 모욕의 정도는 최대한 중폭된다. 왜냐하면 이 '버리다'는 말은 어떤 것을 무가치한 것처럼 유기(遺棄)해버리는 행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이는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쓰레기만큼도 안여겼다는 말이다.ㅠㅠ
10.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을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찌라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 -
원문의 문자적 표현은 '여로보암에게 속한, 벽에다 오줌누는 자들'이다. 이는 곧 여로보암 가문의 모든 남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
'매인 자나 놓인 자'(*, 웨아주브 아추르)는 관용법적 표현으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21:21; 신 32:36;왕하 9:8). 따라서 이 말은 앞서 '여로보암에 속한 사내'와 동격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매인 자와 놓인 자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견해가 서로 다르다. 즉 이는 곧 (1) 기혼자와 미혼자(Keil), (2) 종과 자유인(Thenius,Gesenius), (3) 연소자와 연장자(Lange)를 가리킨다는 등 각각의 설명이 구구하다.그런데 원문이 주는 뜻에 일차적으로 근접한 풀이는 역시 '종과 자유인'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원문의 '아주브'(*)는 '종에서 풀려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도 본절을 '자유인이든 종이든'으로 옮기고 있다.
거름을 쓸어 버림같이 -
여기서 '거름'(*, 갈랄)은 길에 굴러다니는 똥을 말한다. 원어에 비해 한글의 '거름'은 좀 점잖은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거름'은 더럽긴 해도 쓸모있는 무엇이란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갈랄'은 원래 '구르다'는 뜻의 동사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길에 굴러다니는 것', 즉 '똥'(*, 겔)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은 여로보암 일족의 멸망이 마치 길에 굴러 다니는 똥을 치우듯 혐오를 갖고, 조금치의 미련도 없이 수행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15:28-30).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
본래 원문에는 '말갛게'에 해당하는 부사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쓸어 버리다'는 뜻의 동사 '바아르'(*)가 '없애되 완진히 없애는 '강렬함을 지닌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강렬함을 전하기 위해 '말갛게'가 첨가되어 번역된 것이다. 하기는 누구든 똥을 치우면서 조금이라도 남길 리 만무하다(MatthewHenry).
11.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하셨나니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새가 먹으리니 -
여로보암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노여움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다. 시체가 무덤에 안장(安葬)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것은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큰 수치였다(13:30 주석 참조). 더구나 시신이 야수(野獸)의 밥으로 먹히우는 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최대의 오욕과 불명예라 할 수 있었다(삼상 17:46; 시 79:2; 렘 7:33; 16:4; 34:20; 겔 29:5). 한편 본절에서 야수 대신 개가 언급된 것은 당시 거리에는 주인도 없이 돌아다니며 짐승들의 시체를 뜯는 들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시 59:6,14).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
이처럼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은 마치 어떤 공문서로 하여금 비로소 권위와 효력을 갖게 하는 서명 날인과 같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달라서 식언(食言)함이 없기 때문이다(삼상 15:29).
12.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찌라
너는 일어나...가라 -
본문에서 여로보암의 아내의 역할은 일종의 사자(使者, messenger)이다. 즉 그녀는 처음에 올 때에는 여로보암의 사자였으나(1-4절) 이제 갈때에는 아히야의 사자가 된 셈이다. 이러한 전환에서 의미 변화(意味變化)가 발생한다. 즉 여로보암의 아내는 처음에 아이의 생사 여부를 물으러 왔다. 그러나 이제 돌아갈 때 그녀는 여로보암 가문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6-11절)과 그 증거로서 자신의 아이가 죽게 될 것(12,13절)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여로보암에게 알려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즉 말씀의 전언(傳言)과 징조의 해석이 그녀에게 임무로 부과된 셈이다. 결국 여로보암이 아내를 이용하며 아히야를 속이려던 것이 이제는 거꾸로 아히야가 그녀를 통하여 여로보암을 꾸짖게 된 셈이다.
네 발이...죽을지라 -
여로보암의 병든 아들(1절)은 결국 죽을 운명임이 드러났다. 여로보암이 애초에 아히야에게 묻고자 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다(3절). 그러나 이제 그 아이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이 우연과 구별되는 근거로는 '발이 성에 들어갈때'라는 특정한 시점과 아이의 죽음의 순간이 일치한다는 데 있다. 17절을 보면, '발이 성에 들어갈 때'는'집 문지방에 이를 때'로 보다 상세하게 언급된다. 이러한 요소가 아이의 죽음과 아히야의 예언이 갖는 일치를 오비 이락(烏飛梨落), 즉 우연의 일치로 돌릴 수 없게한다(Keil & Delitzsch).
13. 온 이스라엘이 저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본절은 아이의 죽음을 역설적으로 차라리 행운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이후 여로보암 가문에 밀어 닥칠 심판(10,11,14-16절)을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본절의 구조는 전반부가 아이의 죽음이 갖는 상대적 행복의 요소를, 후반부가 이에 대한 해석을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먼저 전반부에서 아이의 죽음은 (1) 온 백성의 애도를 받을 수 있음과 (2) 묘실에 매장될 수 있음이 지적된다. 따라서 아무데나 버려져 짐승의 먹이가 될 다른 가족의 주검에 비하면(11절) 이는 거의 축복에 가까은 죽음이다. 다음으로 본절 후반부는 아이의 이 같은 죽음의 이유를 '저가 하나님을 향해 선한 뜻을 품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아무튼 본장에서 우리는 아이의 병, 혹은 죽음을 놓고 서로 엇갈린 시각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아이의 병과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여로보암에게는 불행과 슬픔으로 비쳤다(1,2 주석 참조). 그러나 선지자 아히야가 보기에는 그것은 차라리 행복이었던 것이다(잠20:24; 사 55:8,9; 롬 11:33).
저가...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
11절 예언의 예외로서 오직 아비야만이 온 백성의 애도를 받으며 묘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한 구절이다. 즉 여기서 '선한'(*, 토브)은 어떤 사람의 욕망이나 의지의 방향을 나타내준다. 다시 말해 여로보암의 아들이 가진 의지는 '하나님을 향해' 선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유대교 랍비 전승에 의하면, 이 아들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백성들을 저지하라는 부친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길에 세운 장애물을 치워 주었다고 한다(B hr,Pulpit Commentary). 아무튼 여로보암의 모든 권속들에게 닥쳤던 참화(15:29)를 겪지않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한 아비야의 경우는 '의인은 화액(禍厄) 전에 취하여 감을 입는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사 57:1).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위에 한 왕을 일으키신즉 저가 그 날에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리리라 어느 때냐 곧 이제라
그 날에 -
'그 날에'(*, 제하욤)는 문자적으로는 '이 날'(this day)이다. 그런데 이 말은 평면선상의 어느 시간으로서 이 날 혹은 저 날을 일컫는게 아니다. 오히려 이는 희랍어의 '카이로스'(*)처럼 '결정적인 순간'(decisivemoment)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자연 발생적이 아닌, 돌발적 박진감으로 들이닥치는 결정적인 시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는 '마침내 때가 이르면 바로 날에'와 같은 어감을 지닌 말이다.
어느 때냐 곧 이제라 -
본절에서 이 부분이 주는 당혹감은 다음과 같은 데서 연유한다. 문맥상 '그 날에'가 하나님께서 한 왕을 일으키시는 날과 일치함은 분명하다. 임박하는 날은 좌우간 미래의 어느 때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심판의 때가 '바로 지금'(even now!)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 이것은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말은 거의 종말론적 언어이다. 즉 너무나 확실한 결정이여서 이미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되고 있는 중 혹은 되어질 것으로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에 해당하는 '앗타'(*)는 '막', '방금'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이제부터'(ModernLanguage, from now on; RSV, henceforth)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 113:2; 사48:6). 그러므로 본절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Hammond).
1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 같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그 열조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뽑아 저희를 하수 밖으로 흩으시리니 저희가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여호와를 진노케 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을 쳐서 -
이제 여로보암 가문의 파멸 예언(14절)은 슬그머니 그 대상을 북왕국 전체로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전이(轉移)의 예는 9:5-9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왕과 백성이 함께 심판 받음은 저들의 공동 운명적 유대 관계를 암시한다. 즉 백성들도 여로보암의 정책을 묵묵히 따르므로서(12:30) 결국 그에게 동조한 셈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백성들이 동조한 우상 숭배는 여로보암 사후에도 계속되어 북왕국 역사 전체을 질곡(桎梏)에 빠뜨리게 된다. 그러고 보면 북왕국의 우상 숭배는 왕과 백성의 상호작용에 힘입어 만연하게 된 셈이다.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 -
'갈대'에 해당하는 '카네흐'(*)는 '가지', '줄기'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는 이차적으로 파생되어 나온 뜻이다(창 41:5; 출 25:34;겔 42:16). 본래 '갈대'의 일차적인 뜻은 기본적으로 '연약함'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이 의지할 수 없는 '상한 갈대'로 비유되기도 한다(왕하 18:21; 사 42:3; 겔 29:6,7 등). 이상을 참고할 때, '물에 흔들리는 갈대'는 강대국에 시달리는 약소국의 처지릍 빗대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뽑아 -
이에 해당하는 '나타쉬'(*)는 뿌리채 뽑는 것, 즉 근절(根絶)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 5:14 에 의하면 '뽑혀야할 것'은 아세라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작 아세라상을 뿌리 뽑지 않았다. 그래서 거꾸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뿌리 뽑히게 된 것이다(신 11:16,17).
하수 밖으로 흩으시리니 -
하수는 큰 강 유프라테스를 말하는 바(창 31:21; 삼하10:16), 본절의 예언은 이스라엘 멸망 후 앗시리아로 끌려갈 사건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왕하 17:16; 18:11에 기록 되었듯이 B.C. 722년에 성취되고 말았다.
흩으시리니 -
이에 해당하는 '자라'(*)는 본래 '키질하다', '까부르다'는 뜻이다. 즉 이는 곡식을 키실하여 찌꺼기를 바람에 날림으로써 깨끗케 하는 동작을 가리킨다. 따라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응징, 정화(淨化)의 의미로 쓰인다(레26:34; 렘 15:7; 49:32; 슥 1:19). 즉 이 말은 파괴적 응징로만 그치지 않고 정화라는 긍정적 측면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 동사이다.
아세라 -
아세라(Asherah)는 페니키아와 가나안의 풍요의 여신이다. 그런데 이 여신에 관한 난제는 아스다롯 및 바알과의 관계 문제이다. 비교적 초기에는 많은 학자들이 아세라와 아스다롯(Ashtaroth)을 동일시해 왔다. 그러나 후대의 연구 결과 및 발굴과 함께 아세라는 아스다롯과 구별되는 또 다른 여신임이 드러났다(Reed). 어쨌든 아세라는 분열 왕국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주요적으로 등장한다. 엘리야가 활동할 무렵,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는 아세라의 선지자는 무려 400명이 었다(18:19). 또 아세라 숭배는 남왕국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아세라 숭배를 근절시키는게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왕하 23:4-14).
16.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저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여로보암의 죄로...범죄케 하였음이니라 -
본절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전반부에는 일견 납득하기 어려운 진술이 등장한다. 즉 여로보암 일개인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버림받은 것처럼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이스라엘은 공시적(共時的)-통시적(通時的) 개념이다. 즉 이는 여로보암 당대의 북왕국만을 지칭하는게 아니라 이후의 북왕국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말이다. 그런데 후반부는 전반부의 불합리한, 혹은 비약적인 전후 관계에 비교적 합리적인 설명을 보태고 있다. 즉 여로보암은 자신이 타락하면서 결국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오염시킨 인자(因子)가 되었다는 것이다(13:33). 이는 곧 여로보암을 기점으로 해서 왕국의 전체를 통시적으로 꿰뚫는 본서기자의 거시적(巨視的) 안목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17. 여로보암의 처가 일어나 디르사로 돌아가서 집 문지방에 이를 때에 아이가 죽은지라
디르사 -
이로 보아 여로보암은 그의 치세 초기에 수도를 세겜(12:25)에서 디르사로 천도(遷都)한 것 같다. 한편 디르사(Tirzah)는 세겜 북동쪽 11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루사(Telluzah) 또는 텔 엘파라(Tell el-Farah)라고도 불리우는 곳이다. 이지역은 수리아등의 북방 지역에 대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니 아마도 여로보암은 군사적 이유로 인해 이곳으로 천도 했으리라고 추측된다(Reed).
집 문지방에 이를때에 -
여기서 '집'(*, 하바이트, the house)이라는 표현은 12절의 '성'(*, 하이라, the city)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정밀하게 정확한 순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이는 '성내에서도 왕의 집 곧 궁전의 문지방'하는 식으로 보다 자세한 표현인 것이다.
18. 온 이스라엘이 저를 장사하고 저를 위하여 슬퍼하니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 아히야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온 이스라엘이...슬퍼하니 -
이처럼 온 백성이 이 왕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장례를 치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관찰할 수 있다. (1) 국장(國葬)이 치루어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왕자는 다음번 왕위에 오를 후계자였던 것 같다(B hr, 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2) 여기서 '슬퍼하다'(*, 사파드)라는 말은 '가슴을 치다', '통곡하다'는 뜻으로 특히 사람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가슴을 치고 크게 소리내어 우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왕자는 지금까지 백성의 촉망을 받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성의 이러한 기대는 그가 경건한 인물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13절). 왜냐하면 왕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곧 백성에 대해서도 무도(無道)하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2:7).
19. 여로보암의 그 남은 행적 곧 저가 어떻게 싸운 것과 어떻게 다스린 것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남은 행적(行蹟) -
여기서 '행적'(*, 디베르)은 '말하다'에서 유래된 명사이다. 이 단어는 보고(report) 혹은 기록되어진 행동을 의미한다(대상 29:29). 따라서 이는 여로보암 재위시의 활동이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열왕기 기록자에게 있어서는 여로보암의 여타 업적과 활동은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모조리 무시되었다. 즉 본서에서 여로보암은 단지 북왕국 우상 숭배의 원인자로서만 고발되었을 따름이다(16절).
역대 지략 -
이 책은 왕실의 여러 가지 기록을 참고해서 편찬한 국정일지(國政日誌)이다. 이는 구약 성경 중 한 권인 역대기(歷代記)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한편 이 일지를 계속 기록해 나가는 것은 왕실 서기관들의 주된 임무 중 하나였다(Kraft). 아무튼 '역대 지략'에 해당하는 '데베레 하야밈'(*)은 '매일의 말(기록)들'이란 뜻으로 이 일지의 특성을 잘 나타내 준다(Pulpit Commentary). 본서 기자는 북왕국 왕들에 관해 기록할 때 이 일지를 참고하였다(15:31; 16:5,14,20,27;22:39; 왕하 1:18; 10:34; 13:8,12; 14:15,28; 15:11,15,21,26,31). 그런데 남왕국에도 이와 비슷한 역대 지략이 있었다(14:29; 15:7 등).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서론, '7. 열왕기서의 자료'를 참조하라.
20. 여로보암이 왕이 된지 이십이년이라 저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아들 나답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이 된 지 이십 이 년 -
대개의 학자들은 여로보암이 왕위에 추대된 해(12:16-20)를 B.C. 930년경으로 본다. 그렇다면 본절이 가리키는 때는 B.C. 910년경인 셈이다. 본서 서론, '12. 열왕기서의 참조 도표' 참조.
그 열조와 함께 자매 -
아히야의 불길한 예언(10,11,14-16절)에 비하면 열왕기의 간략한 기록은 마치 여로보암이 평온한 임종을 맞은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역대기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유다 왕 아비야에게 벧엘마저 빼앗기는 패전의 수모를 겪은 후 죽었다. 그리고 역대기는 그 사실을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대하 13:13-20).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여로보암이 패전의 여파로 얻은 지병 때문에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B hr, Matthew Henry).
성경 말씀:
37이제 나는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 네가 원하는 대로 다스리게 하겠다.
38만일 네가 나에게 철저하게 순종하고 내 뜻대로 살며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행하고 내 종 다윗처럼 나의 모든 명령을 지키면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하여 내가 다윗에게 했던 것처럼 너를 축복하고 네 자손이 계속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겠다.
왕상 11:37,38
삼상 4:3,4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살펴 전인류를 보시며
14그의 처소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살피신다.
시 33:13,14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과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고전 1:27
시 2: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곧 야곱의 후손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셨다.
사 9:8
그 마음을 돌처럼 굳게 하여 내가 옛날의 예언자들을 통해 내 영으로 전한 율법과 말을 듣지 않으므로 내가 대단히 화가 났었다.
슥 7:12
15:3,11
29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거나 마음이 변하는 일이 없소. 그는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오."
삼상 15:29
🟠🔴
🟢
아비야가 병든지라..아히야..
손에..어두워..대답하라..
명령을..여호와의 말씀이..
지켜..버렸도다..재앙을..
끊어..말하였음이니라..
죽을찌라..향하여 선한..
일으키신즉..만들어..
진노케..범죄케..슬퍼하니..
역대지략에..
🟣
하나님의 성품/속성:
선하신, 아버지, 예언,
전능하신, 권고, 하감하고
계시는, 위로, 용기, 도움,
뜻, 심판의, 말씀, 주권자,
권위, 평안/평온, 정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뢰, 순종/순복, 주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봉사, 회개,
성실히 섬기는, 의지,
하나님을 향해 선하고자,
여호와 신앙, 경건,
🔵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라
하나님의 눈
약한 자를 택하사 귀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도구로 쓰임받는..!
하나님 앞에 눈이 멀어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점검해야 겠다.🩸✝️
🌱🌿🌳
하나님을 향해 선한 뜻을 품었던 아비야의 짧은 일생이 아쉽다.
인품이 훌륭한 사람들의 수명이 짧은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아마 악한 영이 계속 괴롭히다 보니 그런 것 같다. 40일 금식기도 하시고 하늘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어떤 목사님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목사님의 아드님이 목사님이 되셔서 세워진 교회가 많이 부흥했다. 지금은 짧은 인생들의 모습들이 아쉬워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다 할지라도 끝내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주님을 신뢰하며 회개할 부분들은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축복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aaKrquxAN0
영원한 집(Building For Eternity)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 14:28)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용이란 우리가 치를 비용이 아니라 주님이 치르실 비용을 의미합니다. 그 비용은 나사렛에서의 30년 생활이며, 3년간의 공생애 기간에 받으신 비방과 미움이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겪으신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이요 그리고 마침내 갈보리에서 십자가의 처형입니다. 갈보리는 모든 시간과 영원이 접목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비용을 계산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결국 주님을 향하여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라고 말하면서 비웃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눅 14:30)
우리 주님께서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말씀하신 것이 26, 27, 33절인데 그 의미는 주께서 주의 위대한 나라를 세우는 데 사용할 사람들은 주께서 이미 그들을 위하여 모든 비용을 다 지불하여 놓으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또한 이 구절이 가르치는 바는 우리 주님께서 주님의 나라에 사용하실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다른 그 어떠한 것보다 오직 주님을 인격적으로, 열정적으로, 헌신적으로 훨씬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의 조건은 엄하지만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여 세운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점검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시험하는 불로 당신의 공력을 점검할 때 혹시 주님의 기초 위에 당신 자신의 나라를 세운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겠지요?(고전 3:10-15) 보통 자기 자신의 기업을 세우려는 때는 대규모의 놀라운 사업들을 이루는 때이며, 이때 주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지만 사실 함정이 있습니다. 심오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먼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위대한 건축가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나라를 준공하기 위하여 우리를 취하실 뿐입니다. 온전히 주님의 사업이기에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없습니다.
https://m.cafe.daum.net/mercyreformedchurch/ULF8/1384?listURI=%2Fmercyreformedchurch%2FUL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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