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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QT🧊열왕기하 23 : 21~30❄️말씀을 온전히 이루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람 본문
생명의 삶 QT🧊열왕기하 23 : 21~30❄️말씀을 온전히 이루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람
credo15229850 2024. 8. 15. 04:42https://tripol.tistory.com/484
열왕기하 23:21. 왕이 뭇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본절로부터 23절에 기록된 유월절 기사는 평행 구절인 대하 35:1-19에 비해 매우 간략하다. 역대기의 기록에 의하면 요시야에 의해 시행된 유월절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1 유다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참여했다는 점이다(대하 35:18). 2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모든 의식들이 적법하게 준수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 유월절이 율법에 적법했다는 것은 신명기의 내용 뿐만 아니라(신 16:1-18) 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출애굽기에 기록된 유월절 규례까지 지켰다는 뜻이다(출 12:3-20; 13:5-10). 따라서 앞서 힐기야 제사장이 발견한 율법책(22:8)은 모세 5경 전부를 포함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Rawlinson).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 부터...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
과거 히스기야 시대에도 유월절은 시행되었으나 그 때에는 율법에서 명하는 유월절 규례와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예를 들면 1 율법이 정한 때에 시행되지 않았고(대하 30: 2, 3), 2 규정된 정결 의식을 행하지 않은 채 유월절 양을 먹은 점(대하 30:18)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때 요시야 때에 행한 유월절은 실로 뜻깊은 것이다. 본절의 '이렇게'라는 부사 역시 지금까지 요시야와 같이 율법의 규정대로 완전하게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음을 강조해 준다. 한편 이외에도 요시야가 행한 유월절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1 거국적인 차원에서 시행되었다는 점(대하35:18), 2 예루살렘에서 실시되었다는 점(대하 35:1), 3 역대기 제사장들의 역할을 활성화시켰다는 점(대하 35:2, 10-14)등이다.
23. 요시야왕 십 팔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요시야 왕 십 팔 년에 -
22:3에 이어 요시야 18년이 두번째로 강조적으로 표기되었다. 이것은 본서 기자가 요시야 18년을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즉, 요시야 12년에도 종교 개혁이있었으나 (대하 34:1-7) 본서 기자는 보다 대대적인 종교 개혁이 시행되었던 요시야 18년을 더욱더 중요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22:3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본절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요시야는 공적(公的)인 예배의 완전한 개혁을 성취한 후 사적(私的)으로 개인들의 가정에서 행해지던 모든 미신과 우상 숭배를 폐지하는 일을 계속했다(Thenius).
신접한 자와 박수 -
21:6 주석 참조.
드라빔 -
이것은 고대에서부터 이스라엘을 포함한 근동 각지의 사람들이 각자 가정에서 섬기던 신이다(창 31:19). 이는 사사시대나(삿 18:14) 왕조 시대에도 매우 성행하였으며(삼상 19:13) 심지어 포로 귀환 이후에도 숭배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슥 10 2).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31:19 주석을 참조하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더라 -
이는 곧 이스라엘 열왕들 중에 요시야만큼 온전하게 율법을 준행한 자가 없었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앞서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하게 평가한 적이 있다(18:5).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 평가 내용을 분석해 보면 1 히스기야가 어느 왕보다도 하나님을 의뢰하였다면 2 요시야는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함에 있어서 열왕들보다 더 완전했다라는 의미로 구분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는 다시 '그 조상 다윗과 같이' 정직히 행했다는 공통된 평가로 요약될 수 있다(18:3; 22:2). 따라서 본서 저자는 히스기야나 요시야가 다른 열왕들에 비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정직하게 행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는 평을 첨부했던 것이다. 18:5주석 참조. 한편 본절에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신 6: 5에 기록된 쉐마(Shema) 본문에 의거한 평가이다. 3절 주석 참조. 그리고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이란 표현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누차 당부했던 말들(왕상2:1, 3; 6:11-13;8:25, 26; 9:1-9) 속에서도 여러번 나타나는데 이것은 율법 준수에 대한 요시야의 철저한 면을 보여 준다. 한편 구약 외경서 가운데 하나인 집회서 49:4에는 다윗과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제외한 모두 유다의 왕들이 범죄하므로 멸망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Pulpit Commentary).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그러나...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
요시야가 행한 많은 개혁과 선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유다를 멸망시키고자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본문에 보면 그 이유는 선왕(先王) '므낫세의 죄' 때문이었다고 한다(21:1-16; 24: 3; 렘 15:4). 여기서 '므낫세의 죄'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유다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죄를 통틀어 가리키는 표현임과 동시에 유다가 필연코 멸망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과거 북왕국 이스라엘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로 인해 멸망한 것과 같다(17:21-23).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은 멸망으로 예정된 어떤 백성이 그 죄악에서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 심판의 뜻을 돌이키신다고 약속하신 말씀과 서로 상반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렘 29:12-14).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이 조화될 수 있다. 1 이것은 허다한 결함 투성이의 이스라엘을 폐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이스라엘을 다시금 일으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한 것이다(렘 31:31-34; 겔 37:25-28; 마 3:9; 롬 9:6-8; 갈 6:15, 16). 2 요시야 왕의 완벽한 순종 행위와는 달리 유다 백성들의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므낫세 때의 구습(舊習)을 쫓아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레미야서와 스바냐의 예언서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렘 2-13, 16-19장; 습 1장).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심판을 연기하거나 돌이키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오래 참으심을 무시하고 계속 죄에 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모리 족속을 위시한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셨듯이(21:11; 창 15:16; 왕상 21:26) 그 땅에서 쫓아내거나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더 크게 타오르기 전에 죄에서 돌이키는 결단을 보여야 하겠다.
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내가...버리리라 -
이처럼 본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 성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유다의 범죄가 이스라엘의 범죄와 동일하다고 판단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이방인들의 범죄와 동일한 것으로 규정했던 17:8, 15절의 말씀과 연결된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을 전적인 은혜 가운데 택정하사 당신의 눈동자같이 아껴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신 32:8-10).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택하신 유다와 예루살렘을(19:34; 21:7) 버리시겠다고 하신 것이다(렘 6:30). 이것은 포로 이전 시기 유다인들의 죄악상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28.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시야의 남은 사적...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
요시야의 통치에 대한 이러한 결론은 너무 간략해서 이상하게 보인다. 실상 평행 구절인 대하 35:20-27에서는 보다 자세하게 요시야의 행적을 마무리하고 있다. 아마도 본서 기자가 요시야의 통치에 대한 결론을 이와같이 간단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은 26, 27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요시야의 비극적인 죽음이 그의 말년을 어둡게 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29.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본 후에 죽인지라
애굽 왕 바로느고 -
역사상 '바로느고'(Pharaoh Neco)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려져있다. 이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니느웨(Nineveh)가 멸망한 후 3년째 되던 해인 B.C. 609년에 애굽의 왕이 되었다. 왕이 된 그는 당시 앗수르를 장악하고 있던 바벨론 왕 나보폴라살(Nabopolassar)과 격전을 벌였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고 유다 땅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B.C. 605년 경에 다시 나보폴라살을 공격했는데 이때에 나보폴라살의 아들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 갈그미스 전쟁에서(대하 35:20) 애굽을 격파했다. 이것으로 애굽의 세력 확장은 중단되었다.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올라가므로 -
느고가 왕위에 오른 때(B.C. 609)는 이미 앗수르가 바벨론의 수중에 떨어진 때(B.C. 610)이다. 따라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러 유브라데 강가로 올라갔다는 말은 역사적 정황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본절은 느고가 바벨론 왕을 치러 갔거나 아니면 바벨론과 싸우는 앗수르 잔류군을 돕기 위해 갔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요시야 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
평행 구절인 대하 35:20- 27은 요시야와 애굽왕 바로느고와의 전투 기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전투의 원인: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앗수르가 멸망하고(B.C. 610년) 바벨론 제국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 앗수르 영토에는 아직도 앗수르 잔류군이 남아 있었고 바벨론도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때야 말로 애굽으로서는 팔레스틴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고 옛 앗수르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 더 할 나위 없는 호기라고생각하였다. 이에 요시야는 팔레스틴에 대한 애굽의 지배권이 부활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므깃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2 경과:애굽 군대는 가사와 아스글론을 점령하고 점차 북상(北上)하여 므깃도에 이르렀다. 요시야의 군대도 갈멜 산맥을 통과하여 므깃도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서 양군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하 35:21)을 거부하고 전쟁을 수행하던 요시야는 전사하고 유다군은 패퇴하였다. 이에 느고의 군대는 계속 북진하여 하란 공성(攻成)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전쟁으로 애굽은 팔레스틴과 수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여 수년간 통치하였다. 3 의의:이 전쟁은 유다의 멸망에 대한 전조(前兆)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 유다는 앗수르 대신 애굽의 속박을 받아 사실상 국권(國權)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다 왕 여호아하스는 바로느고에 의해 리블라(Riblah)로 호출되어 폐위당했으며, 엘리아김 같은 왕은 애굽 왕에게 충성을 표하기 위해 여호야김으로 개명(改名)을 해야만 했다(32-35절). 그러나 유다를 지속적으로 지배하던 바로느고도 결국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 군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애굽으로 퇴각함으로써(24:7; 렘 46:2)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였다.
므깃도 -
이곳은 오늘날의 '텔 엘 뭇셀린'(Tell el Mutsellin)에 해당되는 곳으로 이스르엘 평야에 위치한 청동기 시대의 성읍이다(슥 12:11). 이곳은 애굽에서 메소포타미아로 통하는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는바 팔레스틴에서 가장 전략적인 요충지 중 하나였다. 그런데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북쪽으로 이렇게 멀리까지 올라온 것은 전투 중 행여 유다 성읍에 어떠한 위험이라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Rawlinson).
30. 신복들이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 묘실에 장사하니 국민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저에게 기름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 -
대하 35:20-24에는 요시야가 므깃도(Megiddo)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죽은 것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그것은 본절의 기사와 서로 상치되는 듯하다. 그러나 카일(Keil)의 견해에 따르면 역대기 기록은 요시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죽은 것으로 해석할 수 없으며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하다드림몬 (Hadad-rimmon) 쯤에서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슥12:11).
국민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스를 데려다가 -
본서에 따르면 정치적인 일에 있어서 유다 '국민' 의 역할은 매우 두드러졌는데 특히 다윗 계통의 유다 왕을 선택하여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음을 알 수 있다(11:12; 21 :24). 한편 '여호아하스'(*)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붙드신다'라는 뜻으로서 렘 22 :10-12에서는 살룸(Shallum)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그런데 국민들이 무슨 근거로 그의 형 엘리아김(34전)을 두고 그를 왕위에 추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혹자는 백성들이 동생 여호아하스를 더 유능한 자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고(Keil), 또 다른 사람은 형 엘리아김이 요시야를 따라 므깃도로 나갔다가 느고에 의해 포로로 잡혔기 때문이라고도 하나(Rawlinson) 분명한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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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성품:
율법, 섭리, 영원, 심판,
오래 참으심, 진노하시는,
눈동자 같이 아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준수/준행, 종교 개혁,
예배, 하나님을 의뢰하는,
온전함/철저함, 회개(죄
에서 돌이키는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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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 전무후무한 신앙
마음, 성품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께서 붙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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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주의 백성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섭리.
주님을 향한 온전한 회개와 순종을 미루지 않고 속히 행하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매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uXZ8xEpb-Q
거듭남의 증표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한복음 3:7)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가 죽을 수 있을 만큼 나이가 찼을 때 그의 낡은 주장에 죽고, 자신의 덕, 종교, 모든 것에 죽을 수 있을 때, 그래서 전에는 없었던 생명을 자신 안으로 영접할 수 있을 때입니다.(요 3:4) 새 생명은 의식적인 회개와 무의식적인 거룩함으로 드러납니다.
“영접하는 자”(요 1:12) 예수님에 대한 나의 지식은 내적인 영적 인식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서 배운 것들일 뿐입니까? 내 삶 속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 자신의 개인적 구세주로 연결하는 어떤 증거들이 있습니까? 모든 영적 역사에는 그 밑바탕에 주 예수님을 경험한 인격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거듭났다는 뜻은 내가 예수님을 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을 구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합니까? 거듭남은 하나님의 통치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줍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항상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분의 본성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분의 통치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합니까? 아니면 죄를 멈추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났다는 뜻은 죄를 멈출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가?”라고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거듭난 생명의 효력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합니다. 단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짓기를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의 의미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따라 순종하면 우리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https://m.cafe.daum.net/mercyreformedchurch/ULF8/1487?listURI=%2Fmercyreformedchurch%2FULF8
https://i.pinimg.com/564x/9f/e1/58/9fe158985e78d3f706fe1f58261407ef.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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