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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22 : 12~20❄️심판을 늦추는 겸비한 마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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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2:12.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사반의 아들 아히감 -
아히감(Ahi-kam)이란 이름의 뜻은 '내 형제가 일어났다'이다. 그는 여호야김 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해 준 사람이며(렘 26:24), 예루살렘 멸망후 포로로 끌려간 그다랴의 부친이다(렘 39:14;40:7). 3절 주석 참조.
미가야의 아들 악볼 -
'악볼'(Achbor)이란 이름의 뜻은 '들쥐'이다. 앞서 '사반'이란 이름 또한 '오소리'란 뜻이었는바 이처럼 이름의 뜻이 동물을 지칭하는 경우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선 드물지 않았던 것 같다. 3절 주석 참조. 한편 악볼이 왕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토록 세움받았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나 그의 아비미가야(Micaiah)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대신 악볼의 아들 엘라단이 여호야김 왕에 의해 애굽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렘 26:22). 한편 병행 구절인 대하 34:20에는 악볼이 '미가의 아들 압돈'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 잘못된 기록일 것이다(Rawlinson B hr).
왕의 시신 이사야 -
'아사야'(Asaiah)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셨다'이다. 그시신 (侍臣), 곧 왕의 수발을 받드는 신하였다(B hr).
13.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그말씀을 먼저 자기에게 적용하였다. 11절에서 옷을 찢은 그의 행위가 이것을 잘 보여 준다. 실상 신28:15-68과 레 26:16-19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백성들에게 미친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무릎 꿇은 것은 일국(一國)의 최고 통치자로서 마땅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여기에서 '온 유다'는 나라와 국민, 땅을 다 포함하는 말로서 '백성'이라는 말과는 약간 의미상 차이가 있다.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
혹자는 본절의 의미를 발견한 책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지 또는 진정한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 물어보라는 의미인 것으로 이해한다(Dunker). 그러나 훌다의 예언 내용에 의거할 때 이러한 질문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16-20절). 대신 본절은 책의 내용, 즉 책에 기록된 심판이 내려질 것인지 물어보라는 의미이다(Keil & Delitzsch, Rawlinson, Von Ger-lach). 다시 말해 이는 레 26:16-19; 신 28:15-68에 기록된 것과 같은 저주가 우리에게 임할 것인지에 대하여 물어보라는 의미이다.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
여기서 '발하신'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체타'(*)는 '노를 발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차트'(*)의 과거 완료형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법에서 예언이나 본절과 같은 경우에 과거 완료형이 임박한 미래의 일을 나타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본절은 그 이전 과거에 내린 심판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임박한 심판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 한편 요시야 왕은 출 20:5에 나오는 계명의 말씀처럼 자신의 부친이나 조상들의 죄가 자기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죄에 대한 심판이 자손에게로 연기된 것(20:19)과 므낫세때에 내린 유다 멸앙의 예언(21:10-15)에 대해 인식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유다 왕들의 반복된 배교 행위로 인하여 축적된 죄의 결과, 이제 멸망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므로 그 같은 심판에 대한 요시야의 두려움은 더욱더 심각하였을 것이다.
14.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더불어 말하매
본절에 기록된 정보 이외에 여선지훌다(Huldah)에 관해 알려진 바는 없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선지자들이 어떤 활동을 했다는 기록도 거의 없는 상태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의 여선지로는 미리암(출 15:20; 민 26:59), 드보라(삿4:5), 이사야의 아내(사 8:3 KJV를 참고), 노아댜(느 6:14) 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훌다가 예언적 은사를 소유했던 자로서 당시 상당한 명성을 지녔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요시야의 당시에는 훌다 외에도 예레미야와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을 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 출신이므로 예루살렘에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Keil, B hr). 또 그들은 궁전 선지자가 아니어서 요시야의 개혁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Hobbs). 반면에 훌다는 왕궁에서 예복을 주관하는 공직자인 살룸(Shallum)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왕의 측근에 있는 선지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왕의 사자(使者)들은 예레미야나 스바냐를 채지 않고 훌다를 찾아갔을 것이다(Matthew Henry).
예루살렘 둘째 구역 -
예루살렘 둘째 구역(*, 미쉬네)이란 왕조 시대에 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이 확장될 때 포함된 지역을 가리킨다. 훗날 '미쉬네'는 이곳의 지역명으로 고착된 것 같다(Hobbs). 한편 이 '미쉬네'는 일명 '낮은 지역' 이라고도 불리웠는데 그 까닭은 그 지역의 위치가 계곡이었기 때문이다(G. A. Smith).
15. 훌다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
여기서 '너희를 내게 보낸사람'이란 다름아닌 요시야 왕을 가리킨다(12, 13절). 그런데도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 여선지 훌다의 어투는 1장에서 선지자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사자(使者)들에게 했던 어투와 유사하다(1:6). 이와같이 훌다가 구약의 전통적인 선지자들의 어투로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녀는 선지자 엘리사처럼(13:14) 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궁전 선지자였던것 같다(Wilson). 한편 많은 학자들은 본절 이후에 기록된 훌다의 말을 15-17절과18-20절 두 부분으로 나눈다. 그리하여 첫째 부분은 들어야 할 모든 사람에게 한 말이고 둘째 부분은 특별히 왕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Keil & Delitzsch, B hr). 그러나 전후문맥 관계에서 볼 때 두 부분은 다 신명기적 심판과 축복에 대한 언급으로서 모두 왕에게 한 말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Hobbs).
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내가...재앙을 내리되 -
이러한 본절의 말씀은 21:12에서 므낫세 시대에 주어진 심판의 말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러니 그 구절 및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이곳과 그 거민에게 -
여기서 '이곳'이란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그 거민'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둘은 궁극적으로 '온 유다'를 의미한다. 한편 예루살렘에 관한 이러한 저주의 말씀은 19:31에서 히스기야 시대에 주어진 예루살렘에 관한 축복의 말씀과 서로 상반된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을 무시한 므낫세 왕과 유다 백성들의 패역(悖逆) 때문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조변 석개(朝變夕改)하시는 때문은 아니다(21:8-15). 이와 관련해서는 해당 부분의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
이미 언급한 대로 요시야가 이때 읽은 성경 중에는 신명기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11절 주석 참조 실상 신 27, 2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 순종 여하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언약이 언급되어 있다.
17.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본절에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케 한 원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언급되어 있다.
1 하나님을 버림:이처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했다는 뜻이다. 이는 곧 모든 죄악의 첫발걸음이자 죄악의 근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서는 어떠한 의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는 이치와 같다(약 3:11). 그래서 율법서의 상당 부분(신 12:19;29:25-28)과 예언서의 많은 부분(삿 10:13; 삼상 8:8; 렘 1:16 등)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에 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2 우상 숭배에 빠짐:즉, 유다 백성들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 것"(롬 1:23)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떠난 자는 이처럼 자연히 우상 숭배에 빠니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하나님 안에서 살든지 하나님을 떠나 다른 무엇을 섬기든지 무엇을 꼭 의존해 야만 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그래서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6:24;눅 16:13).
3 적극적인 범죄:유다 백성처럼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없고 다른 것으로 채워 있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기 마련이다(창 4:7, 8; 삼상 18:10등). 왜냐하면 악인은 항상 독을 머금고 있으면서 (잠 10:6,11) 악을 더듬어 찾음으로 더욱더 사악한 길로 스스로를 재촉하기 때문이다(잠 11:27).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 유다에 대한 심판이 연기되기 시작한 것은 8:19에서부터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심판을 연기 하신 것은 당신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서였다(겔33:11;벧후 3:9).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요나에 의해 니느웨에 경고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된 사건에서 볼 수 있다(욘 3:1-10). 그러나 그 같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계속 죄악 가운데서 행하였으니(21:1-9)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된 지경에 까지 이르렀고 어떠한 회개에 의해서라도 만회(挽回)할 수 없게 된 것이다(대하 36:16).
18.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
지금까지의 문맥에서만 본다면 여기서 '네가 들은 말'이란 사반이 율법책을 읽을 때 요시야가 들은 말 (11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부분을 19절 서두에 연결시켜 이해한다. 즉, 그들은 '네가 들은 말'을 19절에 언급된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에 대한 저주(16, 17절)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주 역시 이미 모세 오경에도 나와 있는 바이니(신 28:15-68) 어떤 견해를 취하든 별 무리가 없다. 한편 이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시야에게 따로 말씀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의 태도가 겸비하였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통곡하였기 때문이다(11, 19절).
19.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저주가 되리라 -
이는 곧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무하며 놀램과 저주거리가 되어 거민이 없게 되었나니"(렘 44:22)라고 한 것과 같은 말이다. 또한 이러한 말은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로서 레 26장과 신 28장에서 인용한 것인 듯하다(렘 4:7;18 :16).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
하나님은 앞서 히스기야에게도 똑같이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19:20)고 말씀 하셨다. 이것은 요시야의 간절한 회개의 기도(11절)가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가리킨다. 그 결과 히스기야 때에 그의 경건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되었던 것(20:19)처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결정적 심판은 요시야 사후(死後)에 있을 것임이 약속되었다(20절). 이처럼 하나님의 앞에 겸비한 의인이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받은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와 완전히 대조가 된다(창 18:22-32; 19:23-28).
20.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너희 열조에게로 모으고'가 된다. 이러한 말은 창 25:8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침상에서 평안히 죽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죽음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이다(Keil, Hobbs).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 요시야가 바르느고와의 전투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사실과 일견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23:29).더욱이 본절 바로 뒤에는 '평안히'(*, 베솰롬)라는 부사어가 첨언(添言)되어 있어서 더욱더 모순되어 보인다. 때문에 혹자는 여기서 '평안히'라는 부사어가 왕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도 한다(Nicholson). 그러나 애굽과의 전쟁에서 그 백성들이 '평안히' 있었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본절의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1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하고는 고난의 때가 요시야 때는 아니라는 것이다.
2 렘 22: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시야는 "예루살렘 문밖에 던지우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왕조의 묘실에 평안히 잠들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실제로 유다의 멸망은 요시야가 죽은 후 3년 뒤인 여호야김 때에 이루어졌으며(24:1) 전쟁터에서 죽은 요시야는 신복들에 의해 예루살렘 묘실에 장사(葬事)되었다(23:29, 30).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
창 21:16이나 44:34에서 보듯이 어떠한 참혹한 상황을 눈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은 참으로 크신 하나님의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히스기야와 마찬가지로(20:9-11) 요시야 왕도 그 같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이제 자기 백성들의 참람한 상황을 보지 않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
즉, 이말은 힐기야, 아히감, 악볼, 사반, 이사야와 같은 왕의 사자(使者)들(14절)이 훌다의 예언을 요시야 왕에게 전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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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보호, 말씀, 심판(때론
연기하심), 축복,
긍휼, 약속, 경고, 뜻,
사랑, 오래 참음, 의,
평안, 영원, 안식, 예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에 청종, 겸손(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 기도, 순종,
회개, 겸히함, 경건, 하나님의
앞에 겸비한 의인, 말씀 선포,
🔵
여호와께서 세우셨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무엇을 꼭 의존해야만 하는 속성을
지녔다.->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채워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연기 하신 것은
당신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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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그말씀을 먼저 자기에게 적용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저 자신에게 적용하여 온전한 회개와 순종을 주님께 드리는 겸비한 믿음으로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Kd2N7XnYuo
안식의 신학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태복음 8:26)
두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주님을 향해 확실한 신뢰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주의 자녀들이 주님을 향한 확신으로 가득 차길 바라시며, 따라서 어떠한 위기에서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믿을만한 자녀들이 되어 줄 것을 기대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상황이 더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공포심에 빠져서 유치한 기도를 드립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한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확신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잠드신 것 같고 우리 눈에는 우리를 파괴하려는 것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 말씀을 듣고 “또 실패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주님만을 완전히 신뢰했다면 얼마든지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었으련만 그 기회들을 다 놓쳤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쓰라림은 어떠했겠습니까?
인생에는 폭풍도 없고 위기도 없이 그저 인간의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당하면 우리가 누구를 신뢰하는지 당장 드러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왔다면, 가장 고통스러운 위기를 지나면서도 주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화에 대하여 많이 다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성화가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성화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는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 큰 기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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