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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상 15 : 33~16:14🍑죄악에 대한 진노, 반란을 통한 심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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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5: 33. 유다 왕 아사 제 삼년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디르사에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십 사년을 치리하니라
앞서 바아사에 대한 언급이 두 번(16-22,23절) 나왔지만, 그것은 유다 왕 아사의 통치(9-24절) 및 이스라엘 왕 나답의 통치(25-32절)를 서술하던 중간이다. 반면 이제 본절은 정식으로 바아사의 이스라엘 통치를 서술하는 첫 문장이다. 아마도 이는 16장에서 바아사의 행악(行惡)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에 앞서 그 도입부로 바아사의 통치기간 및 통치 성격을 소개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다.
디르사에서 -
디르사(Tirzah)에 관해서는 21절과 14:17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북왕국의 수도가 세겜(Shechem)에서 디르사로 옮겨진 것은 여로보암 때지만, 명시적으로 북왕국의 수도로서 등장하는 것은 본절이 처음이다(21절).
이십 사 년을 치리하니라 -
바아사의 재위 기간은 B.C. 909-886년이다. 그런데 이 기간은 북왕국 북편의 아람 동맹국들이 다메섹의 주도하에 북왕국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던 시기이다. 즉 이들은 지중해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이스라엘과 분쟁을 일으켰다(19-21절). 또한 이때는 유브라데 강 동편에 있는 앗수르가 서서히 강대국으로 힘을 키우고 있던 시대이다. 이러한 북방의 심상치 않은 정세에 대응하고 위한 정책의 일환이 곧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등의 디르사 왕도화(王都化)이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바아사가 24년의 통치 기간 동안 강한 군사력을 키우는 데 치중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바아사가 남침에 힘을 쏟자 아사조차도 위급하여 벤하닷을 매수치 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던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16-22절).
34.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여로보암의...죄 중에 행하였더라 -
바아사에 대한 열왕기의 간명한 평가이다. 신앙 공동체와 그 순수성에 관심하는 열왕기의 관점에서 볼 때 바아사는 단지 왕국 분열과 타락의 골을 깊게 한 인물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가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대로 북방의 성소(제멋대로의)를 유지해 나갔음(12:28-33)은 곧 예배의 단일한 중심지(예루살렘)가 지켜 줄 예배의 순수성을 해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배의 통일성이 지켜 줄 민족적 단일성을 저해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12:4-14 강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를 보다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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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6:1.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가라사대
하나니의 아들 예후-
"예후"란 이름은 "그는 여호와이시다"란 뜻이다. 그런데 본절의 예후(Jehu)는 오므리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북이스라엘의 10대 왕 예후와는 同名異人이다(왕하 9:2). 한편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Hanani) 는 유다 왕 아사의 실책을 경고하다 옥에 갇힌 인물이다(대하 16:7-10). 그리고 그의 아들인 예후는 본장에서처럼 바아사를 책망했을 뿐 아니라 여호사밧 왕을 아합왕과 연합한 일로 책망한 자이다(대하 19:2).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후 부자(父子)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되고도 용맹스러운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바아사를 꾸짖어 가라사대-
유다의 선자자인 예후가 이처럼 이스라엘 왕 바아사(Baasha, 15:28-34)를 책망한 것은 당시 정세(15:32)로 보건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당시 예후의 예언 속에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끝없는 관심과 배려가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 남북 왕국으로 분단되기는 했으나 남유다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의 언약 속에 포함된 백성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남왕국의 선지자 예후를 통해 북왕국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만든 어떠한 인위적 방법이 굳건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렘 3:12).
2.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저희 죄로 나의 노를 격동하였은즉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 되게 하였거늘 -
"진토"는 "회색이 되다"/ "빻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누자적으로는 "티끌", "흙"의 뜻이겠으나 여기서는 사회적으로 "비천한 신분"을 의미한다. 14:7의 여로보암에 대한 언급이 "백성 중에서 들어 주권자가 되게 하고"인 것과 비교하면 이는 훨씬 비하(卑下)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본절은 바아사의 출신 신분이 매우 비천하였음과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상기시켜 준다. 즉 바아사는 왕통을 이은 자도 아니었으며 큰 지파 출신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집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14:14) 왕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이 같은 손길(마 10:29-31)을 발견하였더라면 배은 망덕한 여로보암의 전철을 되풀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H. Austsl).
주권자 -
이에 해당하는 "나기드"는 "어떤 것을 사람 앞에 눈에 띄도록 높이 두다"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즉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탁월한 인물을 가리킨다. 한편 바아사가 비천한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된 것은 물론 그의 용맹이 탁월했기 때문이기도 하나 그 용맹은 궁국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좇아 바아사에게 주신 것이다.
격동하였은즉-
15:30 주석 참조.
3.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쓸어 버려 -
이에 해당하는 "바아르"는 본래 "불태우다", "소멸하다"는 뜻이다. 특히 이는 "불태워 완전히 연소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사악한 자를 징벌하는 하나님의 격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한편 이후에도 선지자들은 반역한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징벌을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예가 있다(사 30:27 ; 렘 7 :20 등).
여로보암의 집같이 되게 하리니 -
앞서 2절이 바아사의 죄를 우상 숭배 곧 하나님께 대한 배은 망덕으로 규정하고 있음에 비해 본절은 이제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징벌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바아사의 가문을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구체적 내용은 다음 4절에서 언급되고 있으니 참조하라.
4.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죽은즉 개가 먹고 -
이는 여로보암 가문을 향한 저주로 사용됐던 말(14:11)과 동일한 문구로써, 비참한 말로는 물론 사후에도 치욕을 면치 못할 바아사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데 바아사가 여로보암이 지은 것과 같은 동일한 죄(14:9)에 빠진 이상(2절) 이처럼 여로보암이 받은 형벌과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됨은 지극히 마땅하다. 한편 이렇듯 엄정하고 단호한 공의의 심판은 오늘날 일시적 탐욕이나 영달에 눈이 어두워 불의와 영합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잠시 오욕의 낙을 누리기 보다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영예로운 고난을 택하는 것이 마땅하다(히 11:25).
5. 바아사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과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바아사의 권세 -
여기서 "권세"는 강력한 왕권(王權)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바아사가 용감하고 전투적인 인물임을 나타내는 단어로 이해하기도 한다(Ewald). 그러나 앞서 유다 왕 아사에게도 같은 단어가 적용되었음을 볼 때 이는 본래대로 통치에 있어서 강력하고 힘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단어로 봄이 타당하다(Keil & Delitzsch).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23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왕 역대 지략-
14:19주석 참조.
6. 바아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디르사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엘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디르사 -
세겜(Shechem, 12:25)에 이어 두 번째로 북이스라엘의 수도(首都)가 된 왕도(王都)이다. 세겜 북동쪽 11km지점에 위치하였는데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14:17 주석 참조.
그 아들 엘라 -
"엘라"는 상수리나무 비슷한 어떤 나무의 명칭이면서(Guthrie, Jr), 또한 과거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계곡의 지명이기도 하다(삼상 17:2, 19). 이곳은 깁브돈 부근의 인접 지역인데 깁브돈은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자신의 왕조를 창건한 곳이다(15:27,28). 이로 볼 때 아마도 바아사는 그 지역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엘라(Elah)로 지은 것 같다(Hammond).
7.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 임하사 바아사와 그 집을 꾸짖으심은 저가 여로보암의 집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 손의 소위로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며 또 그 집을 쳤음이더라
본절은 1, 2절이 별 의미없이 반복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본절은 2절에서 생길지도 모를 오해를 막으려고 추가된 해설적 성격의 절이다(Bahr, Hammond, Keil). 이때 오해란 바아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召命)을 받아 여로보암의 집을 멸하였다고 생각하는 오해이다. 그러나 본절에 분명히 나타나듯 바아사는 단지 이기적 동기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 즉 본절은 바아사가 우상 숭배 죄악을 저질었을 뿐 아니라 여로보암 일족을 살해한 일도 고발하고 있다("또 그 집을 쳤음이더라"). 다시 말해 바아사가 여로보암 왕조를 전복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야심과 정권욕(政權慾)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바아사를 도구로 삼아 패역한 여로보암 가문을 징계한 것일 뿐이다.(15:25-30).
소위(所爲) -
이에 해당하는 "마아쉐"는 "행하다", "만들다"에서 온 말이다. 이는 물건을 만드는 것과 관련해서는 "기량", "솜씨"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외에는 윤리적 행위를 지칭 하는데 대개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출 23:24 ; 스 9:13 등). 여기서도 바아사가 저지른 부당한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8.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륙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위에 있으니라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륙 년에 -
아사의 즉위를 B,C.910년경으로 볼 때 이때는 곧 B.C.886년경이다.
엘라가...이년을 위에 있으니라 -
엘라는 아사 제 27년째에 자신의 군대 장관 시므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9,10). 따라서 엘라는 만 2년도 채 통치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앞서 나답이 당한 것과 똑같은 재난이라 할 수 있다(15:28).
9. 엘라가 디르사에 있어 궁내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에 그 신복 곧 병거 절반을 통솔한 장관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마시고 취할 때에 -
15절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는 북왕국의 군대가 깁브돈에 출정하여 공략 중에 있었던 때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점에 왕이 대신의 집에서 연회(宴會)를 열고 있었다는 것은 뭔가 방탕한 인상을 준다. 더구나 당시 신하의 향응(響應)를 받았다는 품위에 어긋난 행위라는 지적도 있다.(Rawlinson).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엘라의 인품상 어떤 결점을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신복 시므리의 역심(逆心)도 어느 정도 어린 면에서 기인했을 수 있다. 즉 그는 내심 엘라를 왕으로서는 모자라는 인물로 비웃었을 수 있다.
신복...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
성경에서 시브리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이름도 출신 지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제 본절에 의하면 그는 오므리(Omri)와 함께 군부 내의 실력자인 점을 알 수 있다. 즉 이제 시므리는 북왕국 병거대의 절반을 이끄는 군대 장관인 것이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이러한 시므리를 언급함에 있어 굳이 "심복"이란 단어를 덧붙이고 있는 의도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즉 솔로몬의 신복이던 여로보암이 반역해 세운 북이스라엘 왕국이 줄곧 신복의 하극상으로 인해 오욕(汚辱)의 역사를 되풀이하였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Hammond). 한편 시므리는 또 한 사람의 군대 장관인 오므리가 깁브돈 출정 중에 있을 때 왕궁 수비를 맡고 있었던 것 같다(15-17절). 그리고 그때 왕이 술에 취하자 정권 탈취라는 야심적 기회를 포착하였을 것이다.
10. 들어가서 저를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 곧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이라
쳐죽이고 -
이 단어가 연상시켜 주는 잔혹성은 3절의 심판 예언 중 "쓸어 버려"가 주는 참담한 이미지에 상응한다. 즉 엘라가 당한 수치스럽고 비참한 죽음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선고와 그림처럼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 년-
이때는 곧 엘라 즉위 이듬해인 B.C. 885년경이다. 8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처럼 무력으로 왕위를 빼앗은 자의 아들이 통치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피살되는 사례는 엘라에 이어 북왕국 역사에서 두 번이나 더 발생된다(왕하 15:13,14, 23-26).
11. 시므리가 왕이 되어 그 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을 죽이되 남자는 그 족속이든지 그 친구든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남자 -
이에 해당하는 "솨탄"은 "벽을 향해 소변보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실 서서 소변보는 것은 여자와 구별되는 남자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그 족속이든지 그 친구든지... 남기지 아니하고 -
반역으로 차지한 왕권을 굳히기 위해서 시므리가 한 첫조치는 이처럼 앞서 바아사가 행한 것(15:29)보다 더 광범위한 학살이었다. 즉 시므리는 엘라의 일족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까지도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본절에서 가리키는 "족속"은 엄밀히 (1) 유산 상 속의 권리 및 (2) 피의 복수 의무를 지닌 친족들을 가리킨다(Hammond, 레 25:26 ; 민 35:19 ; 룻 2:12,13 등), 따라서 이들은 언제든지 후환이 될 가능성이 짙은 대상이다. 그러나 시므리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수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하려고 엘라의 친구들까지도 학살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정당치 못한 권력 찬탈은 항상 그에 따른 불안감을 갖게 되고 따라서 온갖 자구책(自救策)을 강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시므리는 누구보다도 단명한 7일 천하의 찰나를 누렸을 뿐이다. 따라서 이는 곧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 127:1)는 진리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일례이다.
12.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후로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말씀 같이 되었으니
멸하였는데 -
이에 해당하는 "솨마드"는 "파괴하다", "진멸시키다"는 뜻이다. 이는 곧 전쟁이나 대량 학살과 같은, 갑작스러운 큰 재난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대개 복수나 하나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하는 문맥에서 사용된다. 본절에서도 시므리가 바아사 왕가를 멸절시킨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경우이다. 즉 이는 불로 태워 재로 만들 듯이 바아사 일족에게 심판을 내리시갰다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한 번 발하여진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사 55:10,11).
13.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 아들 엘라의 죄를 인함이라 저희가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그 헛된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그 헛된 것 -
"헛된 것"에 해당하는 "하벨"은 "무가치한 것"을 뜻한다. 이는 본래 "공연한 헛수고"나 "무의미한 것"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우상(偶像)을 가리키고자 사용 되었다(전 2:11 ; 6:7 ; 8:10 ; 사 49:4). 즉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섬길 수밖에 없는 "거짓 신"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실상 거짓 신들을 섬기는 일이란 참된 신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채 미망(迷妄)을 헤매는 "헛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격동하였더라 -
이는 이미 앞서 2절에서 언급된 단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단어와 관련, 열왕기에서 "우상 숭배=하나님의 노를 격동케 하는 죄"라는 공식(公式)을 계속해서 찾아 볼 수 있다(15:30 ; 21:22 ; 22:53 ; 왕하 17:11 ; 23:26) 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30 주석을 참조하라.
14. 엘라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남은 사적 -
"사적"에 해당하는 "다마르"는 일명 "행적"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14:19). 그런데 본서 기자가 엘라의 여타 행위들에 대하여서 일절 침묵하고 있음을 상대적으로 엘라의 죄악(13절)을 보다 두드러지게 고발해 주는 효과를 띤다. 14:19 주석 참조.
성경 말씀:
너는 다만 네 죄를 인정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한 것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이방 신들에게 절하고 내 말에 순종하지 않은 것을 고백하여라."
렘 3:12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다른 왕을 세우실 것이며 그가 여로보암왕의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오.
왕상 14:14
29참새 두 마리가 동전 몇 푼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참새 한 마리도 그저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30하나님은 너희 머리카락도 다 세고 계신다.
31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하다.
마 10:29-31
그는 일시적인 죄의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통당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히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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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속성:
힘, 통치, 순수, 성소,
신실하신, 끝없는 관심/
배려, 언약/예언의, 말씀,
주권, 은혜, 계획, 섭리,
역사, 뜻, 징벌/징계하시는,
거룩하신, 공의, 심판,
영원, 진리, 왕권, 강력하신,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의 순수/통일성
지키기, 잘못에 대해
책망하기, 주님 앞에서
용맹스러운 사람, 주의
말씀 선포되어야..,
영예로운 고난 택하기,
🔵
잠시 오욕의 낙을 누리기
보다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영예로운 고난을
택하기. 헛된(무가치한)
우상과 거짓 신이 아닌
참된 신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는 삶이
되어야 겠다.
🩸✝️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온전히 맺기를 바라며..
자신도 죄를 짓고 다른 사람들도 죄를 짓게 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의 말씀들에 경외와 각심을 가지고 주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죄와 헛된 우상을 깨뜨리는 순종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JcznrDzRmU
습관이 되어버리지 않는 습관을 만들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베드로 후서 1:8)
처음에 습관을 만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습관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덕이 있고 인내하며 경건해지는 것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깐의 단계일 뿐입니다. 만일 의식하는 상태에서 멈추면 우리는 영적 자만의 굴레에 빠질 것입니다. 경건의 습관과 관련하여 바람직한 것은 그 습관이 너무나 익숙해져서 의식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 습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까지 주님의 생명 속에 잠겨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은 아직 공급되지 못한 덜 채워진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수고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극히 진실하고 단순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신의 작은 습관이 당신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 성경을 읽는 습관 등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경건 습관의 본래 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 대신에 서서히 습관 자체를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 경건의 습관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하늘 아버지께서 얼마나 마음이 상하실지 주의하십시오. “하나님, 지금은 기도하고 있으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어요. 이 시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정한 나의 시간이니, 주님, 간섭하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이럴 때 당신의 경건 시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니라 당신의 습관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아직 당신에게는 부족한 성품들이 많습니다. 그 약점을 인정하고 성품을 성숙하게 하는 훈련의 기회를 찾으십시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습관입니다. 사랑은 습관이 보이지 않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사랑의 연습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사랑하는 자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거룩함을 의식한다면 이는 당신에게 부족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있으며 주님과 진실한 관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뭔가가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유일한 생명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생명입니다. 그분은 어디에서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평안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불편한 것이 있습니까? 그 특별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당신의 주가 되게 하십시오. 그때 당신의 삶은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하고 진실한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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