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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4 : 21~31🍑한 세대 만에 잃어버린 부와 영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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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4:21.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사십일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빼신 성 예루살렘에서 십 칠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나이 사십 일 세라 -
르호보암 역시 여로보암과 마찬가지로 세겜 회담의 결렬 이후 왕위에 을랐으니 B.C. 930년이 그의 원념(元年)이다(12:17). 그런데 12장에선 르호보암의 동년배들을 가리켜 '소년'으로 부르고 있다(12:8). 때문에 41세의 장년을 소년이라 부른 모순을 해소하려고 혹자는 본절에 나오는 르호보암의 나이를 '21세'로 수정하려 든다(B hr). 그러나 12장에서의 '소년'이란 말은 문맥상 '노인'들에게 대조되는 자들의 경박함을 강조하려는 냉소적 의미의 단어이다. 12:8 주석 참조. 더구나 르호보암이 21세에 즉위해 17년간 통치하고 죽었다면 37세의 한창 나이에 요절한 셈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21세로 수정하느니보다 41세로 나두는 편이 자연스럽다.
여호와께서...빼신 성 예루살렘 -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중앙 성소로 택정(擇定)된 사실에 대해서는 8:16 주석과 신 12:4-14 강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를 참조하라. 그런데 본절에서 예루살렘이 이처럼 장황하게 소개되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신앙의 중심지가 우상 숭배가 만연한 장소로 변질되었다(22:28절)을 은연중 부각 시키고자 함이다(Keil 등).
십 칠 년을 치리(治理)하니라 -
이에 따르면 르호보암의 재위 기간은 B.C. 930-913년이 된다.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
유다 왕들의 경우에만 모친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열왕기의 특징이다(15:2,10; 22:42). 이는 왕들에게 주는 모친의 영향력이 지대함을 알게 해준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영향력이 혹자의 말처럼 언제나 존경받을 만한 건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B hr). 본절 역시 오히려 불길한 영향력을 느끼게 해준다. 즉 르호보암의 모친 나아마(Naamah)는 솔로몬이 가까이 했던 이방 여인 중 하나로 밀곰(혹은 몰록)을 숭배하던 암몬의 여인이다(11:1-8). 그러므로 르호보암의 우상 숭배 경향은 그 모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Mauchline).
22.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유다가 -
이처럼 본서 기자가 '르호보암이'라 하지 않고 '유다가'로 기록한 점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런데 본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12:1을 보면, 르호보암이 율법을 버리자 백성들이 이를 본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본절의 '유다'는 16절에서의 여로보암과 북왕국 백성 간의 관계와 같은 상호 작용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대하 12:1은 르호보암이 율법을 저버린 이유를 국가의 강성함으로 인한 교만에 둔다.
노를 격발(激發)하였으니 -
'격발 하였으니'는 '질투하다'(*, 카나)에서 온말이다. 즉 이는 '질투를 야기시키다'는 뜻이다(RSV, they provoked him tojealousy). 따라서 본절에는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 간의 특별한 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하겠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신부 대하듯 하시기 때문에(계 19:8; 겔16:8-14) 때로는 그들로 기뻐하시는가 하면 질투하시기도하는 것이다(출 20:5; 사62:5). 이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고 계시는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신약에 더욱 밝히 계시되어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비유되는 것이다(마 25:1 이하; 엡 5:25-33; 계 21:2).
23. 이는 저희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
가나안 족속들은 대개 높은 산, 푸른 나무 아래에 우상 및 우상을 섬기는 처소를 설치하였다(렘 2:20; 3:6; 겔 6:13; 왕하 16:4;17:10; 대하 28:4). 따라서 르호보암이 '산 위에와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각종 우상을 세웠다는 것은 곧 그가 가나안 족속들의 이교(異敎)에 영향받았음을 시사해 주는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 12:2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우상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마체바'(*)는 본래 '기둥'(pillar)이란 뜻이다. 그런데 아마도 여기서는 남신(男神) 바알에게 봉헌된 석상(石像)을 가리키는 듯하다(Hammond).
아세라 목상 -
이는 남신 바알과 함께 한 장소에 나란히 세워진 여신상(女神像) 아세라를 가리킨다. 한편 '아세라'에 대해서는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24.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남색(男色)하는 자 -
'남색하는 자'(*, 카데쉬)는 단순한 동성 연애자를 의미하는게 아니라 이방 신전의 남창(男娼)을 말한다. 이들은 아세라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 소속된 남창들로서 의식(儀式) 중의 매음 행위에 동원되었다(B hr, Jacobsen).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남왕국 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우상 숭배의 만연도 뜻하지만, 아울러 여호와 신앙으로 결집된 이스라엘 공동체 의식이 이미 허물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짐승 같은 성행위는 사악한 이교 제의(異敎祭儀)에 속한 것이고, 그러한 제의가 성행했음은 곧 신정(神政)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출 20:1-17)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북을 막론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신정국가 건립 목표를 잊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 -
곧 가나안 원주민을 가리킨다. 이들의 종교의식이나 생활풍속은 음란하기 이를 데 없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레18:3-25). 하나님께서 이들을 멸절시켜 버리도록 명하신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우상 숭배 및 종교 의식을 파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신 7:2). 그러나 여호수아 정복 후에도 일부 가나안 거민들은 여전히 잔존 세력으로 남아 있었으며(수 11:13;15:63; 16:10), 결국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가증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토에바'(*)는 '몹시 싫어하다', '지독하게 미워하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가나안인들의 우상 숭배나 사악한 습속(習俗)을 얼마나 혐오하셨는지 잘 나타내준다.
25. 르호보암왕 제 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르호보암 왕 제 오 년에 -
즉 B.C. 926년경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무렵 근동에는 심각한 정세 변화가 있었다. 즉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할 만한 강대국의 등장이 없던 시대이다(14:20-25). 그러나 르호보암이 즉위했을 때 남쪽 애굽에는 이미보다 호전적이고 패권주의적인 22대 왕조가 들어서 있었다. 한편 본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12:2에는 '저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란 구절이 삽입되어 유다의 타락과 시삭의 침공 사건 간의 인과(因果)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시삭 -
애굽 22대 왕조를 창시한 리비아 부족의 족장 쉐숑크(Sheshonk)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I. p.215). 11:40 주석 참조. 그는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애굽의 중앙 정부를 위협하다가 마침내 애굽 전역의 통치자로 등극하게된다. 그리고 자신의 통치 기간(B.C. 940-915) 중 강력한 애굽 부흥의 기치를 들고 주변국가들에 대해 패권주의적 정책을 수행해 나간다(Wilson).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도 아마 이러한 정책의 맥락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시삭의 침공이 여로보암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B hr)을 하기도 하는데 근거가 없다. 그 이유는 (1) 여로보암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본서 기자가 본문에서 그일을 빠뜨렸을리 없고, (2) 시삭의 정복 범위는 북왕국 이스라엘도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26절 주석 참조.
26.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또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다 빼앗은지라 -
열왕기의 '기록은 마치 시삭(Shishak)이 예루살렘만을 집중 강타하여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탈취하는 데 주력한 듯 보이게 한다. 그러나 실상 시삭의 침공은 팔레스틴 전역을 휩쓴 것이었다. 그 결과 남북왕국의 성읍이 약 150여개나 정복 당하였다(Wilson). 그렇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핵(核)이므로, 이곳이 약탈당했다는 것은 전체 이스라엘이 유린된 거나 다름없다. 즉 성전, 왕궁의 보물, 솔로몬의 금방패 등은 이스라엘 황금기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였다. 그러로로 이 자랑거리가 약탈당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번영기가 완전히 끝났음을 시사해 준다.
27. 르호보암왕이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장관의 손에 맡기매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
이 놋방패는 물론 금방패의 대용(代用)이다. 그런데 어쩌면 시시콜콜해 보이는 이 변화가 곧 한 시대에서 다른 한 시대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즉 금방패로 대표되는 황금기의 종식과 놋방패로 대표되는 쇠퇴기의 시작이 넌지시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Dentan, Matthew Henry's Commentary,Vol.II, p.655).
28.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갔더라
본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관찰된다. (1) 시삭의 침공 후에도 어쨌든 르호보암은 계속 왕노룻 할 수 있었다. (2) 성전의 제사도 계속되었다. (3) 쇠락한 느낌을 지을 수 없지만 왕의 행차에 위엄을 갖추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나. 이상의 요소들이 강조하는 바는 '다 멸절되지 않고 남은 것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곧장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주셨던 약속을 상기시켜 준다. 그것은 곧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해 다윗 왕조를 존속시켜 주겠다는 은총의 약속이다(11:13,32,36).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12,13 주석을 참조하라.
29. 르호보암의 남은 사적과 무릇 그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르호보암의 남은 사적 -
'사적'(*, 디베르)은 19절의 '행적'과 같은 말이다. 한편 역대기는 르호보암이 행했던 건축 사업이라든지 각처에서 남하해 온 제사장들을 받아들인 일 등 따위를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대하 11:5-23; 12:1-8). 그러나 열왕기는 르호보암에 대한 본질적 해석의 줄기만 남긴 채 가지치기를 하였다. 즉 르호보암 역시 남왕국 우상 숭배에 대해 책임이 있는 부정적인 왕으로 발췌, 서술한 것이다(21-24절).
유다왕 역대 지략 -
이 책은 북왕국의 역대 지략(19절)과 마찬가지로 왕실 서기관이 편찬한 남왕국의 국정 일지이다. 열왕기 기록자는 남북 왕조의 왕실 일지를 모두 참조 자료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절 주석 참조.
30.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르호보암과...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
왕국 분열 초기의 남북 전쟁 위험은 스마야 선지자의 제지로 일보 직전에 가라앉았다(12:21-23). 그러나 본절은 그 후 남북간의 분쟁이 항상 있어왔다고 서술한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남북간에 적대감이 있었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려 들기도 한다(Keil). 그러나 '전쟁'에 해당하는 원어 '밀하마'(*)는 언제나 구체적 전투를 의미할 뿐, 심리적 적대감을 가리킨 용례(用例)는 없다(창 14:2; 민 31:21; 대상 19:14 등). 그러므로 본절 표현대로 지속적인 국지적(局地的) 전투가 남북간에 있어왔던 걸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 적어도 본절에서 남북간의 분쟁은 양 국가간의 대립이라기보다 한 국가 안에 존재했던 두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성격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무난할 것 같다. 왜냐하면 원래 다윗 왕조의 창립은 느슨한 지파 동맹의 비효율성을 지양하여 탄생한 일종의 부족 연맹 국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 당시에는 비교적 우세한 부족이 타부족들을 통합하여 다스렸다. 그런데 그 후 솔로몬의 통치는 그러한 부족 연맹 국가에서 보다 공고한 중앙 집권적 왕정 국가에로의 발돋음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기에 솔로몬의 제도정비는 각 지파의 자체 결집력을 효과적으로 해체하고 왕권 중심으로 흡수하려는 노력의 흔적을 보였다(4:1-19). 그러나 솔로몬 통치 말기는 솔로몬 체제가 내적 갈등을 흡수하는 데 실패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르호보암 왕권에 반발한 여로보암과 북부 열지파는 바로 이 체제에서 이탈한 세력일 뿐이다(12장). 그러므로 남북간의 분쟁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체제간의 경쟁 맥락을 띨 뿐 전혀 이질적인 두 국체(國體)간의 대립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하튼 하나의 신앙에 바탕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처럼 둘로 나뉘어 강대국의 유린을 당하는 시점에서도 늘상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31. 르호보암이 그 열조와 함께 자니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그 아들 아비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다윗 성 -
다윗이 여부스족에게서 빼앗아 왕궁으로 삼았던 시온 성(삼하 5:7)을 가리킨다. 2:10 주석 참조.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
르호보암의 모친의 이름이 그 출생지와 더불어 재차 언급되었다(21절). 이처럼 언급이 반복된 이유로서 다음 세가지가 추측된다. (1) 르호보암이 우상 숭배자로 타락함에 있어서 이 암몬 여인의 영향이 컸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그녀는 유다 땅에 암몬의 가증한 우상 '몰록'을 성행시킨 장본인이었을 것이다(23절; 11:7). (2) 솔로몬의 실책이 그 아들에게 미친 악영향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신 28:28). (3) 전 백성들에게 여인의 어그러진 처신에 대해 경계시키기 위함이다. 현숙한 아내와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여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한 여인이 남편과 자녀는 물론 나아가서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 또한 엄청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특히 이방 여인과의 통혼을 금하셨다(신 7:3).
아비얌 -
이 이름의 철자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아비야' 또는 '아비야후'). 1절 주석 참조.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는 뜻의 '아비야'(*)란 이름(대하 12:16; 13:1,21)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피력한다. (1) 아비야는 즉위명이고 아비얌은 본명이라는 견해, (2) 아비얌은 아비야끝에 암(am)을 덧붙인 애칭이라는 견해, (3) 철자의 혼동(즉 *, 와 사이의 )으로 인해 생겨난 이름들이라는 견해, (4) 아비얌은 아비야에 '얌'(*)이라는 가나안의 바다신 명칭을 첨가한 것이라는 견해(MacLean)등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상의 제 견해들 중에서 철자의 혼돈이 정확한 설명일 것으로 본다(Hammond 등). 한편 르호보암은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이 있었지만 그중 마아가(Maacah)를 가장 총애하였다. 그래서 마아가의 소생 아비얌을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목해 놓았다(대하 11:21,22).
성경 말씀: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8
8. 그때 내가 지나가다가 네가 사랑을 속삭일 때가 된 것을 보고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네 벗은 몸을 가리고 너를 사랑할 것을 약속하며 너와 혼인 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네가 나의 것이 되었다.
9. 내가 물을 가져다가 네 피를 씻어내고 너에게 기름을 바르며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가죽신을 신기며 고운 모시로 너를 싸고 명주로 덮어 주었다.
11. 또 내가 보석으로 너를 꾸미고 팔찌를 끼우며 목걸이를 달아 주고
12. 코고리를 끼우며 귀고리를 달아 주고 아름다운 면류관을 네 머리에 씌웠다.
13. 이처럼 네가 금과 은으로 장식하며 고운 모시와 명주와 수놓은 옷을 입고 또 고운 밀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고 아주 아름다워져서 여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4. 너의 아름다움으로 너의 명성이 온 세계에 퍼졌으니 이것은 내가 너에게 준 화려함이 네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다.
겔 16:8-14
그것에 절하거나 그것을 섬기지 말아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내가 나를 미워하는 자를 벌하고 그의 죄에 대하여 그 자손 삼사 대까지 저주를 내리겠다.
출 20:5
젊은 남자가 처녀와 결혼하듯이 너를 세운 자가 너와 결혼할 것이며 신랑이 신부를 보고 기뻐하듯 네 하나님이 너를 보고 기뻐하실 것이다.
사 62:5
그때 하늘 나라는 마치 저마다 등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을 것이다.
마 25:1 이하
25.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게 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27. 얼룩이나 주름이나 그 밖의 결점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 앞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양육하고 보살피듯이 모두 자기 몸을 양육하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31. 그래서 성경에는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두 사람이 한몸이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32.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33. 그러므로 여러분도 각자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십시오.
엡 5:25-33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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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속성:
강성, 질투하시는,
소중히 여기시는,
뜻, 통치자, 약속,
은총, 성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경, 신정국가, 제사,
100%의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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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자랑거리로 삼자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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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절에 하나님이 노를 격발하셨다는 말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말씀에서 일탈한 주의 자녀들을 다시 바로 세우시려고 허락하시는 징계를 사랑으로 징계하신다고 여겨서 감사함으로 광야의 시간을 순종의 기간으로 보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버스에서 묵상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p_KXNRv0HFY
하지만 여기~챔버스 목사님의 멋진 설교묵상글이 어마어마하죵!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요한 계시록 3:10)
인내(patience)란 지구력(endurance)보다 더 강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명궁 수(활 쏘는 자)의 손에 있는 활과 화살처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볼 수 없는 목표를 향하여 조준하십니다. 그리고 활을 당기십니다. 이때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시고 과녁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활을 당기십니다. 그리고 활을 쏘십니다. 지금 인내해야 하는 상황입니까? 주님의 손에 당신을 맡기십시오. 믿음의 인내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지하십시오. 욥처럼 말하십시오. “주께서 나를 죽이신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주를 기다리이다.”(욥 13:15)
믿음은 연약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하나님은 거룩한 사랑이시라는 사실 위에 세워진 힘차고 담대한 확신입니다. 비록 당신이 지금 그분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분이 무엇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어도 그러나 당신은 주님을 압니다. 믿음의 파선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사랑이시라는 영원한 진리를 붙들지 못할 때 찾아옵니다. 믿음이란 당신의 삶의 최상의 노력으로서 하나님만 신뢰하는 가운데 당신 자신을 과감히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거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만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주께 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하나님의 생명에 의하여 접촉되지 않은 영역, 즉 믿음이 역사하지 않은 부분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는 이러한 부분이 없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그러한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일들을 당하여도 조금도 요동함이 없이 견딜 수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취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위대한 로맨스가 될 것이며 언제나 놀라운 일을 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권능의 중심부로 우리를 이끌기 위하여 우리 각자를 훈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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