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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20 : 1~11❄️생명의 주권자를 움직인 통곡의 기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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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0: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
성경에서 '그 때에'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막연한 어떤 시기'를 가리키지만(삿21:25) 여기서는 카일(Keil)의 주장처럼 앗수르의 유다 침입(18,19장)과 관련이 있다(6절). 즉 병행구절인 사38:1-22에 의해서도 분명히 알 수있듯 히스기야의 병은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해온 초기에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산헤립의 1차 유다 침입은 B.C.701년경 그리고 2차 유다침입은 B.C. 699년경의 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니 히스기야의 발병(發病) 시기도 그때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18:17 주석 참조.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 -
이사야(Isaiah)에 대한 이러한 소개는 이미19:2,20에서 행해진바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 또다시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그의 새로운 역할을 자연스레 소개하기 위함인 듯하다. 한편 본절에서 이사야는 왕의 자문자(諮問者)로서 왕이 죽게 될 경우 왕가에 일어날 혼란과 다툼을 예방하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너는 집을 처치하라 -
문자적 뜻은 '너는 네 집에 대하여 명령하라'이다. 이는 곧 죽기 전에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국정(國政) 인계를 하라는 뜻이다. 평행 구절인 사38:1에는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로 나와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 III,p.461).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
창50:5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구문에 나타난 미래형동사는 임박한 가까운 미래를 가리킨다. 또 이러한 임박한 죽음의 선포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1:1-4;삼상2:31-34). 그러나 히스기야가 어떠한 잘못으로 이러한 심판을 당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
혹자는 왕의 이러한 행동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여호와께로만 향하겠다는 다짐을 나타내는 것이다'(Gray)라고 말한다. 이것은 히스기야 왕의 경건성에 비추어 볼 때 적절한 해석이다. 한편 당시에 얼굴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얼굴을 든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대상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에게서 '얼굴올 돌렸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경멸이나 무관심을 가리킨다(왕상21:4;겔7:22). 따라서 기도를 위한 히스기야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스기야의 간절함을 나타낸다. 즉 그는 자기의 평상 업무와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후 오직 여호와께만 전심전력(全心全力)하여 매달린 것이다.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본절의 히스기야의 기도는 사38:3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이 기도는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잘것 없는 자신의 행적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행하고자 처신을 다했다고 하는 겸허하고 간절한 기도일 것이다.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
이것은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율법을 행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했을을 가리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히스기야의 이러한 경건한 행위를 모방만하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어 자랑하고 율법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책망하셨다(눅18:9-14). 실상 그러한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히스기야 왕의 차이점은 진실됨과 그렇지 못함에 있었다.
심히 통곡하더라 -
히스기야가 이렇게 심히 통곡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추측된다. (1)아직 그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Josephus), 21:1에 따르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12세였다. 그렇다면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받은 후(6절)에 얻은 아들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히브리적 관념에 비추어 볼 때 후사(後嗣)가 없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잘해 왔던 히스기야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형벌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2)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장수(長壽)를 약속하셨는데(잠10:27) 한창 나이인 중년에 세상을 하직한다는 것은 불공정한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Keil).이것도 역시 장수하는 것을 하늘의 축복으로 알았던 시대적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개연성이 있다.
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성읍 가운데 까지도 이르기 전에 -
사38:4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본문의 기록은 더욱 생생한 목격자의 진술임을 알 수있다(Pulit Commentary). 한편 여기서 '성읍 가운데'가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명백하지 않다. '성읍'에 해당되는 히브리어'하이르'(*)를 맛소라 학자들은 '마당' 또는 '뜰'이란 뜻의 '하체르'(*)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은 '가운데 마당까지도 가기 전에'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운데 마당'이란 히스기야의 왕궁 안에 있는 중간 뜰(middle court)을 가리킬 것이다. 아무튼 이사야가 미처 이곳을 벗어나기도 전에 계시를 받은 것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그토록 신속했음을 보여준다.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 백성의 주권자 -
이것은 성경에서 그렇게 흔하게 쓰이는 칭호가 아니다. 지금까지 삼상9:16과 10:1에서 사울에 대해, 삼상 13:14과 삼하 5:2에서 다윗에 대해 쓰여진경우등을 들 수 있을 뿐이다(Pulpit Commentary).어쨌든 여기서 이러한 호칭은 히스기야가 3절에서 자신을 이상적인 왕으로 표현한 것과 잘 어울린다. 그리고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호칭과 함께 이 칭호는 히스기야가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이었음도 시사해 준다(삼상13:14;행13:22).
내가...들었고 보았노라 -
19:20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더욱이 이러한 본절은 성도의 눈물의 기도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 준다(시 51:17).
6. 내가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십 오 년을 더할 것이며 -
자신이 죽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단지 자신을 긍휼히 여겨 달라는 것이었다(3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생명을 무려 십 오 년이나 연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복 주시되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엡3:20) 주시는 분이시다. 더군다나 히스기야 왕이 받은 이러한 생명의 연장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요6:40)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같이 다윗의 반열에 속한 자들을 위하여 '영원한 집'을약속하셨기 때문이다(삼하 7장).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
이와 똑같은 내용의 글은 이미 19:34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산헤립의 공격과 히스기야의 발병 시기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다시한번 시사해 준다(Hobbs, Keil). 1절 주석 참조.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이유가 곧 하나님 당신의 영광 및 다윗과 맺은 언약(삼하 7장) 때문임을 거듭 천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9:34 주석을 참조하라.
7. 이사야가 가로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종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무화과 반죽 -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악질 또는 기타 다른 요인으로 인한 종기(腫氣)및 위궤양등을 치유할 때 민간요법으로 무화과(Fig)를 사용하였다(R.D.Patterson). 그러나 여기서는 무화과의 본래적인 치유 효능으로 인해 히스기야가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신 마치 그리스도께서 진흙을 사용해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 것처럼(요9:1-12) 여기서 무화과는 하나님의 이적적인 치유 능력을 보여 주시는 매개물일 뿐이다. 평행 구절인 대하32:24도 히스기야가 질병에서 회복된 것이 하나님의 이적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종처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쉐힌'(*)은 '염증', '종기'(욥2:7;출9:9)또는 '역병'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발병 후에도 격리 수용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그의 종처는 전염성이 강한 역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으니라 -
8절에서 히스기야가 쾌차(快差)의 징조를 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히스기야의 종처는 그 즉석에서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나아 삼일 만에야 완전히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렇지 않고 즉시로 완쾌되었다면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징조를 구하였을리 만무하다.
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
히스기야가 이미 치유를 받은 후에(7절)도 왜 이처럼 징조를 구하였는가에 대하여 간혹 학자들간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병이 완전히 회복되는 기간으로 예언된 3일(5절)은 히스기야에게 있어서 참으로 초조하고도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기도가 정말로 상달되었는지 확인할 수있는 징조를 구하였던 것이다(Pulit Commentary).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를 히스기야의 연약한 믿음 탓으로 볼 수는 없다. 평행 구절인 사38:7,8에는 본절에서와 같이 히스기야가 직집 징조를 요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바로 여호와께서 징조를 주셨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종종 먼 미래에 성취될 약속에 대해 좀더 가까운 징조를 주시는 것은 구약시대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었다(19:29;출3:12;삿6:37-40). 오히려 아하스 같은 왕은 징조를 구하지 않으므로 책망을 받기도 했다(사7:10-13).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본절에서 자기에게 징조가 당연히 허락되는 줄 알고 징조를 요구한 것이다. 한편 '징조'(Sign)에 대해서는 본장 1-11절 강해, '징조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9. 이사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서 왕에게 한 징조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한 징조가 임하리이다 -
이와 비근한 예로 모세가 소명받을 때(출3:12)에도 징조가 임했고, 엘리 제사장의 집이 멸망할 때(삼상2:34)에도 징조가 임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징조'(*, 오트)는 자주 이적적인 사건과 연관이 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한편 본절과 같은 장면에서 징조는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듯시 행하실 것이라는 증표(證標)가 된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은 과거 시제로 '..... 십도를 나아갔습니다'로 되어 있다. 그리고 또 원문에는 의문사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래서 버니(Burney)는 '나아갔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크)를 '하옐레크'(*)로 수정하여 과거 시제를 미래 시제로 바꾸고 의문사를 첨가하였다.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도 그러한 견해에 입각한 것이다. 한편 '도'(度)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알로트'(*)는 '올라가다' 라는 뜻의 동사 '알라'(*)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래는 '계단'(Step)을 의미한다. 당시 해시계는 계단 맨 꼭대기에 막대를 세워 그 막대의 그림자가 비치는 계단의 수로 시간을 측정했다(Rawlinson). 이러한 해시계는 앗수르나 바벨론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는데 유다에선 히스기야의 아비 아하스(Ahaz, B.C735-716)가 처음으로 일영표(日影表)를 만든듯하다(11절;사38:8).
10.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물러갈 것이니이다
히스기야 -
지금까지 '히스기야'라는 이름은 원어상 '히즈키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는 '예히즈키야후'(*)로 기록되어 있다.여기 이외에 사1:1과 호1:1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오펠(Ophel) 비문에 보면 이것이 본래 이름이었던 것 같다(Gibson). 참고로 히스기야(Hezekiah)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강하심' 또는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심'이다.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물러갈 것이니이다 -
여기서 '나아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의 문자적인 뜻은 '길게 하다', '뻗치다'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자가 길어지는 때는 오후이다. 따라서 이 일이 오후에 있을 일이라면 그림자가 일반적인 속도보다 빨리 10도를 나아가게 한다 할지라도 별다른 확신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보다 분명한 증거를 '구하기 위하여 보다 어려운 징조를 선택한 것이다. 과거 삿6:36-40에서 기드온이 양털에 이슬이 있게 하는 것과 없게 하는 두 가지 이적을 요구한 것도 이처럼 분명한 증거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11.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
아하스의 일영표 -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이 해시계는 바벨론으로부터 아하스가 본따 온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우상의 상징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 38:8의 사해사본(Dad Sea Scrolls)에는 '일영표' 즉 '계단'이라는 뜻의 '마알로트'(*)가 '다락방'이라는 뜻의 '알리트'(*)로 기록되어 있다.그래서 그레이(Gray)는 그것을 '성신(聖神)숭배를 위한 방'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우상의 상징물이었다면 히스기야가 종교개혁할 때(18:3-6)에 그것을 제하였을 것이다. 또 본문에서도 해시계가 다락방과 같은 그러한 건조물로 되어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한편 야딘(Y. Yadin)은 '아하스의 일영표'가 지붕 위나 높은 건물 위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참고로 바벨론의 일영표는 12계단으로 되어 있었음을 기억함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Rawlinson).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 -
여기서 '물러가게 하셨더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와야쉐브'(*)는 히필형(Hihpil;사역형 능동)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해 그림자가 물러갔음을 강조해 준다. 한편 이 사건이 전세계에 영향을 주는 지구 회전의 역전(逆轉)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아하스의 일영표에만 영향을 끼친 국지적(局地的) 사건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태양과 달이 멈추었던 사건(수 10:12,13)과 더불어 이 사건 역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이적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어쩌다 보니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분과 대화 나누게 되서 감사하네요~ 잘됐으면 좋겠네요~
주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이기를 바라며 은혜와 평강 가운데 인도함 받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VuRN-iHvLA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요한복음 16:26)
십자가는 통과해야 하는 어떤 과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통해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단 한 가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완벽하고 절대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이러한 하나 됨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그렇다면 왜 구합니까? 기도의 개념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응답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온전하고 철저하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응답을 원하여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허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응답은 언제나 옵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가 원하는 데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허탈감은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살아있는 증거품으로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날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6-27)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로 인하여 당신이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하나님과 친밀합니까? 주님의 대속의 삶 때문에 당신의 삶이 생동력으로 넘치고 있습니까? ‘그날에’ 당신은 예수님과 너무나 일치가 되어 주님과 당신 사이에 구별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을 때, 다른 사람에게 구실을 찾아 비난하려는 자세를 주의하십시오. 그것이 언제나 사탄의 올무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깊은 교훈을 주시려는 이유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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